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옙투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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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한국 출판 저작


한국어: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
러시아어: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영어: Yevgeny Aleksandrovich Yevtushenko


1. 개요[편집]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소련~러시아의 시인, 문인, 영화 제작자이다.


2. 생애[편집]


1933년 7월 18일 이르쿠츠크주 출생. 옙투셴코는 어머니의 성으로 원래 성은 강누스(Гангнус, Gangnus)이다. 1961년에 바비야르 학살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 바비 야르(Бабий Я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의 가사로 사용되기도 한 그의 대표작이며, 이 작품으로 1963년의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기도 했다.

19세의 나이에 '미래의 전망'이라는 첫 시집으로 소련 작가협회에 최연소 회원으로 이름을 올리며 일찌감치 작가로서의 재능을 선보였다. 이후 1952년부터 모스크바 고리키문학대학에서 공부했으나 1957년 발표한 시 '지마역'이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퇴학당했다.

1961년에 발표된 시 '바비 야르'라는 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1943년까지 많은 유태인, 러시아인 등이 나치 독일군에 학살당했던 키예프 북서부 바비 야르라는 곳에 소련이 인근 공장의 폐기물 매립장을 세우려 하는 것에 대한 비판, 나아가 바비 야르 사건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려 사건을 잊혀지도록 하려는 소련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전에도 그는 스탈린이 죽었을 때 "우리는 스탈린이 다시는 그의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반체제적인 작가로 몰려 흐루쇼프 서기장 시절에는 소련 당국의 탄압을 많이 받았다. 1971년 흐루쇼프는 죽기 일주일 전 먼저 전화를 걸어 사저로 불러서 "나는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시인이라서 진실을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정치가였다. 정치가라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직업인지 당신은 모를 거다. 정치가는 쫓겨나지 않으려고, 그저 소리지르는 수밖에 없는 자리다"라며 옙투셴코에 대한 탄압을 사과했고, 옙투셴코는 흐루쇼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이렇게 흐루쇼프 시절 소련 당국을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1964년 흐루쇼프가 권력에서 밀려난 뒤부턴 옙투셴코의 저항 정신도 무뎌지고 체제 순응주의자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공산당 정부가 제공하는 많은 특혜를 받았고, 국외여행도 비교적 자유롭게 하며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한창 독자가 많았을 때는 미국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해 러시아 내외의 대형 운동장에서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시낭송회를 열며 팝스타와 같은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1988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빈대떡을 좋아했다고 한다.

1989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2007년부터 미국 털사 대학교뉴욕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2017년 4월 1일 털사에서 사망하였다.


3. 한국 출판 저작[편집]


한국에는 80년대에 번역 출판 되었다. 옙뚜 셴꼬, 예프뚜셴꼬, 예프투셴코 등 다양한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 <시베리아의 들딸기> (동아일보사, 1985)
  • <나의 소망> (중앙일보사, 1988)
  • <산딸기> (지문사, 1988)
  • <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 (열린책들, 1989)
  • <죽을 때까지 죽지 않으리>(영림카디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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