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중국)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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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 三國時代
220년~280년


파일:Sanguo_ma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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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정립도


삼국의 정립 과정과 서진의 삼국 통일 [1]
국가
조위
촉한
손오
건국군주
조비[2]
유비
손권
멸망군주
조환
유선
손호
군주대수
8대[3]
2대[4]
6대[5]
성립
220년
221년
229년[6]
멸망
265년
263년
280년
수도
허도
낙양
성도
무창[7]
건업[8]
이후 국가
서진

1. 개요
2. 시기에 대한 견해
3. 주요 사건
5. 특성
6. 정치·사회
7. 경제
8. 문화
9. 언어
10. 군사
11. 역사학에서의 비중
12.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
13. 삼국시대가 인기 있는 이유
14. 로마 제국과의 비교
15. 한국사와의 관계
16. 주요 인물
17. 여담
1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중국 후한에서 서진 사이에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중국의 통일 왕조인 후한이 멸망하면서 군벌들의 세력 싸움 끝에 조위(曺魏), 촉한(蜀漢), 손오(孫吳)라는 세 나라로 갈라졌으나[9], 결국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이 천하를 통일시켜 삼국시대는 종식되었다. 중국사 중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덕분에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대다.


2. 시기에 대한 견해[편집]


중국의 삼국시대 시기에 대한 견해는 세 개가 있다.

  • 1: 후한이 헌제의 선양으로 공식적으로 멸망한 헌제 선양~서진의 삼국 통일까지의 시기.
약 400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통일제국 한나라(漢)가 무너지고 위나라의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시점부터 진나라(晉)가 일시적으로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60년 동안의 분열시대. 단 이는 한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220년부터를 난세의 시작으로 잡았을 때의 구분이다.[10]

《연의》 등으로 인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기. 《정사 삼국지》도 이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삼국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를 다룬다. 실제로 각종 매체에서는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때가 후한이 본격적으로 쇠락하고 각지의 군벌이 권력 다툼을 시작한 시기이다. 다만 이전 문서에 적혀있는 국가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주장. 지방에 인사권을 행사하고 수만 명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상태를 국가 기능 상실이라고 하진 않는다. 국가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동탁 집권 이후.[11]

삼국시대가 위진남북조시대의 일부로 포함되긴 하지만 삼국시대 자체는 역사적으로 봐도 서진의 통일로 끝난 게 맞고,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도 서진의 통일로 끝나기에 대중적인 인식도 서진의 막장화는 《삼국지》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 허나 팔왕의 난~영가의 난까지 벌어진 서진의 멸망까지의 흐름을 기존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12] 사마씨 정권이 집권하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무리수와 사대부, 즉 호족들의 대한 견제를 할 수 없게 된 것도 삼국시대에 일어난 서진의 건국과정 때문이었고, 팔왕의 난은 이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해서 일어난 혼란이었기 때문이다. 삼국 통일을 완성한 사마염 사후에 바로 팔왕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기간은 통일 후 10년을 겨우 채운 수준이었고, 서진은 팔왕의 난으로 부터 10년 후에 영가의 난으로 멸망하게 된다. 즉, 서진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과 서진이 멸망한 결과가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일들의 실질적인 종결점이라는 것이다.

  • 기타: 그 외로 유비의 입촉, 한중왕 즉위 또는 조조의 위왕 즉위, 적벽대전의 천하삼분에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삼국시대를 다룬 매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삼국지》, 즉 역사서 《정사 삼국지》와 소설인 《삼국지연의》, 특히 《삼국지연의》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시대는 후한 말 난세가 시작되어 군웅들이 할거하고, 그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셋이 할거하였다가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시대라는 점이다. 즉, 《삼국지연의》는 후한 말~삼국시대를 다루는 작품이며 '삼국의 정립'과 '삼국시대의 시작'은 그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당연히 시대 구별로써의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의 배경 시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 이를 전제로 자세하게 보자면 후한의 완전한 멸망으로 이전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상위 권력이 사라진 헌제 선양을 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거나, 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동등한 삼국의 탄생'을 기준으로 손권의 칭제(229년)을 삼국시대의 완전한 시작으로 보는 경우, 이보다는 좀 유연한 기준으로 명목상 후한이 아직 존속하고 있기는 하나 이전까지 불안정했던(따라서 한나라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쉽지 않던) 군벌들이 정리되고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과 조직을 갖춘 세 세력이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는 시기를[13][14] 기준으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문서는 1번의 시기만을 다루고 2번의 확장된 시기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문서 참조.


3. 주요 사건[편집]


주요 사건을 일일이 기재하면 끝도 없기에 천하 판세에 영향을 준 굵직한 사건만 추려 기재하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항목은 삼국지/연표 참고,



4. 삼국[편집]


삼국시대의 삼국은 다음의 세 왕조를 가리킨다.

  • (魏)(220~265): 중원을 장악. 통칭 조위(曹魏).
  • 촉한(蜀漢)(221~263): 파촉(사천) 일대에 할거. 정식 국호는 한(漢). 통칭 촉(蜀).
  • (吳)(229~280): 강남 일대에 할거. 통칭 손오(孫吳), 혹은 동오(東吳).

유비가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흔히 부르는 '촉'이 아니라 '한'이다. 유비가 한나라의 후계자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당장 조선시대의 <적벽가>만 해도 첫머리가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 시절"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중국사 연구나 대중매체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언급한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은 보통 하나의 한나라 역사로 다루는 편이 많으나 촉한의 경우엔 삼국시대 자체가 혼란의 시대였으며, 그 정통성에 있어도 논란이 있기에 사학적으로 따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 삼국시대 역사의 정사인 《정사 삼국지》와 삼국시대를 가장 널리 알린 소설 《삼국지연의》의 판본 및 번역물들 역시, '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 스스로 사용한 이름도 아닌 '촉'이라고 하면 한나라를 이은 정통왕조가 아닌 촉 지방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촉한"이 맞는 명칭이다. 게다가 "촉"이라고만 하면 다른 촉나라들과 헷갈릴 여지도 있다. 이건 다른 2개의 나라도 마찬가지. 해당문서 및 역사에서는 '한'이라고 하면 통일제국 한 왕조와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촉한"이란 명칭으로 표현한다.

  • 촉한? 촉? 계한?
'촉한정통론자들이 촉이 아닌 촉한을 선호한다'고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촉한은 촉한 정통론에 기반한 명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촉한정통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올바른 명칭의 문제로 역사학적으로 보면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15] 이는 당연한 것으로 촉한의 국호가 촉이 아니고 단순히 파촉 지방에 위치한 나라였을 뿐인데 이걸 촉나라라고 부르는 건 조선의 국호를 쓰지 않고 조선을 '한반도'라고 부르는 거나 마찬가지다.

위 각주에서 언급된 소설에서의 구분 문제나 당대 역사가의 서술이 아니라 후대에서 역사학적으로 촉한을 촉으로 부른다면, 촉한이란 나라가 파촉 지방에 위치한 괴뢰정부에 불과하다는 조위종통론을 따르는 비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촉한은 국가의 구성 요건을 갖춘 엄연한 국가였는데 굳이 공식 국호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이는 '촉한 정통론'과 상관없다. 촉한이 한나라를 이은 정통왕조가 아니라고 보는 측에서는 촉한에 대해 '유비가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상관없는 한나라'라고 하면 그만이다. 어느 나라가 정통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호는 그냥 그 나라 이름이다.[16]

촉한정통론에 기반한 명칭은 촉한이 아닌 계한(季漢)이다. 계한이라는 명칭 자체가 전한,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나라라는 의미로, 한 황실을 계승하는 나라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17] 반면 촉한은 촉한 정통론과 상관없이 단순히 이 시대에 존재했던 한나라를 국호 그대로 부르면서 역사학적으로 (다른 한나라들과 헷갈리므로) 쉬운 구분을 위해 지방 이름을 붙혀 촉한이라고 부르는 중립적인 이름이다.[18]


5. 특성[편집]


이 시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진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내/외부적인 모순들이 수백년간 (상당수는 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한 결과였다.

- 호족 소유 토지의 증가에 따른 자작농 계급의 붕괴와 빈부 격차의 확대
- 일부 명문 호족들의 관직 나눠먹기로 인한 국가 기능의 저하
- 왕망 이후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 및 윤리 수준의 저하
- 소빙하기 도래로 인한 토지 생산력의 감소
- 국가 역량을 넘어선 영토 확대로 인한 국방비 지출의 증가 및 국경 병력의 이민족화/사병화
- 유능한 군주의 부재 및 환관 세력의 득세

이릉대전과 같은 대참사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열세였던 촉한과 동오가 힘을 합해 강대국 조위를 견제하는 1강 2약의 구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나라는 후한말 득세한 군벌의 대부분을 제거하고 중원을 장악한 나라였다. 이 당시 중원이란 중국 문명이 탄생한 황하 유역을 일컫는 표현이었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실질적인 면적으로는 약 1/3 수준에 불과했으나 당시 중국 인구와 총 생산력에서 약 7~8할을 차지했다.

반면에 동오의 경우에는 이러한 난세를 피해 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이 덜 된 남중국 지방의 토착 세력들과 타협하면서 세운 나라였다. 때문에 영토 면적은 중원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주요 거점 부근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되지 않아 사람이 살기 어려웠고,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이민족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까닭에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오나라에서도 남반부 지역은 한무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월, 민월, 남월 같은 이민족 국가들이 지배했고,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다. 남월은 국왕이 한족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위만조선과 비슷하게 중국계 유이민과 현지 세력간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고, 민월과 동월은 한나라의 책봉을 받기는 했지만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원과 크게 달랐다.

촉한의 경우, 사천 자체는 통일제국인 진나라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관리되며 개발된 땅이었고, 토착 호족들도 유비 이전 통치하던 유언이 대부분 밟아놓았던 상태라 비교적 중앙 집권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운남 지역은 남만과 같은 이민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사천의 힘만으로 중원의 조위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간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1) 중원이 전란에 빠지면서 인구와 생산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저하되었고,
(2) 촉한, 동오 두 나라의 주도하에 변방의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3) 이 두 나라가 기본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4) 조위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동시에 제압하기에는 전선이 넓을뿐더러, 흉노, 선비족, 강족저족, 고구려 등 여타 이민족 세력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5) 위나라 자체도 건국 과정에서의 한계로 인해 지방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사람도 많이 죽고, 유랑민도 대폭 증가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삼국지연의》만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간 막장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거의 5,000만명에 육박하던 후한 시절의 인구가 고작 수십 년 만에 767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저렇게 죽었다기보다는 호적 유실 등의 원인이 크고, 실제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만한 인구 손실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서기 2세기의 중국 인구는 본토만 5~6,000만 명을 육박했고, 3세기 삼국시대에도 4~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별거 아니었네'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호적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것은 국가 행정 체계가 대책없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인구가 더이상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인구
4,432,000명

인구
940,000명

인구
2,300,000명

일단 등록된 인구는 이렇지만 이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 혼란기였기에 유랑민이나 지방 호족에게 위탁한 소작농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조세를 확실하게 거두고 개인 경제력 유지가 가능한 인구, 그중에서도 노동력이 되는 성인 남자와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호구 위주로만 등록을 했기 때문에 저런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767만명이 갑자기 1,600만명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숫자도 실제 인구보다는 크게 적었을 것이다.[19]

고대에는 폭정, 기아, 전염병, 전쟁이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 계속 증가하려는 인구가 그나마 계속 죽어줘서 수백 년간 인구가 큰 증가없이 정체가 지속되곤 했다. 다른 시대에도 널린 것을 삼국시대에만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게 그 이전의 난세였던 진나라의 6국 통일전쟁부터 초한전쟁, 한 고제까지의 시기, 신나라의 실정과 후한 교체기에 벌어진 군웅할거 시기에도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일 뿐이다.

국가 자체는 그나마 온전한 듯이 보여도 폭정이나 심지어 자연 조건에 따라서도 인구 변동은 있어왔다. 뭐 진정한 중국사의 헬게이트인 송•원 교체기에 비하면 그저 그렇지만. 1200년대의 중국 인구가 1억 1,500만 명에서 1300~1400년대 7,500만~8,500만 명으로 급락하고, 15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따라잡는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할 조건은 모두 갖추어 중국의 경쟁력을 폭락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금나라 5,000만명, 송나라 6,000만명의 1억 1,000만명인 중국 인구가, 몽골의 침입을 거치고 원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강북, 강남까지 다 합쳐도 7~8,000만명이 되어버렸다.

물론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전쟁, 기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실제 인구는 최소 배 이상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한말 6,000만명에 육박했던 인구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등록상이라고는 해도 767만명으로 급감한 것이다. 《삼국지연의》 덕분에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에 대하여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나라의 6국 통일 전쟁부터 초한전쟁까지의 시기와 신나라부터 후한으로 이어지는 군웅 할거의 붕괴 후 혼란기 여러 시기가 그랬던 것처럼 엄청나게 살기 어려웠던 시대였으며, 군웅이든 무장이든 모사든 호족이든 백성이든 모두 살아남기 바빴던 시대였다.

단, 난세라면 언제나 그렇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업적도 많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후한 시대라면 절대 출세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단 삼국의 창업주들만 보더라도 난세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명성을 남기기 어려운 출신들이다. 더불어 후한 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 개혁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이 시대의 둔전제는 후대 왕조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참고 사례가 되어 남았다. 유학 일색이었던 중국 사상에 법가 및 도가에 대한 재고찰이 이루어진 것도 중세 중국 문화가 풍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6. 정치·사회[편집]


한말 삼국의 전란기를 거치며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지방 자작농이 전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서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비대해진 관료제와 유교의 사상 독재하에서 세력을 키워온 호족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시대에 호족을 무시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군벌은 '아무도' 없었다고 봐도 좋다. 과장 좀 보태면 '호족의 시대'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시기였다. 이 당시 호족들은 중국의 유일한 지식인 계층으로 극히 일부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중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여론을 좌우했으며, 중국의 대부분을 사유하고 있는 지주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사실상 주거니 받거니 하며 관직을 대대로 독점하였다. 개중에는 이런 호족을 무시하고 뭔가를 해보려는 군벌들도 있었지만[20]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각종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숱한 무장이나 참모들은 작품 속에서 조조, 유비, 손씨 집안이나 기타 군벌들의 가신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역 호족이었다.

삼국의 군주 중 가장 호족들에게 엄격했던 조조조차 기본적으로는 연주 지역의 호족들과의 연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예를 들면 조조의 1급 참모로 알려진 순욱이나 순유를 배출한 순씨 가문 자체가 영천의 호족 가문이었으며, 뒷날 위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서진 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하내의 호족이었다. 실제로는 긴장 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삼국의 군주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해 호족연합체를 넘어서는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셋 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위나라에서는 호족들 가운데 문벌이 높은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장악하여 호족을 뛰어넘는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가 형성된다. 이것이 중국사에서의 문벌귀족의 시작이다.

오나라에서는 강남이라는 미개척지 특유의 성격으로 호족들이 강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호족연합체' 적인 정권이 형성되었으며, 오의 군주인 손씨 가문도 사실상 강동 지역 호족이자 그 연합체의 맹주와 같은 위치였다. 오나라 계통 호족은 오나라의 붕괴 이후에도 서진에 등용되면서 귀족적인 지위를 유지한다.

촉한에서는 영토가 작고 옛 한나라의 계승을 표방하여 한의 문물을 갖추려 했던 덕분에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호족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을 통일했던 것은 호족에 의해 세워진 친 호족국가, 서진이었다. 삼국이 서진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이 모두 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이 호족 세력들이 자기 나라를 내팽개치고 사마씨의 서진의 패권을 인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21]

이는 다시 말하자면 후한을 멸망시킨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고, 결국 호족들이 모여서 '우리끼리 다 해먹으며 천년만년 누려보자'며 세운 서진은 중국 역대 통일왕조 중에서 반면교사의 사례를 남기며, 중국은 장장 400여 년간에 걸쳐 남북으로 갈린 기나긴 분열시대를 겪게 된다.

다만, 고도의 중앙집권을 당연시하는 후대인의 시점에서 호족의 득세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여겨지기 쉬운 것과는 달리, 한나라 당대의 사회 구조 및 기술, 행정 수준에서 호족의 탄생 자체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교육 자체가 특권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해 줄 산업의 발달이 미비했던 전근대 사회에서 지방 지주 계급인 호족이 곧 지식인 계급이 되는 현상, 즉 호족=사대부인 현상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족의 존재가 반드시 한나라에 악영향을 끼쳤던 것도 아니다. 한나라의 보편적인 관료 등용 시스템인 향거리선제는 곧 지방의 유력자(호족)들이 자기들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중앙정부에 천거해 올리는 제도였다. 그리고 한나라의 중앙정부(조정)는 이를 통해 당시 최대의(사실상 유일한) 지식인 집단이었던 호족중에서 어느 정도 선별된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교통, 통신, 행정기술의 한계 속에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22]. 물론 현대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소수 호족들이 자기들끼리 주거니받거니 추천하며 관직을 나눠먹는' 향거리선제(와 이후의 구품관인법)는 불공정하고 부패한 제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춘추전국시대~한나라 초기까지 대부분의 관직과 관품이 세습되고, 극히 예외적으로 군주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인물을 종종 발탁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에 비하면 개방성과 공정성이 크게 향상된 나름의 발전이었다고 볼 만 하다.

결국, 호족 자체는 처음부터 한나라를 좀먹는 암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나라의 시스템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거대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둥 역할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후한 후기 너무 어리거나 무능한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면서[23] 이전까지 거의 300년간 한나라를 유지해왔던 이 시스템이 완전히 균형을 잃고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본래 막강한 황제권 아래서 황제의 친위세력인 외척/환관이 서로 견제하고, 또 이들을 실무진인 호족=사대부가 견제하는 균형 위에서 성립되어 있던 것이 한나라의 시스템인데 황제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황제가 100년간 나오지 않으면서 이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환관의 권력이 터무니없이 거대하게 성장하여 제위 계승까지 좌지우지 할 정도가 되니[24] 본래대로라면 환관 세력을 견제해야 할 외척 세력들마저 환관 세력에 억눌리게 되고, 이러한 환관 세력을 그나마 견제하려 시도했던 호족=사대부 세력마저 당고의 금으로 철저하게 탄압당하면서 환관 세력이 완전히 권력을 독점하고 절대권력이 된 만큼 절대적으로 부패하여 전횡을 일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혼란한 시대상에 의해 벌어진 사태가 바로 황건적의 난이고, 황건적의 난이 순식간에 후한 13주 중 8주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급성장한 것 역시 (후한 체제에 대한 기대를 버린) 일부 호족의 지원과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애초에 한나라 시기에 호족=지역 지주란 곧 해당 지역의 유력자이자 세력가였다.) 게다가 당시 한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전횡하던 환관 세력(대표적으로 십상시)들은 그 탁월한 정권 장악 능력 및 부정부패 능력에 비하면 참혹할 정도로 실무 능력이 부족했고, 호족=사대부=사인 세력이 탄압의 대상이 되면서 대규모 민란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실무진의 공급 역시 끊긴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황건적의 난은 어찌저찌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호족=사대부 세력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전국을 휩쓰는 대규모 반란을 진압할만한 대규모 군사력을 확보하고 운용할 능력이 없었던 환관 세력으로써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역에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이 군대를 편성하는 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5]. 말하자면 이들 호족은 황건적을 지지한 반 한나라계 호족들에 비해 한나라 충성파 호족들이라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환관 세력에 우호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당고의 금 이후 오랜 탄압으로 호족=사대부 세력에서는 반 환관 세력인 청류파의 영향력이 커져있었던 것이다. 이들 청류파 호족=사대부들은 당연히 군사력까지 갖게 된 이상(그리고 환관이 장악한 조정의 군사력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환관 세력을 숙청하고 그동안의 탄압에 대해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었다[26].

그 이후, 그나마 청류파 호족들의 젊은 지도자인 원소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환관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 버릴 의도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던 하진[27]십상시들의 화려한 자살골로 암살당하고, 이에 그나마 폭주를 막던 안전판이었던 하진의 죽음으로 완전히 폭발한 청류파 호족들의 군사력에 의해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은 철저히 몰살당하여 환관 세력은 일단 한나라의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하지만 이 혼란기를 틈타 동탁이 중앙으로 진입하고, 원소를 위시한 청류파 호족들이 이번에는 동탁과 맞서다가(관동 연합군) 그나마 한나라의 체제를 복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기회였을 수 있는 왕윤의 시도가 최종적으로 실패하여 삼보의 난을 겪은 끝에 각지의 호족들이 한나라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군벌들의 세력기반이 되는 군웅할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당시의 군벌치고 호족들을 무시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군벌이 아닌 한나라 중앙 조정조차도 호족들을 무시하고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지의 호족은 곧 해당 지역의 유력자였고, 시대적 한계속에서 한 지방을 통제하는 방법은 곧 그 지방을 장악한 호족들의 지지와 협력을 받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다만 한나라의 경우 수백년에 걸쳐 축적되어온 황실의 권위+향거리선제를 비롯하여 나름 안정적으로 정착된 시스템의 힘으로 호족들의 세력에 대해 명확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그런 권위가 없는 군벌들로는 나름의 긴장과 알력을 겪으면서도 호족들의 협력을 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 호족과 군벌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은 문학작품인 《삼국지》 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삼국지의 수많은 군웅들(유비, 조조, 손씨 삼부자, 원소, 원술, 동탁, 여포, 도겸, 유표, 유장 등)과 호족 간의 관계, 군사적 재능은 어쨌건 정치력은 훌륭했던 유표 생전에는 형주의 호족인 채씨나 괴씨 등과 긴밀히 협력하여 형주를 통치할 수 있었지만, 그 유표가 죽은 이후에는 채씨로 대표되는 형주의 호족들이 앞장서서 조조에게 항복한 것이다. 또한 그 직후, 조조가 강동 원정을 시작하자 손권이 동원한 병력이 고작 2~3만명에 불과했다.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오나라의 병력이 23만명이니 작정하고 모으면 10만명은 모을 수 있어야 정상인 강동에서 동원한 병력이 고작 신야를 가지고 있던 유비+강하태수 유기가 동원한 2만명과 비슷한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호족들이 손권에게 제대로 협력하지 않아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당대 군벌들에게 있어 호족들이란 '상대가 협력해주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어 곤란한' 상대였다. 물론 유표나 조조처럼 믿음직한(또는 무서운) 인물이나 뛰어난 수완을 가진 인물이라면 호족들의 협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지만, 유종이나 손권처럼 막 군벌의 자리를 물려받아 아직 호족들의 신뢰를 확보하거나 기세를 꺾어 제압하지 못한 '애송이'들은 병력조차 제대로 동원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손권처럼 무서운 애송이라면 "저 애송이 보통은 아닌데, 자기가 조조를 막겠다고 하니 정말 할 수 있나 한번 보자구? 해 내면 우리 두목으로 인정해줘도 좋지?" 정도의 반응이었고, 정말 조조를 막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후 강동 호족들을 자신의 지배력 아래 잡아넣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종처럼 안 무서운 애송이면 "너 하나만 넘겨주면 어차피 조조는 형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기득권을 인정해 줄 텐데, 왜 우리가 널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냐?"고 그냥 항복하자고 밀어붙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로 중앙정부 출신으로 조정의 관직을 받아 권위를 가졌던 군벌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해당 지역의 호족들로부터 협력을 구할 수 밖에 없었고, 공손찬이나 여포처럼 이런 협력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군벌들은 폭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개인의 기량이든 정치적 권위든 군사력이든 뭔가 강력한 힘을 가진 군벌들을 상대로 호족들 역시 함부로 저항할 수는 없었지만, 호족 다수가 작정하고 불성실하게 굴기라도 하면 군벌들로서도 일일히 때려잡을 수도 없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삼국 정립 후 삼국 모두 호족들을 제압하여 중앙집권을 구축하려 시도했다는 것 역시, 당대의 기술적 한계상 호족 없이 각 지역을 직접 장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나라 시절처럼 호족들을 조정의 권위 아래 묶어놓기라도 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의 결말은 결국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재통일하는 것이었고, 애초부터 호족 출신으로 위나라의 조씨보다 더 억지스러운 찬탈로 제위를 차지하여 권위가 약할 수 밖에 없었던 사마씨는 그나마 호족들을 제어해 보려는 시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결국 당나라 말기까지 왕조는 망해도 귀족 가문은 변하지 않고, 황실마저도 황제가 우겨야 최고 등급 성씨로 끼워준다는 문벌귀족의 전성기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이후의 역사적 흐름을 볼 때, 한나라 말기 호족의 발호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환관이나 외척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 정도는 시대적 한계상 그 탄생이 불가피했던 면이 있고, 필요악적인 측면, 또는 시스템이 건전하던 상태에서는 나름 긍적정인 측면도 있던 것이 한나라의 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정치적 괴물로 재탄생했음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관제적인 면에서는 삼국시대의 지명, 행정구역과 관직은 기본적으로 후한과 같다. 다만 난세이므로 군벌들이 임의로 각종 임시직을 설치하거나, 기존 관직의 권위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혼란이 많은 편이다. 자세한 것은 삼국지/지명삼국지/관직 참조


7. 경제[편집]


후한의 멸망으로 농업이 붕괴 상태에 놓였으며, 화폐경제가 몰락했다. 후한 조정이 붕괴한 탓에 대량의 사사로이 만든 돈이 출현했다. 위, 촉한, 오 세 나라가 정립된 뒤에 새로 발행된 동전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지 못하여 포, 비단, 곡식, 등 실물을 주요 화폐로 부득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 나라 모두 동전을 발행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경제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랬으나, 황건난~동탁의 난정 이후부터 국가가 아닌 호족들이 사사로이 만든 돈 때문에 국가가 만든 화폐 역시 이에 맞물려 가치와 신용이 떨어졌다. 때문에 민중들은 물물교환을 통한 경제활동이 더 가치있고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각국의 화폐제도는 화폐로 값을 치루는 데 미치지 못해서 물물교환이 다수로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제 1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삼국이 발행한 돈은 모두 다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그나마 나았다는 촉한의 경우도 촉의 화폐가 본국외 강남 일부 지역, 농서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한계점을 가진다.

다만 촉한의 경내(境內)에서 이루어진 무역은 화폐가 통용되는 무역으로, 이 시대에는 특수한 한 종류의 정도에 이르렀다. 촉한 화폐의 유통은 교환 경제가 활성화되어 장기화된 중원보다 우수했다. 촉한의 수도 성도는 상업적으로 또한 번영하였고 서진의 좌사는 성도의 (번영한) 상업을 묘사하였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으며,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28]

또한 촉한의 비단은 오나라와 위나라에 팔리며 유명세를 떨쳤고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에서도 촉한의 멸망 당시 창고에 있던 금, 기, 채, 견 80만 필 중 금(錦), 기(綺)를 유명하고 진귀하며 기술요구도가 극히 높은 견직물로 인정하며, 이것을 능히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음이 촉한 수공업의 창성과 발달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북 지방 쇠퇴의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시대였다. 삼국시대 이후엔 인구 급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민호의 도주와 관개시설 및 농경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등의 이유로 버려진 농경지가 대량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하 중상류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하였고 삼국시대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로 인해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

중원의 경우 역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전란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조조가 패권을 구축하면서부터 회복의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토지 개혁과 전후 재건에서 다른 군벌들을 크게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지만, 조조가 대단했던 점은 이를 전국 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추진한 조직력과 추진력이었다. 실제 기존의 둔전제는 일부 국경지대에 한해 한시적으로 실행된 제도였으으로 조조와는 규모/기간에서 비교가 안된다.

촉한과 동오는 세력 확대를 위해 각각 운남과 강남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특히 오나라의 강남 개발의 경우 한족이 본격적으로 장강 이남 개발에 착수한 시초로서 중국 경제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당대에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오나라가 이때 잡아놓은 기틀에 영가의 난 이후 북쪽에서 몰려든 우수한 농업기술을 가진 서진의 유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남조 시대 경제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건 빨라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였고, 당•송 무렵에야 절정에 이른다. 이후 송나라 시대 즈음에 이르면 강남이 대체적으로 개발되어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절정에 이르름으로써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압도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각지에 명맥을 유지하던 소수민족들, 즉 무릉만산월이 완전히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중국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영토를 한족이 사실상 독점하기 시작한 시대가 삼국시대인 것이다.


8. 문화[편집]


이 무렵의 중국은 좌식(座式) 생활을 했다.[29] 즉, 마룻바닥이나 평상에 돗자리나 깔개를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지냈다.[30] 물론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그냥 흙바닥에 돗자리 하나 덜렁 깔고 지내는거고.그래서 누구처럼 돗자리 장사하면 굶지는 않았다

삼국시대에는 비록 주류는 아니긴 했지만 한나라 시대에 이미 흔했던 유제품 관련 식문화가 아직 건재해있었다. 조조의 일합수(一合酥) 일화로 유명한 타락죽 간식도 유제품이었다. 사치품이었는지 천하통일 이후 육기형제가 서진의 부자 왕개의 초대를 받았는데 왕개가 양락(羊酪:양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가르키며 동오에도 이와 비교될 음식이 있냐고 물어봤다. 유제품 관련 식문화는 이후 유목 민족의 발호가 계속된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고 개간으로 인한 목초지의 상대적 감소 등의 이유로 북송 무렵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춘다.

참고로 이 시대에는 이름이 대부분 외자 이름이었다. 이름이 모두 한 글자고 두 글자 이름이 없다는 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고 곳곳에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 이래로 두 글자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은 죄인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아다니지만 이건 '혹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림잡아 내놓은 가설일 뿐이다. 후한 시대의 이름이 실제 대부분 외자이기 때문에 두 자 이름이 없다는 설은 상당히 예전부터 있었지만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盧弼)은 후한 시대에 두 글자 이름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건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일제, 곽유지, 장춘화, 왕원희 등 두 글자 이름이 제법 있다. 다만 남성보다는 여성 중에서 두 글자 이름이 더 흔하게 보인다.

상기한 것처럼 전한 한무제 이래 유교가 독점하던 지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법가, 문화적으로는 도가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도교의 경우 이 시대에 사실상 제2의 탄생을 맞이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후한 때 전래되어 남북조시대에 번성하게 되는 불교가 점차 뿌리를 내려가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9. 언어[편집]


삼국시대의 언어는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이긴 하였으나 상고한어의 말기 발전 형태인 후한한어(Eastern Han Chinese)를 거쳐 상고한어에서 위진남북조 초기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언어학자들이 추정한 삼국지 인물들의 실제 중국어 발음을 알아보자.


10. 군사[편집]


향촌 사회의 붕괴와 함께 후한의 모병제도 붕괴했다. 군사 제도는 둔전과 결합된 세병제로 변화했다. 본디 후한은 대대적인 군축을 시행했으므로 변경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군사 인프라가 약해져있었다. 그러나 180년대 이후 전란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군역과 군사조직이 생겨났다. 이 군사적 변화점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뽑자면, 일반 백성층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대를 이어 군역을 세습하며 호족들에 의존하는 군사 계급의 형성, 비-한족계 오랑캐 기병에 대한 급격한 의존, 각 지방의 토착호족들과 군사령관들에게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는 군 지휘체계의 시작과 확립이 있다.

전란이 장기화됨에 따라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전문병사 계층 양성에 호의적 여론이 일어났고, 이들은 자신의 주군(군벌)들이 임지를 이동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전쟁의 운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초창기 한나라 군역제도를 가동시켰던 안정적 행정시스템은 후한시대 모병제로 대체되었고 후한말의 혼란으로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혼란상이 가득해던 당시 시대상 덕에, 군대에 투신할 보충병의 수가 모자랄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매우 많은 숫자의 절박한 농민들, 유랑자들, 난민들이 군에 입대했다. 이 시대의 대규모 군대는 약소 군주와 그 추종자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군주의 종류엔, 자신을 따르는 농민들을 병사로 전환한 토착 거물, 그리고 관군이라기 보단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개인 사병 집단을 양성한 군사령관들이 있었다. 이 두 형태의 군주를 따르던 사병 집단을 부곡(部曲)이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하에서 세워진 삼국은 재통일을 위해 군사 인프라 확충에 힘썼다.

후한 시대에는 화폐의 보급과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기존의 비용이 많이 들던 국가적 보급 시스템을 폐기하고, 세금의 전납화 / 대대적인 민영화로 효율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 반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일시에 상업망이 무너지면서 기존의 보급 시스템이 아예 남아나지 않는 결과가 되었고, 평화시기에 전투용으로 준비해둔 저축이 존재하지 않으니, 딱히 털어먹을 것도 없고 결국 둔전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축적량이 없어서 "잠깐 농사 좀 해서 군량 모으고 싸우자." 이걸 반복해야 하니 당연히 내전이 지지부진 장기화 될 수 밖에 없었다.

미개척지 천국이라 중앙집권은 커녕 각 지역 한족 토호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통치가 불가능했던 동오는 세병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각 지역 토호들의 사병에 의존하는 세습령병제로 나아갔다. 병호제[31] 아래서 일반 편호(남녀구)와 병사(兵)을 구분함은 물론 관리(吏)의 명부도 따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촉한의 경우, 유비가 입촉한 이후 군사력의 주력은 보병이었고, 기병이 그 다음이었다. 남중은 예로부터 의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에 남중을 평정하고 나선 기병 전력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의 대규모 기병대와 맞설 전력까진 아닌 환경이라 팔진도 등 보병 병법의 발전으로 이를 파훼하려고 노력했다. 촉한은 소수민족 부대도 편성했는데 종병(賨兵), 수병(叟兵), 청강병(青羌兵) 등 촉한 경내의 종족, 수족, 강족 등을 편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대는 왕평이 운영했던 남중 출신 정예부대인 무당비군(無當飛軍) 오부(五部)일 것이다.

촉한은 일반 편호(남녀구) 이외 군사(兵), 관리(吏)를 따로 기록하였는데, 중국 현대사학자 백수이(白寿彝, 1909~2000)의 《중국통사》(中国通史)[32]에서는 촉한의 <사민부>에 나오는 대갑장사(帶甲將士)를 세병제(병호제,사가제)를 전제로 한 병적상의 수치가 아니라 당시 상비병의 숫자로 간주하고, 촉한에서는 세병제(병호제,사가제)가 아닌 한나라 때의 징병제가 그대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 특히 촉한은 진•한시대에 비해 병사들에게 보급할 방호구, 병장기류와 운송수단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제갈량과 촉한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은 야금술을 발전시켜 튼튼한 갑옷투구, 신도(神刀)라 불리는 갑옷과 투구를 가를 정도의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제갈량은 '원융노'라고 불리는 십시연노를 개발했다. 이는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인, 한 번에 10발씩 쏘는,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기관총 같은 무기였다. 또한 《삼국지》 <촉지>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군사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그 운용은 반드시 연노와 배합되었다고 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부릉의 힘좋은 병사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고 한다. 제갈량이 보급의 편리를 위해 운송용 수레 목우유마를 개발한 것도 유명하다.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군은 '대오가 질서정연하고 상벌이 엄숙하고 밝았다'라고 한다. 이런 엄격한 군기와 고양된 사기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며,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훈련의 결과였다. 또한 촉한군은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무예를 강습하며 뒷날을 도모하니, 병사들은 간결하게 정련되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촉군을 정예군으로 육성했다.

위나라는 기존 세병제의 틀에서 선비족 등 이민족 전력 영입에 반란군 유입분자나 유민들을 잡아다가 둔전을 시키고 부곡을 기반으로 한 사병집단의 영향을 굉장히 다대하게 받아들였다. 병사와 그 가족들은 군호(병호)(軍戶:兵戶))라는 특수한 지위를 얻었다. 군호 집단은 다른 일반민이나 농민층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군호에 속한 사람의 명단은 특별한 군문서에 기록되었고, 지역 민간행정관보다는 군당국의 통제를 받았다. 일단 어느 사람이 병사가 된다면, 그는 평생에 걸쳐 군복무를 수행해야 했다. 해당 병사가 전사하거나 군무를 수행하기에 너무 노쇠/병약해질 경우, 그의 아들이나 혹은 가까운 친척이 그를 대신해야 했다. 위나라의 병사와 그 가족들은 오직 같은 군호 지위를 가진 사람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다른 집단과의 결혼은 군역에 종사할 인력층을 감소시킨다고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서진 왕조는 위나라 군주들이 시행한 이 가혹한 정책을 일정부분 완화시켰지만, 기본적인 제도는 그대로 유지시켰고, 병력의 대부분을 여전히 이 제도를 통해 충당했다.

이렇듯 세 나라 각각 자기들의 특색이 두드러졌다. 전란의 시대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군벌의 난립 등의 이유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이는 훗날 서진의 중국 통일 이후 일어난 팔왕의 난영가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족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알더스 고원의 통제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 통일 이후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그 대가를 치룬다. 물론 영가의 난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일어난 건 결코 아니지만.


11. 역사학에서의 비중[편집]


의외로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서 중국 역사학적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다. 이에 대해 《하버드 중국사-남북조 분열기의 중국》의 서문에서는 '중국인은 중국이 통일되고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시대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한제국이 종교 반란 집단과 지역 군벌의 손에 무너진 이후의 400년 역사는 소홀하게 다루어진다.' 라고 설명하며 삼국시대부터 수, 당 이전까지 시대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해석했다. 간단히 말해서 중국이 통일되어서 주변국에 힘 쓰던 중화제국의 시대를 중국인 역사학자들이 더 선호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은 삼국시대에 크게 주목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것이, 중국의 분열-혼란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 시대초반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시대라는 두 통일시기를 나누는 위진남북조시대의 분열기는 무려 370년에 이르고[33], 이를 다시 세분하면 <(프롤로그격인 후한 말기) - 삼국시대 - 서진시대 - 오호십육국/동진시대(또는 육조시대) - 남북조시대>로 나뉘게 된다. 즉 중국사 교과서를 만든다면 위진남북조의 분열기라는 대단원에 속한 하나의 소단원을 차지할 정도의 비중인 것. 물론 이 시대에 역사적 중요성이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34]. 하지만 삼국시대가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가지고 있는 시대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대중적 관심에 비하면 역사학적인 주목은 별로 받지 못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삼국시대가 누리는 대중적 인기의 대부분은 역사적 비중에 의한 사학적 중요성이 아니라 《삼국지연의》(와 그로부터 파생된 무수한 작품들)에 기반한 문학적, 문화적 존재감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삼국시대가 역사상의 다른 시대와 비슷한 정도의 관심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조조, 사마염 정도나 알면 다행이고, 여기에 유비와 손권까지 알고 있다면 그 시대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 제갈량, 진군까지 알면 슬슬 역사 매니아의 초입에는 접어든 수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 원소나 원술, 유표같은 군웅들, 또는 관우나 장료, 육손같은 주요 군 지휘관까지 알게 되면 그건 누가 봐도 역사 매니아고, 간손미나 방통, 서서...이런 인물들의 행적까지 알 정도면 헤비한 변태 역사 매니아이거나 전문 연구자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라는 대중적 문학작품에서 역사 교과서라면 잘해야 한 단원, 어지간하면 한 페이지나 심하면 몇 줄로 퉁치고 넘어갈 분량을 십여권에 이르는 장대한 대서사시로 펼쳐놓은 덕분에 다른 시대 같으면 '많은 문무신하들'중 하나에 불과했을 인물들에게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일일히 쏟아지게 된 것이다. 일부 《삼국지》 팬덤들이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일부' 라는 해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중국의 역사적 흐름에서 삼국시대가 가지는 비중은 무수한 《삼국지》 독자들이 가지는 큰 관심과 애정에 비하면 사소하기에 '《삼국지》 독자들의 기대에 비하면' 삼국시대는 별다른 역사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당장 고등학교 세계사 책과 수능특강을 펴봐도 이 부분에서 위나라의 구품중정제서진이 통일했다라는 내용만 쓰여있고, 바로 5호 16국과 남북조시대로 넘어가는 아주 적은 삼국시대 분량 때문에 고딩 《삼국지》 팬덤들이 처음에 당황한다.

이유는 일단 이 분열 시기가 그리 길지 않고 5호 16국시대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시작점으로서 다뤄지거나 후한 말부터 축적되어 서진 시대에 터진 각종 사회 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정도다.[35]

도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태평도오두미도가 나타나면서, 기존의 도가 철학이 도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변화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두미도의 경우에는 한중군에서 하나의 정치체제를 수립하기도 했다.[36]


12.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편집]


워낙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역사와 《삼국지연의》를 혼동해 역사를 판타지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서 쓴 소설이다. 역사 《삼국지》는 따로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만 세세한 내용에서는 영웅쟁패를 다루어 극의 재미를 위해 내용을 변개하거나, 촉한을 정통성을 가진 왕조로 간주한 '촉한 정통론'적인 시각이 많다. 따라서 실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정사 삼국지》 등 관련 역사서를 읽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연의》는 군담소설이고, 삼국시대의 각종야사와 민담이 종합된 소설인 만큼 당시의 시대적 배경 및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쓰인 자료들은 출처 등의 기반을 아무래도 역사를 잘 알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도 꽤 많이 다르다. 대충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이비 군사학(?)[37]과 진짜 군사학이 아주 많은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한 한계점 때문에 문관의 경우, 정치적 리더십과 비전, 행정적 업적은 거의 묻어 버리다시피 하고 오로지 현란한 권모술수 위주로 다룬다. 조조가 패권을 잡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둔전제에 대해서도 '유랑민을 모아서 농사를 시켰다 - 끝 - ' 수준의 설명에 그친다. 또한 행정가로서 큰 공을 세운 유복, 양습, 한호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엑스트라 1 수준의 대접만 해줄 뿐이다. 지못미.

무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극적 재미'를 위해 장수들의 개인적 무용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며 통솔력이나 전술적 재능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빈약하다. 사실 나관중이 복잡다기한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작중 묘사를 하기 어렵겠는가? 덕분에 《삼국지연의》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혼자서 수천 명을 상대하는 초능력자들의 능력자 배틀물이 되어 버렸다. 팔문금쇄진 같은 진법 묘사가 깔짝 나오긴 하지만 그나마도 털리는 역할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맹신해 '중국 군대는 우루루 모였다 우루루 흩어지는 오합지졸'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당연한 일이지만 수천, 수만 명의 병사들이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며 벌이는 전쟁이 그렇게 대장전 한판에 승부가 결정났을 리 만무하다.

다만 전쟁론 등을 참고하면 적의 핵심 지휘관들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하면 사기 등이 바닥나 패주할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적의 힘과 전투력이 얼마나 되는지 등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괴멸되거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요 도시나 지역이 따이거나 하면 그 충격이 엄청났다. 중심지들만 점령해도 알아서 항복하거나 결과적으로 복종하거나 한 경우들이 많다 단적으로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음에도 이미 졌다고 생각해서 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심지어 나폴레옹 역시 사기빨이 있긴 했다. 프로이센군처럼 질적으로 우수한 군인들을 보유한 나라와의 전쟁에서는 프랑스군보다 적들이 우세하거나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다가도 민족주의로 무장한 프랑스군과 달리 적들의 사기가 먼저 떨어져서 도망가다 프랑스군에 개발린 전투들도 있었다. 사실 과거의 전문적인 무사들이나 유목민들 같은 전투적 부족 역시 사기가 일반적으로 농민 같은 애들보다는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강했던 점도 분명 있다 라고 하는데, 이는 전근대 냉병기 시대의 전장에서는 전장의 불확실성이 컸다는 의미일 뿐이지, 《삼국지연의》풍의 영웅쟁패 능력자배틀 서사에 현실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사례 역시 그 승리의 원인 중 일부가 민족주의적 의식에 기반한 높은 사기에 있다 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족주의 개념이 막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근세 말~근대 초의 일이고, 화기의 도입으로 '다수의 징병제 병력'이 철저히 정예화된 소수의 엘리트 전사집단을 압도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무엇보다도 당시 프랑스의 엄청난 군사적 위상을 가장 확실히 뒷받침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대육군'(Grande Armée)이었고, 민족주의적 사기의 의미는 이전 시대 소수 귀족과 직업적 군인들의 범위를 넘어 징병에 의한 대규모 육군의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다[38]. 애초에 중국 삼국시대의 상황과 비교할 이유가 없는 사례인 셈.
  • 조금 더 부가설명을 하자면 고대에는 실제로 (지배계층에 속하는) 지휘관들이 못 먹고 못 살던 병졸들보다 체격조건이 더 좋기도 했고, 지휘관을 잃은 군대가 속수무책으로 패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고려할 것이 있는데 1) 이러한 (소위 '일기토라 불리는) 지휘관들 사이에서 단기접전은 《정사 삼국지》를 통틀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매우 극소수였고 2) 이렇게 일기토가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이 우르르 후퇴하(면서 피해를 입)는 정도였지 전쟁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사에 기록된 관우와 안량의 일기토이다. 백마 전투 당시 원소의 선봉장 안량을 상대로 조조가 기습공격을 했고, 조조 측의 선봉장 중 하나였던 관우가 안량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말을 달려 병사들 사이에 있는 그를 찌르고 수급을 취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안량, 추가로 출격한 문추까지 사망한 이후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조가 이후 계속 밀렸다는 것'으로, 지휘관을 잃는다면 일시적으로 밀릴 수는 있겠지만 전쟁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정사에 기록된 관우의 '일기토' 장면은 이게 전부이며, 여포나 장비, 허저 같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장수들의 일기토 기록은 전무하다. 그만큼 실제로 지휘관들 사이에서 1대1로 합을 나누며 무력을 겨루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미 총력전 개념이 생겨났을 정도로 고대부터 이미 고도로 작전술의 개념이 발달한 나라였다. 물론 냉병기 시대였던 만큼 무장들의 개인적 무용은 전쟁의 중요한 요소였고, 실제로도 용맹을 떨친 맹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돌격대를 이끌고 선봉을 선다든지 성벽에 앞장서 먼저 오른다든지 하는 형태로 승리에 기여한 것이지 혼자 나가서 수만 명을 싹 베어버리다든지 적장과 1vs1 해서 진 쪽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조리 후퇴하는 횡스크롤 액션오락같은 것은 아니었다. 단, 정예병들이나 전력이 강한 병종들이 전략적 혹은 전술적으로 불리해도 오히려 무용으로 죄다 썰어버리는 경우가 역사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관우 제외냉병기가 상당히 유용했던 시대에는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면 전략적, 전술적, 장비에 의한 차이를 극복하기가 실제로 화기 시대보다 쉬웠다. 화기는 워낙 사기적인 무기들이 많아 개인적 능력이 별 의미없지만 실제로도 간단한 훈련만 받은 일반인들이 냉병기로 실력자들과 싸운다면 어지간한 신체적, 전략적, 전술적, 장비적 차이가 아닌 이상 질 확률이 더 높다.


13. 삼국시대가 인기 있는 이유[편집]


개중에는 삼국시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시대가 아닌데 《삼국지연의》가 워낙 널리 읽힌 덕분에 과대평가가 됐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오로지 《삼국지연의》 때문에 유명해진 시대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면 삼국시대는 《삼국지연의》가 집필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아서 왕 전설》이나 《샤를마뉴의 12기사》처럼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나관중이 《연의》에 끼워맞춘 가상의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돌고 있던 이야기들이었고, 나관중은 그걸 집대성해 소설로 쓴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삼국시대가 워낙 유명해서 《삼국지연의》가 대박을 쳤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39]

《삼국지연의》가 이처럼 사랑받은 것에 대해서는 한나라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실질적으로 통일을 완성한 최초의 중화제국 왕조이고, 중국 농경 문화의 기초적인 뼈대를 한나라 때 다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0] 한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는데 제도가 상당히 유용하게 잘 만들어졌다, 세계사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단기간만에 후세대 농경 왕조들조차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넘기 힘든 엄청난 영토와 인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아무래도 너무 단시일 만에 영토와 인구를 얻었다는 점에서 그 영토와 인구를 제대로 다 활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영토와 인구라면 아예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이 출현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걸로 봐서는 한나라[41]가 최소한의 의의가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나라가 몰락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군웅들[42]이 형태는 다를지언정 다시 한나라의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모토하에 싸운 역사가 사랑받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런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삼국시대 만큼 수많은 문사와 무장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사서 안에서 한껏 발산하고 있는 시대도 드물다. 고작 100여 년 남짓한[43] 기간을 역사서로 서술하자니 정치사보다는 인물들의 <열전> 중심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유명한 장군 너댓 정도나 알려지면 많은 수준인 다른 시대의 전쟁사에 비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의 행적을 인간관계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시대다. 배신과 무력의 화신 여포,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에 껄껄대는 조조, 어설프게 칭제했다가 알거지가 되어 죽어간 원술이나 4세 3공의 가문이라는 강점과 얼자라는 약점을 동시에 지닌 원소 등등 지도자급 군웅들만 해도 각양각색의 개성이 정사 안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그 가운데 죽어도 백성을 저버릴 수 없다 부르짖으며 돗자리 장수부터 시작하여 끝내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유비를 위시한 유관장 삼형제와, 제갈량이라는 촉한 지고의 충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공감과 지지를 얻었고, 심지어 '승리자'인 조위-사마진이 아닌 '패배자' 유비와 그의 사람들을 주인공이자 촉한을 중국사의 정통으로 바라보는 문학적 해석이 자생적으로 나타나 역사적 정통론에 영향을 끼쳐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지연의》의 저술은 물론 나관중의 광범위한 자료 수집능력과 근성, 문학적 재능이 큰 기여를 했지만, 그 이전에 그 수많은 인물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이미 마련됐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삼국지》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어 단순한 역사나 설화, 전설를 넘어 일종의 대체신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장 관우나 제갈량이 중국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받들여지는 모습만 봐도 쉬이 이해할 수 있다. 한나라, 한황실로 대표되는 하나의 천하라는 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군웅들이 천하통일을 목표로 치열하게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더더욱 강화되었고, 이 관념이 《삼국지(연의)》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됨으로써 동아시아 범중화문화권, 즉 한자문화권의 사상적 토대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다. 어찌 보면 작가 스스로 대체신화를 만들고자 목표했던 레젠다리움, 미국의 대체건국신화로 대접받는 스타워즈의 진정한 대선배라고도 할 수 있다.[44] 이는 중국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삼국시대만큼 인물 중심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없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45]

단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한족 민족주의적 서사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조의 정통성 개념에 영향을 받았는가 하면 맞지만 근데 그게 현대 민족적 개념이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고. 중화랑 가장 흡사한 게 로마 제국 계승 관념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집단에 열려 있다는게 핵심이다. 《삼국지연의》는 청나라 시대 금서였지만(판본에 상관없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널리 유통되었고, 단연 《모종강 평본》이 인기였다. 느슨한 금서였던 셈인데, 만약 '한흥반청' 의도가 있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면 청나라가 가만히 있었을까, 적어도 청나라 중기까지 책이 유통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14. 로마 제국과의 비교[편집]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세베루스 왕조군인황제시대였다. 비슷한 시기(260~274, 중국 삼국시대의 최후반과 같은 시기) 유럽의 로마 제국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군에 포로로 잡힌 후 군벌들이 난립하여 칭제를 하는 자칭 황제들만 20명이나 등장하는 등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 제국의 서쪽과 동쪽 양쪽에서 반란이 일어나 서부의 갈리아 제국, 중부의 로마 제국, 동부의 팔미라 제국 세 나라로 쪼개져 버려서 중국의 후한과 마찬가지로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것이 위나라가 국력에서 확실하게 우위에 있었던 중국과 달리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은 세 나라의 국력이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 재통일하는 게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변 이민족들에 비해 대체적으로 분명한 군사적 우세에 있었던 위, 촉, 오와는 달리 로마판 삼국은 사산조 페르시아게르만족들에게 심하게 압박받고 있던 상태라서 서로 싸움질하면 방어선이 붕괴되어 셋 다 죽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들하고만 싸웠으며,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다시 재통일 전쟁에 나서자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이 금세 항복해버려 로마판 삼국지는 20년도 안 되어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재통일한 로마도 결국 서진처럼 이민족들에 의해 제국의 반쪽이 망해버리고 나머지 반쪽으로 여명이 이어지게 된다.[46]


15. 한국사와의 관계[편집]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한국의 삼국시대와 비교가 되는데 이름이 같은 중국의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한국 삼국시대 안에 중국 삼국시대가 완전히 포함된다.

물론 다른 점이 많은 것이 위, 촉, 오 모두 건국된 지 50년이 안돼 망했고, 세 나라 모두 사마씨라는 제3자에 의해 멸망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최소 삼국이 정립되었을 때에는 세 나라 모두 이미 건국된 지 장장 500년이 넘어가던 시점이고, 1강 2약이던 중국의 삼국시대와 달리 1강 2중으로 세 나라의 힘이 엇비슷해 100년 동안 삼국이 대립하다가 일본이나 당나라까지 개입한 끝에 신라에 의해 통일된 점이 다르다. 사실 중국한국의 역사를 비교하려면 중국의 삼국시대는 한국의 후삼국시대, 한국의 삼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와 비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한국사에서는 이 시대의 책이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 부여, 고구려, 삼한, 동예, 옥저 등 당시 고대 한민족 국가들에 대한 기록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기록은 거의 전해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계가 일부 누락(차대왕, 고국천왕)되거나 사건의 기년이 불명확하게 기재가 되어 있는 등 문제점도 있는 편이다.

중국 삼국시대의[47] 직전이자 시작과 끝[48]의 시기로서 삼국사기 상 기년에 근거하면 중국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기간에 재위한 한국사 군주들은 아래와 같다. 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왕통, 특히 백제와 신라의 경우 후대의 왕사가 선대로 소급되었으므로 중국 삼국시대 초반부(황건적의 난~조위의 건국)의 백제/신라 군주들은 기년과 실제 활동 연대가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야 역시 왕통 계보가 자세히 전하진 않으나 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초기사 연대가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 주요 인물[편집]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된 인물만 추려도 수백명은 되겠지만, 일단은 이하의 인물들이 중국사와 주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만 넣도록 한다. 자세한 사항은 삼국지/인물 참조.

  • 정치
    • 장각 - 중국 최초의 종교에 입각한 반란인 황건적의 난의 주동자. 후한말 삼국시대의 시초.
    • 조조 - 삼국 중 위나라 건국 기틀 마련.
    • 조비 - 삼국 중 위나라 건국. 삼국시대 시작.
    • 유비 - 삼국 중 촉한 건국. 유비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조조가 천하를 통일했을 가능성이 크다.
    • 손권 - 삼국 중 오나라 건국. 강남 유역 개발.[49] 또한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공손연, 고구려와의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전부 실패하였다.
    • 제갈량 - 촉한의 명재상. 그가 없었다면 삼국시대가 훨씬 빨리 끝났거나 아예 막이 열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 진군 - 구품중정제[50] 제안.
    • 사마의 - 서진의 개국 토대 마련.
    • 사마염 - 서진 건국과 삼국 통일, 삼국시대 종결.

  • 종교
    • 장각, 장로 - 삼국시대 태평도오두미도의 교주. 둘 다 도교의 일파로 이후, 오두미도는 도교의 중요한 교파로 발전했다.
    • 관우 - 사후 도교에서 군신, 재물신 등으로 추앙.
    • 지겸, 강승회- 중국의 불교 보급 역사 중 초기 인물에 해당함.


  • 문화
    • 조조, 조비, 조식 - 부자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조조의 시는 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 건안칠자 - 조조, 조비, 조식 아래서 활동한 문인.
    • 종요 - 해서체 확립으로 서예의 발전에 기여.
    • 채옹 - 영자팔법 개발로 서예의 발전에 기여.

  • 중국 외 주변국 역사
    • 공손도, 공손강 - 부여 등과 연합해 고구려를 견제하고, 대방군을 설치함. 반대로 요동 공손씨 정권이 없어지기 전에는 위나라와 고구려는 협력관계였다. 238년 위나라의 공손연 토벌 당시 고구려도 위나라 측에서 참전했다. 이후 사마의가 고구려에 영토 할양을 거부한 것이 서안평 전투와 관구검의 침공으로 이어진다.
    • 관구검 - 비류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환도성을 함락시킨 장수.
    • 사섭 - 당시 베트남 지역을 통치하며 베트남에 한자를 비롯한 동북아 문화를 도입한 인물. 베트남의 고대사에서 비중이 매우 큰 위인이다.


17. 여담[편집]




  •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별의별 희한한 기록들이 다 있는데, 삼국시대의 막바지인 오나라 영안(永安) 2년(서기 259년) 3월,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에 무려 화성에서 왔다고 스스로를 밝힌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시대에 나타난 화성인 사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수신기 자체가 이런 식의 신비한 이야기 모음집이라 손권 딸 손노육의 귀신이 목격된 일화라든가, 서한 시대 무덤에 묻힌 궁녀가 살아나와서 문덕황후 곽씨와 지내며 옛 시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거나 하는 일화들도 실려있다.


18.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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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동탁연합군이 봉기한 190년 1월부터 삼국시대가 끝나는 280년 3월까지의 애니메이션 지도이다.[2] 조비의 아버지 조조는 어디까지나 후한위왕을 지냈을 뿐이고, 황제가 되진 않았지만 이미 그 권세가 황제에 가까웠기에 사실상의 창업군주로 볼 여지는 있다.[3] 정식 5인, 추증 3인[4] 정식 2인, 추증 없음[5] 정식 4인, 추증 2인[6] 건국 군주 손권이 황제라 칭한 연도로, 그보다 7년 전에는 오왕(吳王)이라고 불렀었다.[7] 오늘날의 후베이성 어저우시.[8] 이때 건업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으며 그 전 이름은 말릉.[9] 여기에 더해 공손연이 238년까지 존재했다. 다만 공식적으로 '연'이라는 국가를 선포한 것은 237년.[10] 정확히 말하면 184년 황건적의 난~220년 후한의 공식적 멸망 사이의 기간이 난세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가 난세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유명무실해졌을지언정 통일제국 (후)한이라는 국가가 남아 있고, 군웅할거에서 삼국 정립 이후까지도 각지의 군벌 세력들이 명분상으로나마 한나라의 신하를 자처하고 있는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후한 말기이지 새로 시작된 삼국시대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하도 난세, 난세하니 난세=삼국시대라고 착각하고 '한나라의 공식적 멸망이 삼국시대의 시작점' 이라는 견해를 '한나라가 멸망한 220년부터 난세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라고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하자면 '후한 말기부터 난세가 시작되어, 그 난세의 와중에 후한이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는 의미이다.[11] 굳이 말하자면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의 국가 기능이 '쇠퇴하여' 정국 장악력이 크게 낮아졌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국가 기능의 약화'와 '국가 기능 상실'은 명백히 다르다는 것.[12]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1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 사계절 출판사[13] 이전까지 한나라의 승상이었던 조조의 위왕 즉위가 이 시점(유비가 입촉하였으나 아직 조조가 한중을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 일어났다. 즉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적벽대전의 패배로 조조가 강남 장악에 실패하고, 유비가 익주를 장악하여 강남의 세력이 촉•오의 양대 구도로 재편성되자 조조 역시 이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세력권을 명확히하기 위해 위왕에 즉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14] 또는 유비의 한중왕 즉위를 기준으로 본다면, 익주를 장악한 유비가 익주의 목구멍인 한중에서 조조의 세력을 구축(驅逐)하여 조조의 세력과 맞설 수 있는 영역을 구축(構築)함으로써 이전까지 단기간에 격심한 세력 변화를 겪을 수 있었던 군웅할거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삼국간의 장기적 대립 구도가 시작된 것을 삼국시대 시작의 기준으로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 《정사 삼국지》는 '한나라가 정식으로 선위한 것이 위나라->진나라로 이어지므로 한나라를 이은 것은 위나라->진나라이다'란 '위•진 정통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학적인 측면에서 유비를 소열제가 아닌 단순한 선주로, 국호가 한이었던 촉한을 단순히 촉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는 대중이 읽기 쉽게 만들어진 소설이므로 계속해서 언급되는 '한나라'와 구분하기 쉽도록 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학적으로 본다면 엄연히 존재했던 고대 국가의 정식 국호를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한나라'라고 부르는게 맞고,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6] 또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부분이 한나라로 부른다고 해서 유비의 주장("우리나라는 한나라의 후예다")을 긍정하는 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유비가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나라 이름을 한나라로 세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이름을 지었건 일단 붙은 이상 이름은 이름이다. 예를 들어 인조의 경우 아들인 효종이 효심 때문인지 성군에게나 어울리는 인(仁)조란 좋은 묘호를 올렸지만, 후대 사람들이 인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시호를 맥락대로 받아들여 그를 '덕을 지켜 업을 높인 임금'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것은 아니고, 그저 묘호가 인조니까 인조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인조는 그 부정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분명히 조선의 왕이었고, 인조란 이름 역시 공식 묘호였으므로 그 의미가 어울리건 말건 인조는 인조다. 인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능양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인조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능양군은 폄훼하는 의미의 명칭이지 '더 적합한 명칭'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촉한 역시 어떻게 평가하냐와 상관없이 분명한 진짜 국가였으며, '한나라' 역시 공식 명칭이다. 그 의미가 어떻든 간에 한나라는 한나라이며, 단순히 구분을 위해 촉을 붙혀 촉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7] 물론 촉한정통론 자체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뿐 역사학적으로 결론이 내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한이란 이름 역시 '유촉'이란 이름 만큼이나 부적절한 표현이다. 이 나라의 이름은 '촉'이 아닌 '한'이며, 이 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것 역시 역사학적인 결론이 아니기 때문.[18] 실제 국가의 국호를 그대로 부르는 것은 그 나라의 정통성과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성이란 그 나라가 실제 국가냔 의미의 정통성이 아니라 '촉한 정통론'에서 다루는, '한나라를 계승한 나라'로서 정통성을 의미한다) 한나라를 계승한 나라가 무엇이냐는, 이른바 '정통론'과 1도 상관없는 오나라도 국호인 '오' 그대로 불러준다. 마찬가지 원리로 촉이 아닌 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보는 입장에서도 굳이 촉한이란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떻게 봐도 정통이 아닌 오나라는 국호 그대로 불러주면서 유독 촉한만 국호를 부르지 않는 건 이상하기 때문.[19] 실제로 중국인 역사학자 왕육민이 삼국시대의 호적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삼국시대 인구는 약 3,800만명으로 계산되었다.# 즉, 삼국시대에는 행정권에 들어온 인구는 약 3,800만명이었지만, 이 중에서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인구는 겨우 767만명 정도였을 뿐이라는 소리다.[20] 뭘 몰라서 무식했던 케이스호족들과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켰던 케이스도 있었고, 계획적으로 호족을 찍어 누르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케이스도 있었다.[21] 등애의 촉한 침공 때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성을 내준 마막과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자.[22] 중앙정부에서 각 지역의 상황을 일일히 확인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방의 실권을 가진 호족 중에서 선별된(동시에 지방 호족을 대변하는)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중앙정부에 유입됨으로써 각 지역이 스스로 한나라의 구조 내에 남아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23] 후한 최후의 명군으로 꼽히는 장제가 88년 32세로 요절한 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189년에 즉위하기까지 100년 이상의 기간동안 만 18세가 넘은 성인의 나이로 즉위한 황제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나마 머리가 좀 굵어진 10대 중후반에 즉위한 황제도 드물고, 4대 명제에서 14대 헌제까지 (생년미상인 7대 전소제를 제외한) 10명의 평균 즉위 연령이 9.3세라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계속된 것이다.(그나마 전소제조차 장제의 손자라는 특징상 즉위시 미성년자였을 것임이 확실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100년간 11명이라는 황제 숫자를 보면 눈치챌 수 밖에 없지만, 이들중에 제대로 성장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통치한 인물조차 드물다.(평균 즉위 연령 9세에 평균 재위기간 9년이니 평균적으로 죄다 20세도 되기 전에 죽었다.) 후한 멸망의 단초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긴 해도 그나마 후한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린 화제조차도 28세로 요절했고, 상제, 충제는 영아기에 즉위하여 재위기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 그나마 이 둘보다는 좀 커서 즉위한 질제는 유아기에서 갓 아동기로 넘어갈 연령에 즉위하여 그나마 너무 똑똑하다고 역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그나마 성인이 될 때까지 재위했던 것이 안제, 순제, 환제, 영제 정도인데 이 넷의 공통점은 모두 무능했다는 것이다. 차이점을 굳이 찾다면 환령지말(桓靈之末)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전설적인 암군이었던 환제와 영제에 비해 안제와 순제는 그 수준은 아니라는 것 정도이다. 그나마 생년이 불명확한 전소제가 이 막장드라마에서 유일한 예외라고 보기에는 미성년자인 것이 확실한 연령에 즉위해서 200일만에 폐위당한 황제이니 뭔가 해 볼 여지가 있었을 리 없고, 그러면 남는 것은 《삼국지연의》에서 그렇게 불쌍하게 묘사되는 (후)소제와 헌제뿐이다. 그야말로 한 세기 이상의 기간동안 제대로 된 황제라는게 단 하나도 안 나왔다.[24] 연달아 어린 황제가 등장한 것 자체가, 권력을 쥔 환관들이 다루기 편한 어린아이를 황제로 즉위시킨 결과이다. 성인이 된 뒤에도 철저하게 무능한 황제가 많았던 것 역시 황제의 지근거리에서 그 성장을 책임지는 환관들의 영향이 상당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25] 예를 들어 유비와 같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의병'들이 등장했음을 생각해 보자. 당시 각 지역에서 나름 자체적인 군사력을 편성할 수 있는 집단은 기본적으로 그 지역의 유력자인 호족들이었다.[26] 환관 세력의 탄압으로 중앙정계에서 사대부=사인의 세력은 크게 꺾인 상태였지만, 각 지역에 세력기반을 둔 지주인 호족의 세력 자체가 약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앙정부에서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각 지역에 토지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주민들을 가진 호족의 세력은 그대로였으며 이러한 세력 기반 자체를 꺾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었던 것. 게다가 권력 장악 이외의 영역에 대체로 무능했던 환관 세력은 이런 호족들에 대한 통제력마저 별볼일 없었기에 사대부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을 뿐 지방에서 호족들이 토지를 집어삼키며 세를 불려나가는 것을 견제하는 능력은 이전 시대보다도 훨씬 부족했다. 여기에 난세가 시작되면서 토지를 잃은 유민들이 이들 호족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면서 그 세력은 더욱 안드로메다로...[27] 이 시점에서 하진의 복안은 환관 세력을 '적당히' 손봐주는 것으로 그 동안 지나치게 성장한 권력을 토해내고 제자리에 돌아가게 하되, 완전히 근절하지는 않고(지난 수백년간 한나라를 지탱해 왔던 시스템을 복구하려던 것으로 추정하면 대략 적절할 것이다.[28]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29] 입식은 호족들과 서방 문물이 대규모로 유입된 이후에야 도입된다.[30] 드라마나 영화 같은 삼국지 관련 영상물을 보면 연회나 회의 장면에서 주연급들이 어딘가에 올라가 앉아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올 것이다.[31] 병농일치의 징병제와 달리 대를 이어 군역을 전담하는 사가(士家,병호)에서 병력을 충당하는 제도. '세병제'나 '사가제'라고도 함.[32]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 1989~1999년 출판, 총 12권 22책, 1400만 자, 백수이가 주편집자가 되었고, 22명의 분권 편집장, 탁월한 성과에 조예가 깊은 500여 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썼다.[33] 이중 서진의 통일기 30년을 제외하면 340년이고, 통일제국 멸망사를 연구하기 위해 후한 말엽의 쇠락기까지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면 황건적의 난에서 한-위 선양에 이르는 약 35년을 다시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34] 예를 들어 삼국시대까지는 한나라에서 형성된 통일제국의 체제가 명확히 계승되고 있었고, 이를 복원하여 다시 통일제국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서진이다. 하지만 그 서진이 불과 30년만에 몰락함으로써 한나라에서 유래한 통일제국의 체제가 해체되고 중국사는 중세의 긴 분열과 혼란기에 빠져들게 되는 것. 따라서 삼국시대는 그 후 300년 가까이 지속된 중세 혼란기의 도입부이자 역사적 갈림길로써 큰 중요성을 가진다.[35] 원래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는 인터넷에서 하듯이 이 시대와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해서 다루진 않는다. 가령 초한지의 시대인 초한쟁패기만 해도 역사학에서는 진•한교체기 정도로 뭉뚱그려 설명하지, 인물 하나하나를 다루며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36] 물론 그렇다고 태평도처럼 신왕조 수립 같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한중군 내에서 종교적 군벌 행세했다고 보면 된다.[37] 의외로 이런 종류의 사이비 학문도 아주 좁게 보면 진리에 가까운 것이 있거나 창시자가 나름 머리를 짜내서 이론을 갖추기 때문에 영리하지 않으면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거의 절대 다수는 결정적인 허점들이 있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알아봐야 현실에서 별로 유익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해로운 경우가 많다.[38] 엘랑 비탈 항목에도 설명된 것처럼, 중세~근세 유럽에서 프랑스 육군의 위세는 기본적으로 서유럽 최대의 대국이었던 프랑스는 대부분의 경우 적국보다 우세한 병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프로이센군이 아무리 질적으로 우수한 정예병을 가지고 있더라도 양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이 왕성한 공격정신을 바탕으로 계속 공격하면 정예군도 결국은 지쳐 물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는 독일이 아직 통일 전이었기에 개중 세력이 왕성했던 프로이센 역시 프랑스에 비하면 국력의 규모가 작았다는 데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화기의 발달 역시 '상대적으로 훈련도가 낮은 징집병도 유효한 전력으로 활용 가능한 수준' 까지는 발전했지만 '압도적으로 강력한 화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단숨에 섬멸'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39] 실제로 나관중은 삼국시대가 끝난지 1,000년도 더 지나 태어난 원말명초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쓰인 민간설화 등은 당시에 이미 있었던 설화들을 소설적으로 정리한 정도에 불과하다. 《연의》의 내용은 《삼국지》에 대한 민간설화를 모은 《삼국지평화》와 야사, 실제 역사의 내용을 혼합한 것이다. 즉, 명나라 시대에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삼국지》의 인물들은 역사상의 실존인물보다는 민간설화 속 영웅/캐릭터에 가까웠다. 특히 관우 숭배는 벌써 널리 퍼졌으며, 당연히 관우를 신격화하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송나라 시절부터 나관중이 살던 홍무제 때까지 여러차례 추봉되고 묘가 세워졌다. 《삼국지연의》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수호전》에서 별다른 설정이 없는 일반인이 자연스럽게 '관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수호전의 시간대가 송휘종 즈음인데 송철종때 헌열왕이라 불렀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40] 당연히 한나라 때야 영토의 개척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방이나 남방이나 한족을 칭한 왕조들의 영역은 대체로 한나라 때 확보한 영역과 비슷하거나 적었다.[41] 심지어 한나라 때 선택한 유교가 일부 유목민들을 제외한 중화 문명의 메이저 문화로 거의 끝까지 가게 된다.[42] 유비, 조조, 손권, 원소, 사마염[43] 황건적의 난~동오 멸망까지 정확히 만 96년. 그나마도 조위 건국~동오 멸망까지는 꼴랑 60년이다.[44] 다만 뒤의 두 사례가 현대신화 창조의 의도로 만들어진 완전한 창작물인데 반해 《삼국지(연의)》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야 뭐 그리스 로마 신화의 테베 전쟁이나 트로이 전쟁, 아서왕 전설이나 샤를마뉴 12용사처럼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따 온 파트도 있긴 하다.[45] 토탈 워 삼국이 첫 유료 DLC로 무려 팔왕의 난을 내놨을 때 중국을 비롯한 《삼국지》의 전통적 소비지역(=동아시아)에서 영 못마땅한 반응을 내놨던 것은 단순히 진(晉)나라 역사에 대한 생소함이나 거부감(특히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물(캐릭터)을 소비하는 《삼국지》의 전통적인 향유 방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본편만 해도 유니크 무장이 너무 적다며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판에.[46] 실제로 서구 사학계에서는 동진과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 국가들을 중국판 비잔티움 제국에 비견하기도 한다.[47] 당고의 금/상시/황건[48] 아시시피.[49] 남경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육조시대 강남경제권의 시발점을 연 군주로 평가받는다.[50] 9품중정제는 이후 과거제로 대체될 때까지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장 조선시대에도 정1품, 정2품과 같은 9품은 남아있었고, 오늘날의 공무원 계급도 3급, 2급, 1급과 같이 숫자가 올라가면 높아진다는 것은 9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