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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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嚴翰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행적
3.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후한 또는 삼국시대의 인물.


2. 행적[편집]


춘추공양전에 밝았다는 것으로 볼 때 전형적인 유학자의 생각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며, 엄한과 달리 종요가 춘추공양전을 싫어하고 춘추좌씨전을 좋아했다. 춘추좌씨전은 열국의 흥망이나 추이를 보면서 그 상황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해서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외면을 받았다가 후한 말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춘추공양전은 춘추곡량전과 함께 춘추필법을 중시해서 경문의 표현의 차이를 통해서 공자가 내세우는 대의를 알아보고 문답 형식으로 기록하는 방법을 보고 있다.

종요는 춘추좌씨전을 태관에 비유하면서 춘추공양전을 떡장수에 비유해 깎아내렸으며, 서로의 기호 차이로 인해 엄한은 종요와 자주 논쟁을 했지만 종요가 기민하고 논지를 잘 폈고 엄한은 어눌해서 막상 아무 말도 못 했다.

사통에서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에 대해 평가하면서 종요가 엄한에게 했던 좌씨를 태관의 요리사, 공양을 거리의 떡장수로 평했던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학자의 명석한 비평이라는 평가를 했다.


3. 창작물에서[편집]


소설 조자룡 하북제패에서는 기주 상산군 정형현 사람으로 구씨산으로 와서 노식, 팽백을 찾으러 왔다가 노식을 통해 고유와 서로 소개했고 빈손으로 오는 것은 예가 아니라며 노식과 팽백에게 서책과 죽간을 선물했다.

노식이 최열에게 천거했다면서 엄한이 주어질 자리는 4백 석 낭중이라 필요한 서책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엄한은 녹봉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서책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고 했으며, 노식이 조정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고유를 살펴주라고 하자 노식의 요청에 따라 춘추의 가르침을 이야기해주기로 한다.

고유와 이야기해보면서 감탄하고 고유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닌 말벗이 되기로 했으며, 중앙의 부름을 받고 치서시어사를 지내다가 역현의 현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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