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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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衍
(256 ~ 311)
1. 개요
5. 이후


1. 개요[편집]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이보(夷甫)로 왕융의 사촌동생. 서주 낭야국 극양현 사람.


2. 팔왕의 난 이전[편집]


안색이 맑고 아름다우면서 풍채가 단정했으며, 왕연은 어릴 때 남에게 굴복하는 태도를 한 적이 없어서 남들과 다르게 훌륭하다고 알려졌다. 일찍이 산도를 방문했고 산도는 왕연에 대해 감탄하면서 어떤 아낙네가 이러한 아이를 낳았냐고 말하면서 천하 창생을 그르칠 자가 꼭 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고 했다.[1]

269년에 순욱, 풍담 등이 양호를 싫어했고 왕연은 양호에게 그 사실을 분명하고 조리있게 알려줬는데, 양호가 그렇지 않다고 하자 왕연은 물러났다. 왕연이 떠나고 양호는 왕연에 대해 명성이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지만, 풍속을 훼손시킬 사람이라고 했다.

272년에 양호가 보천을 구하기 위해 강릉을 공격했는데, 왕융이 군법으로 인해 처형당할 뻔 하자 이 일로 양호에게 훼방하는 말을 했다. 양준이 자신의 딸을 왕연의 아내로 삼으려고 제안하자 왕연은 일부러 미친 척 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무제가 왕연의 명성을 듣고 왕융에게 왕연은 요즘 누구와 비교되냐고 물었는데, 왕융은 현대에는 없지만 고대 사람들 중에서는 왕연과 같은 인물이 있다고 했다. 조칙으로 국정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는 조칙이 내려지자 왕연은 상서 노흠에게서 요동태수로 천거되자 이를 거부했으며, 세상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청담에 대해서만 논했다.

과거에 잔치에 사람들이 모일 때 일가 사람이 왕연에게 화가 나서 얼굴을 쳤는데, 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소달구지에서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췄으며, 왕도는 왕연에게 너는 나의 눈빛을 보고 소등에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북평에서 죽자 아버지의 임지에 극진하게 선물을 보냈으며, 아버지가 친했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자 그들은 왕연을 섬겼다. 몇 년 사이에 왕연은 가산을 탕진하고 낙양성 서쪽의 밭과 정원에서 살았으며, 태자사인, 상서랑, 원성현령 등을 지냈고 하루 종일 청담을 했고 낙양으로 돌아가서 중서자, 황문시랑 등을 지냈다.

이전에 위나라 정시 연간에 하안, 왕필 등이 노장의 이론을 서술하고 논리를 세워 천지만물은 무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해 왕연의 무리는 이를 아끼고 중히 여겼다. 이로 인해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들뜨고 이상한 것을 아름답다고 하면서 직책과 해야 할 업무에 게을러지고 폐기했으며, 왕연은 항상 자신을 자공에 비유했고 당시 명성이 자자했고 오로지 노장 사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왕연은 노장 사상을 논의할 때 강의하다가 해설을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쳤고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입 안에 자황[2]이 있다고 했으며, 사람들은 왕연에 대해 세상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왕연은 고위직을 여러 차례 지내고 후진의 선비들은 왕연을 경애하면서 사모해 그를 본받았다.

왕연은 한때 어린 자식을 잃은 적이 있었고 산간이 그 일을 이야기하자 왕연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으며, 산간이 품 속의 갓난 아기인데 어찌 이렇게 슬퍼하시냐고 묻자 왕연은 성인은 정을 잊어버리고 가장 하류의 인간은 정을 고려하지 않지만, 정이 모여있는 곳은 바로 우리들이라 했다. 산간은 그 말에 감복해 더욱 그를 위해 통곡했는데, 문헌에 따라서 왕융이 자식을 잃은 것으로 나온다.

왕연의 아내 곽씨는 가남풍의 친척으로 중궁의 권세를 이용해 강퍅하고 욕심이 많아 축재에 힘쓰면서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했는데, 왕연은 이를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 왕연은 동향 사람인 유주자사이자 낙양의 이름난 협사인 이양을 곽씨가 무서워하는 것을 알았으며, 부인을 말리면서 나만 당신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양도 당신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고 했다.

이 말에 곽씨가 약간 주춤했고 왕연은 아내 곽씨의 성격을 꺼려 돈에 대해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곽씨는 왕연의 입에서 돈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기 위해 왕연이 잠든 사이에 종을 시켜 그 주위에 돈을 잔뜩 쌓아놓게 했는데, 왕연이 일어나자 이것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3. 팔왕의 난 시기[편집]


북군중후, 중령군, 상서령 등을 역임했고 딸이 사마휼의 비였는데, 가남풍이 사마휼을 주살하자 왕연은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해 딸을 이혼시키고 싶다고 상소했다. 가남풍이 실각하자 유사에서 왕연이 태자(사마휼)가 무고할 때 살아남을 생각만 했으니, 종신토록 금고해달라고 상주문을 올리자 왕연은 면직되었다.

왕연은 사마륜을 가벼이 여겼고 사마륜이 찬탈하자 미친 척 하고 여종을 죽였으며, 사마륜이 주살되자 하남윤이 되었다가 상서, 중서령이 되었다. 사마경이 전권을 휘두르자 모두 절했고 왕연은 혼자 약식으로 절했고 병으로 벼슬을 떠났으며, 사마영이 중군사로 임명했다가 상서복야, 영이부에 승진했고 상서령, 사공, 사도를 지냈다.

왕연은 재물을 소중히 여가면서 나라를 다스리려는 생각은 없었으며, 개인만을 생각했고 왕연은 사마월에게 중원은 이미 혼란해 방백(제후)에게 의지해 문무의 자질을 갖춘 인물을 임용하라고 했다. 동생 왕징은 형주, 일족의 동생인 왕돈은 청주에 부임하자 두 사람은 밖에 있고 자신은 중앙에 있어 세 개의 굴을 팠다면서 일족의 안전을 분산한 것을 이야기하자 이를 들은 사람은 왕연을 비판했다.


4. 영가의 난 시기[편집]


석륵, 왕미 등이 낙양을 공격했고 왕연은 도독정토제군사, 지절에 임명되어 이들을 막았는데, 전장군 조무, 좌위장군 왕경 등이 적의 치중을 손에 넣자 왕연은 태위에 임명되면서 상서령은 그대로 유지했다. 무릉후에 봉해지자 이를 사양했고 낙양이 위험해 많은 사람이 천도하기 위해 대피하겠다고 하자 왕연은 달구지용 소를 팔아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사마월이 죽고 원수로 추천되자 왕연은 적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해 양양왕 사마범에게 양보했지만 그도 거절했으며, 사마월의 영구를 모시고 동해로 돌아가서 장사를 지내기로 하면서 동쪽으로 도망가다가 석륵의 군사에게 추격을 받아 붙잡힌다.

석륵이 진나라가 이렇게 된 것을 묻자 왕연은 혼란이 일어나서 실패한 이유를 진술하고 그 계책을 세우는 것은 자기에게 있지 않으며, 젊어서 관직을 가질 생각이나 세상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서 석륵에게 존호를 가지라고 권고해 죽음을 면하려 했다.

그러나 석륵이 왕연에게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들어가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냐면서 천하를 파괴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냐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연을 붙들고 나가게 했고 석륵이 밤중에 사람을 시켜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왕연은 56세에 죽었다.


5. 이후[편집]


왕연은 그렇게 황제를 버리고 달아나다가 석륵에게 잡혀 죽었지만, 그가 예전에 안배해뒀던 남도 준비공작은 그의 일족인 왕도사마예를 받들고 남하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형주와 양주를 미리 장악해놓은 왕씨 일족의 힘을 바탕으로 동진이 세워지는 바탕이 된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시대를 읽는 눈은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나 그 능력을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 일족의 영달만을 위해서 사용했다는 면에서 당대에도 비판받았던 인물이고 결국 자신도 자신의 나라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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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인물평은 유명해져 국순전에 인용되기도 한다.[2]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다는 뜻으로 사실이나 진상을 따져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함부로 비평하는 것을 말한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