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뷰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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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윌리엄 뷰챔프.jpg
성명
윌리엄 드 뷰챔프
William de Beauchamp
생몰년도
1343년경 ~ 1411년 1월 8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워릭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헤레포드
아버지
토머스 뷰챔프
어머니
캐서린 모티머
형제
기, 토머스, 모드, 필리파, 앨리스, 조안, 이사벨, 마가렛, 엘리자베스, 앤, 캐서린
배우자
조앤 피츠앨런
자녀
리처드, 조앤
직위
베르가베니 남작, 가터 기사단 단원, 칼레 보안관, 사우스 웨일즈 판사 및 펨브로크 총독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다.


2. 생애[편집]


1343년경 잉글랜드 워릭셔 워릭 성에서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제1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인 캐서린 모티머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기[1], 토머스, 모드[2], 필리파[3], 엘리스 [4], 조앤[5], 이사벨라[6], 마가렛[7], 엘리자베스[8], 앤[9], 캐서린[10]가 있었다.

윌리엄은 초기에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는 1358년부터 1361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358년 교황의 허락을 받고 주교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1361년 성직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세속에 복귀한 그는 1357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375년 또는 1376년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해 나헤라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워릭 가문의 후계자인 형 토머스와 함께 튜튼 기사단고대 프로이센을 향한 십자군에 참여했다. 1370년 가스코뉴로 파견되어 프랑스군의 침공에 맞섰고, 1373년 곤트의 존의 슈보시에 참여했으며, 1381-1382년에는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포르투갈 원정에 참여했다. 1383년 헨리 르 디스펜서가 조직한 플란데런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예정되었으나, 그가 참여하기도 전에 십자군이 와해되면서 무산되었다.

1369년에 사망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미들랜드 일대에서 400마르크 상당의 토지를 받았다. 1372년,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는 두번째 사촌이자 상속인인 제3대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드 그레이와 불화를 겪은 끝에, 자신의 영지가 레지날드에게 넘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촌인 윌리엄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하지만 존 드 헤이스팅스는 1375년 사망하기 직전에 갓난 아기 존을 낳았다. 윌리엄은 1378년에 어린 존의 후견인을 맡았다. 이후 존이 1389년에 자녀 없이 사망하자, 그는 존의 미망인이 펨브로크 여백작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베르가베니 성을 접수한 뒤 베르가베니 남작에 선임되었다.

1377년 리처드 2세에게 선임된 첫번째 기사가 되었으며, 1378년부터 1380년까지 리처드 2세의 왕실 시종장을 역임했고, 1383년부터 1389년까지 칼레 보안관을 역임했다. 형 토머스는 1386년에 리처드 2세에 대적한 청원파의 일원이었지만, 그는 잉글랜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리처드 2세를 위해 형에 맞서 싸울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386년 리처드 2세로부터 소환령을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헨리 나이튼에 따르면, 윌리엄은 리처드 2세가 왕실 기사 존 골레프레를 통해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보낸 비밀 편지를 압수한 뒤 리처드 2세에 대적하던 우드스톡의 토머스에게 보냈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리처드 2세의 총신이었다가 칼레로 피신한 서퍽 백작이자 잉글랜드 총리 마이클 드 라 폴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 1388년 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가 토머스 뷰챔프를 비롯한 청원파가 주도한 의회에서 사형에 처해진 뒤, 윌리엄은 브렘브레의 영지를 받았다.

1390년, 윌리엄은 펨브로크 가문의 재산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재판을 거친 끝에 펨브로크 가문 영지를 관리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후로 1390년대 중반까지 원고와 피고로서 일련의 소송에 휘말려 많은 재산을 상실했다. 1394년 형 토머스와 함께 보헤미아의 안나 왕비 장례식에 늦게 참석한 데다 빨리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가 모욕감을 느낀 리처드 2세에 의해 런던 탑에 수감된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변호해 그가 런던 탑에서 풀려나게 했다. 얼마 후엔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조앤 피츠앨런과 결혼했다. 1397년 형 토머스가 리처드 2세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체포되었을 때, 그는 형에게 등을 돌리고 리처드 2세를 지지했으며, 1398년 사형에 처해진 리처드 피츠앨런의 재산 일부를 받았다.

1399년 헨리 4세리처드 2세 타도를 지원했으며, 헨리 4세로부터 사우스 웨일즈의 판사이자 펨브로크 총독에 선임되었다.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즈의 독립을 꾀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나섰지만 여러번 패배했고 베르게베니에서 2번 포위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1401년 사우스 웨일즈 판사 직위에서 물러난 뒤, 형 토마스 사후 워릭 백작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은 조카 리처드 뷰챔프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헤레퍼드와 워릭셔, 우스터셔의 순회판사로 활동했다. 1411년 5월 8일 헤러퍼드에서 사망했고, 헤러퍼드 헤이스팅스의 도미니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외아들 리처드가 아버지의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편집]


  • 조앤 피츠앨런(1375 ~ 1435):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
    • 리처드 뷰챔프(1397 이전 ~ 1422): 1411년부터 제2대 베르게베니 남작, 1421년부터 초대 우스터 백작. 1422년 모 공방전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함.
    • 조앤 뷰챔프(1396 ~ 1430): 제4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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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35 ~ 1360, 1360년 4월 13일 샤르트르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우박을 맞고 사망.[2] ? ~ 1403, 제5대 클리포드 남작 로저 클리포드의 부인[3] ? ~ 1386, 제2대 스태포드 백작 휴 드 스태퍼드의 부인.[4] ? ~ 1383, 서머셋 남작 존 드 뷰챔프와 초혼, 기사 메튜 고네이와 재혼.[5] ? ~ ?, 드레이튼의 바셋 남작 랄프 드 바셋의 부인[6] ? ~ 1416, 제5대 스트레인지 남작 존 르 스트레인지와 초혼, 제2대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와 재혼. 윌리엄 사후 수녀가 됨.[7] ? ~ ?, 기 드 몽포르의 부인. 남편이 1261년에 사망한 후 수녀가 됨.[8] ? ~ ?, 토머스 우퍼드의 부인.[9] ? ~ ?, 월터 드 코크시의 부인[10] ? ~ ?, 쇼드햄 수도원의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