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모(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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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王謨
(? ~ 350)

후조의 인물. 자는 사현(思賢).


2. 생애[편집]


코에 장애가 있어 말을 할 때면 비음이 섞여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고, 용모도 곱사등이에 단신이라 위엄 또한 없었다. 훗날 그는 후조의 곡양(曲陽)현령으로 임관하였는데, 석륵은 왕모의 볼품없는 생김새를 보고 그 자질을 의심하여 장사 장빈에게 정말 왕모를 써도 괜찮은 것인지 물었다. 이에 장빈이 대답했다.

"청컨대 가부(可否)를 시험해보십시오."

석륵은 그 말을 그대로 따랐다. 얼마 뒤, 왕모의 정치와 교화는 100개 성들 중 으뜸이라 도부종사(都部從事)로 승진하였다.왕모가 도부종사로서 지방을 감찰하면서 법을 엄정히 집행하다보니, 그가 두려워 자진하여 사직하는 이가 15명에 이르렀다.

건평 4년(333년) 8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태자 석홍이 제위에 오르자, 보정대신인 중산왕 석호가 정권을 잡았다. 이때 왕모는 시중에 임명되었다.

건무 6년(340년) 10월, 중알자 신편(申扁)이 천왕 석호와 태자 석선(石宣)의 총애를 받아 조정의 기밀을 감독하게 되었다. 석호는 이미 여색에 빠져 정무를 아예 돌보지 않았고 석선도 항상 사냥을 즐기느라 바빴기에, 신편은 인사권과 형벌권을 전부 쥐고 관리들을 좌지우지 하였다. 다만, 노심(盧諶), 정계(鄭系), 최약(崔約) 등 관직이 9경에 이르는 자와 시중 왕모 만큼은 신편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영흥 2년(350년) 2월, 대장군 염민이 정변을 일으켜 염위를 건국하고, 왕모를 상서령으로 삼았다.

영흥 2년(350년) 4월, 염민이 제왕(齊王) 이농과 그 세 아들을 죽이면서 상서령 왕모 등 투항했던 후조의 여러 관리들도 숙청하였다. 이유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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