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메네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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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 왕국 4대 군주
Εὐμένης | 에우메네스 2세
파일:에우메네스 2세.jpg
제호
한국어
에우메네스 2세
그리스어
Εὐμένης
영어
Eumenes II
존호
바실레프스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158년
재위 기간
기원전 197년 ~ 기원전 158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페르가몬 왕국 4대 군주. 마그네시아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로마 공화국과의 동맹을 토대로 페르가몬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다.


2. 생애[편집]


아탈로스 1세와 아폴로니다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아탈로스 2세, 필레타이로스, 아테나이오스가 있었다. 기원전 19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고,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평화 협정에 참여했다. 이때 로마 측은 안티고노스 왕조가 다시는 페르가몬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기원전 196년, 에우메네스는 스파르타의 참주 나비스에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로마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를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제공했다.

그 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 안티오코스 3세가 자기 딸 하나를 그에게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에우메네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페르가몬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안티오코스 3세가 소아시아를 넘어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으니 주의히라고 경고했다. 얼마 후, 그는 동생 아탈로스 2세를 보내 셀레우코스군이 헬레스폰트를 건너왔다고 알렸다. 로마는 이 덕분에 안티오코스 3세에 대비해 준비를 착실히 해둘 수 있었고, 에우메네스 2세와 아탈로스 2세에게 동맹자로서 신의를 지켜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에우메네스는 발칸 반도에서 안티오코스 3세에 맞서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을 벌이고 있는 로마군에 가담하여 할키디키와 타나그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이기나에 있을 때 안티오코스 3세가 에페수스에 군대를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에 처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심했지만, 그곳에 남겨둔 동생들이 잘 막아줄 거라고 믿고 로마군과 계속 협력했다. 기원전 191년 킬리키아의 도시 코리코스 인근 해변에서 벌어진 코리코스 해전에서 셀레우코스 함대를 격파한 뒤, 로마군은 그가 조국으로 돌아가는 걸 받아들이고 막대한 사례금을 줬다. 그의 협력 덕분에, 로마군은 헬레스폰트를 무사히 건너 아시아에 집결할 수 있었다.

기원전 190년 12월 말 마그네시아 전투에 참여한 그는 우익 부대를 지휘했다. 셀레우코스 좌익의 낫전차들이 돌격을 시도하다가 화살과 투척 세례를 받고 혼란에 빠지면서 자기편 진형을 헝클어버리자, 그는 이 때를 틈타 기병과 경보병들을 모두 이끌고 들이쳐 적 좌익을 섬멸해버렸다. 이러한 그의 활약 덕분에, 로마군은 셀레우코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88년 아파메아 조약을 체결하고 헬레스폰트에서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소아시아 일대를 포기했다. 원로원은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리카오니아 전체, 프리기아, 무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시필루스, 카리아 지방,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에 걸치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옛 소아시아 영토를 페르가몬 왕국에 대부분 넘겼다. 이로서 에우메네스가 이끄는 페르가몬 왕국은 소아시아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

페르가몬의 급성장에 위협을 느낀 비티니아 왕 프루시아스 1세는 그들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한니발 바르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한니발은 나중에 로마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대를 육성할 수 있도록 비티니아를 강화하기로 마음먹고, 프루시아스 1세가 이웃 왕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한니발은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왕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파충류들로 가득찬 도자기 그릇들을 적 함대에 던져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맹공을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185년, 에우메네스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필리포스 5세가 트라키아 도시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알렸다. 기원전 183년, 필리포스와 에우메네스는 로마에 다시 사절을 보내 서로를 비방했다. 이와 동시에, 로도스는 에우메네스가 폰토스 강 연안의 그리스 도시 시노페에 적대행위를 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원로원은 모든 사절들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고, 조만간 사절단을 보내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절단은 비티니아로 찾아가 에우메네스와 프루시아스 1세의 분쟁을 해결했다. 이때 사절단 대표 플라미니누스는 한니발이 아직 살아있는 것에 분노하여 로마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적을 은닉한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결국 비티니아 왕은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넘겨주기로 했고, 한니발은 자신을 잡으러 사람이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평소 소지하고 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한편,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1세는 페르가몬, 비티니아, 카파도키아의 영역을 위협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형제들을 로마에 사절로 보내 상황을 보고하고 중재를 요청했다. 로마는 폰토스에 사절을 보내 침략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파르나케스 1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크리토스 장군에게 1만 병력을 맡겨 소아시아를 약탈하게 했다. 180년 봄, 파르나케스 1세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약탈했다.

에우메네스와 아탈로스 2세는 반격에 나서 파르나소스에서 에우메네스의 장인 카파도키아 왕 아리아라테스 4세와 힘을 합쳐 폰토스 왕국과 대항했다. 중간에 로마가 중재하려 했지만, 파르나케스 1세가 협상을 거부해서 무산되었다. 전쟁은 기원전 179년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수세에 몰린 파르나케스 1세는 평화 협상에 응했고, 시노페와 일부 식민도시를 제외하고 그가 정복한 대다수 영토를 반환하기로 했다. 또한 파플라고니아와 티온에서 철수했고, 인질을 석방하고 탈영병을 넘겨줬고, 전쟁 배상금도 지불하기로 했다.

기원전 175년 9월 3일, 셀레우코스 4세는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셀레우코스 4세의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섭정을 자처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안티오코스 3세의 셋째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를 지원하여 그가 헬리오도로스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해줬다. 기원전 173년, 로마에 직접 방문하여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 왕이 로마와 전쟁을 벌이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는 페르세우스가 군대를 대폭 키우고 주변 국가들, 특히 셀레우코스 제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은 로마에 맞설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로 그러는 것이라며,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페르세우스의 편에 서서 로마에 대항하려 하니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많은 의원들은 마케도니아가 로마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데 굳이 개입할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믿을 수 있는 동맹자인 에우메네스가 강력하게 경고하자 마음을 달리 먹었다.

에우메네스는 로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던 중 델포이에 들려 아폴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 했다. 그런데 도중에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판톨레온이라는 사람만이 그를 끝까지 지켰고, 다른 수행원들은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그는 아이기나에서 어렵게 회복했지만, 오랫동안 상태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탈로스 2세는 형이 죽었다는 뜬소문을 전해듣고 형수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가 회복된 후 귀국하자, 그는 왕좌를 곧바로 형에게 넘겼다. 에우메네스는 그가 자신을 대신하려고 서두른다고 꾸짖었지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로마는 에우메네스가 암살될 뻔한 일의 배경에 페르세우스가 있으리라 여기고 마침내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로마군이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자, 그는 페르세우스와 손을 잡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페르세우스를 의심해 진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로마인들은 낌새를 눈치채고 그가 동맹을 끊으려고 눈치를 살핀다고 여겨 비난의 목소리를 높혔다. 기원전 167년, 원로원은 이탈리아에 찾아온 그가 로마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 한겨울에 가능한 한 빨리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반면 아탈로스 2세가 원로원에서 언제든지 연설할 수 있도록 해줬다.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참패한 페르세우스가 로마군에 항복하면서 전쟁이 종결된 뒤, 에우메네스는 로마에 승리를 축하하면서 갈라티아켈트인들이 페르가몬을 침략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하고자 아탈로스를 사절로 보냈다.

그러나 원로원은 배신을 고려한 것으로 의심받는 에우메네스를 돕기를 꺼렸고, 아탈로스의 친구와 지인들은 그에게 에우메네스의 이익을 위해 원로원에 출석하지 말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말하라고 권했다. 에우메네스는 첩보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매우 신뢰하는 스트라스투스를 로마로 파견했다. 스트라스투스는 아탈로스와 만나 "지금 두 사람이 나라를 공동 통치하고 동등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왕은 건강이 좋지 않아 곧 후계자가 선택될 예정인데, 당신이 유력하다. 그러니 쓸데없는 야심을 버리고 왕에게 협조하라"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갈라티아의 위협은 형제들을 왕국 없이 남겨둘 위험이 있으니 이 시점에서 내전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아탈로스는 그 말에 설득되어 원로원에 형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원로원은 용병대를 보내주기로 했고, 페르가몬은 기원전 166년 용병대의 힘에 힘입어 갈라티아군의 침략을 격퇴하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비티니아, 갈라티아, 로도스의 사절들이 종종 로마에 찾아와서 에우메네스가 자기들 영역을 공격하고 로마에 도전할 낌새를 보인다고 고발했지만, 로마에 남아있던 아탈로스가 형을 위해 변호한 덕분에 무마될 수 있었다. 그렇게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이어간 덕분에 안정적인 치세를 이어가던 그는 기원전 158년에 자연사했다. 동생 아탈로스 2세가 왕위에 올랐고, 형수 스트라토니케와 재혼했다. 그는 생전에 킬리키아 왕의 딸 스트라토니케와의 사이에서 아탈로스 3세를 낳았다. 아탈로스 3세는 138년에 아탈로스 2세가 죽은 뒤 새 왕으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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