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노리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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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上杉憲政, 上杉憲当
1523-1579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15대 당주로 센고쿠 시대간토 간레이이자 다이묘이다.

2. 생애[편집]


우에스기 노리후사의 아들로 1523년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 노리후사가 사망해 그의 양자였던 우에스기 노리히로가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1531년 간토 쿄로쿠의 난을 통하여 간토 간레이직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을 얻게 되었다.

1541년 무라카미 요시키요, 다케다 노부토라, 스와 요리시게 등이 운노 무네츠나를 공격했고, 운노 가문은 노리마사에게 구원을 요청해 이에 응했다. 이에 스와 가문은 독단으로 노리마사와 화친하였다. 그 해 노부토라의 아들 다케다 하루노부가 노부토라를 몰아내고 다케다 가문의 가독을 잇고 스와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때 노리마사는 무사시에 침공해오던 호조 가문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과 코가 쿠보 아시카가 하루우지를 끌어들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거병으로 호조 우지야스가 스루가로 출진한 틈을 타 대군을 이끌고 호조 가문의 카와고에 성을 포위했으나, 호조 우지야스의 기습과 농성하던 호조 츠나시게의 호응으로 대패를 당하였다. 이 전투가 전국시대 3대 기습 중 하나로 꼽히는 가와고에 성 전투이다.[1]

그 후 세력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1547년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돕기 위해 출전했다가 다케다 하루노부에게 참패하고, 결국 나가오 하루카게와 손을 잡는다. 그러나 호조 가문의 위협은 계속 되었고, 호조 측으로의 배반이 잇따라 머무르고 있던 무사시의 히라이 성에서 탈출해 나가오 카게토라에게 도망쳤다. 히라이 성이 곧 낙성되며 적남 타츠와카마루 마저 잃게 된다.

나가오 카게토라를 따라 에치고로 들어간 노리마사는 카게토라를 양자로 삼았고, 1560년 사토미 요시타카의 요청으로 카게토라와 함께 간토로 향해 오다와라 성을 공격할 때 간토 지역의 다이묘나 코쿠진들을 규합하는 데 활약했다. 1561년에는 간토 간레이 직을 나가오 카게토라에게 양도하고 우에스기 성씨와 자신의 이름의 마사(政) 자를 내리고 은거해 출가하였다. 나가오 카게토라는 그 후 우에스기 마사토라라 칭하였고, 출가해 우에스기 겐신이라 칭했다.

1578년 겐신이 사망한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우에스기 카게토라의 후계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카게토라 측에 섰다. 그러나 카게카츠가 매우 유리해졌고, 카게토라와 카게카츠의 평화 교섭을 위해 카게토라의 적남 도만마루를 데리고 카게카츠에게 향했으나, 카게카츠의 병사들에 의해 도만마루와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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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나머지는 오케하자마 전투이츠쿠시마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