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테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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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고트 왕국 가톨릭 4대 국왕.
2. 행적[편집]
588년, 메리다 시의 백작 세가와 아리우스파 주교 수나는 루시타니아 지방에서 명망높은 인물인 가톨릭 주교 메이슨과 레카레드 1세의 심복인 클라우디우스 공작을 살해한 뒤 여세를 몰아 서고트 왕국의 국교를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변경한 레카레드 1세를 타도하려 했다. 위테리크는 여기에 가담했고, 메이슨을 직접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2차례 시도 모두 불발로 끝나자, 그는 심적 부담을 느낀 나머지 클라우디우스 공작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 세가는 긴급 체포된 뒤 양손이 베어진 후 갈리시아로 추방되었고, 수나 주교는 마우레타니아로 망명했다.
그 후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가장 신뢰받는 측근 중 한 명이 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의 후원으로 레카레드 1세의 궁정 관료가 되었다. 이후 레카레드 1세의 프랑크 왕국, 바스크인,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종군했으며, 나중에는 서고트군 일부 부대를 지휘하는 공작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601년 12월 레카레드 1세가 사망한 뒤 18세의 아들 리우바 2세가 즉위하자, 그는 음모를 꾸민 끝에 603년 정변을 일으켜 리우바 2세를 폐위한 뒤 오른손을 자르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603년 6/7월에 처형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정변을 일으킨 배경엔 아리우스파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하려는 아리우스파의 음모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비록 도중에 음모를 폭로해 동지들을 배신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아리우스파를 따랐을 수도 있다. 통치 기간 동안 아리우스파를 위한 정책을 벌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가톨릭 교회를 새로 세웠거나 공의회를 개최했다는 기록도 없는 것을 볼 때 가톨릭 교회와 긴장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위테리크는 왕위에 오른 뒤 동로마 제국과의 전면전을 단행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우리키우스가 폐위된 후 포카스 황제의 폭정과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별다른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동로마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의 목표는 베티카 남부 일대를 석권하고 지브롤터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원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을 거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로마 병사들과 자주 싸웠지만 적절한 영광을 거두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610년 툴레도 공의회에 카르타헤나 인근의 비가스트룸 시 주교가 참석한 것을 볼 때, 비가스트룸 시가 그의 치세 때 서고트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비스크인들의 북방 영토에 대한 약탈전이 수그러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군주 테우데리크 2세가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우데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테우데리크 2세의 할머니 브룬힐트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오도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는데, 기록이 미비해서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610년 4월, 위테리크는 왕궁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암살당했다. 유해는 별다른 장례식 없이 곧바로 매장되었고,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던 군데마르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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