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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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劉靈
(? ~ 310)

전조의 인물. 사주 양평군 양평현 출신.


2. 생애[편집]


유령은 신분이 비천하고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생활했다. 그는 20여 세가 되었을 때, 고향 양평현(陽平縣)에서 돼지우리의 돼지를 사육하는 일을 얻어 생계로 하였는데, 달려오는 소를 제압할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달리는 말을 따라잡을 정도로 날랬다. 당대 사람들은 모두 이를 놀랍게 여겼으나, 유령의 비천한 신분 때문에 누구도 그를 천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에 유령은 항상 스스로 가슴을 치며

"하늘이시여, 천하에 난세는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라 한탄하였다.

영흥 2년(305년) 7월, 성도왕 사마영을 복권시킨다는 명목으로 공사번(公師藩)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령은 장군을 자칭하며 들고 일어나 공사번에게 호응하였다. 유령은 조(趙)와 위(魏) 지역을 휩쓸고 각 군과 현을 크게 약탈하고 다녔다.

영가 2년(308년) 5월, 진의 장수 왕찬(王讚)에게 패한 유령은 잔당을 거느리고, 마찬가지로 낙양의 진군에게 패하여 쫓기는 신세이던 왕미와 합류하였다. 이때 왕미가 유령에게 말했다.

"진나라의 병사는 강하여 이대로면 천하에 우리가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오. 나는 과거 한왕(漢王)이 낙양에서 인질 생활을 할 때 서로 깊은 교분을 나눈 적이 있어, 나는 지금 한왕에게 귀순하려 하는데 유령, 그대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오?"

어차피 따로 갈 곳도 없던 유령은 흔쾌히 왕미와 함께 평양(平陽)으로 사자를 보내 유연에게 투항했고, 유령은 평북장군에 임명되었다.

영봉 원년(308년) 11월, 유령이 석륵과 함께 병력 30,000명을 거느리고 위군(魏郡), 급군(汲郡), 돈구(頓丘)를 침공하니, 그 소문을 듣고 사주(司州)의 50여 개의 보루가 항복해왔다. 유령은 루주(壘主)에게 장군이나 도위 인수를 하사하고, 보루의 백성들 중 젊고 건강한 자 50,000여 명을 군사로 징발한 뒤, 늙고 약한 자들은 본래의 자리를 지켜 안락히 지내게 하였다.

영봉 2년(309년) 12월, 도호대장군·공양왕 유현(劉賢)이 광문제 유연의 명을 받들어 내황(内黄)에 주둔하자, 유령도 정북대장군에 임명되어 안북장군 조고(趙固), 평북장군 왕상(王桑)과 함께 내황에 군영을 세웠다. 이후 안북대장군, 기주(冀州)자사로 승진하여 광종(廣宗)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하서 2년(310년) 4월, 진의 유주(幽州)자사 왕준이 장수 기홍(祁弘)을 보내 광종의 유령을 쳤다. 유령은 기홍과 싸웠지만 패하고 참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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