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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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李思文

당나라의 관원으로 능연각훈신 중 한 사람인 영정무공 이세적의 아들이었다.


2. 생애[편집]


이사문의 아버지 이세적은 본래 성이 서씨(徐氏)였지만 당나라 건국에 공을 세워서 사성정책에 의해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의봉(儀鳳) 연간에 이사문은 검교농우제목감사(檢校隴右諸牧監使)로 임명되었다.

조로(調露) 원년(679년), 돌궐의 추장 아사나덕온부(阿史那德溫傅)가 당나라에 반기를 들자, 선우도호 소사업(蕭嗣業)과 이경가(李景嘉)가 출병했으나 도리어 아사나덕온부에게 패배하였다. 고종은 이에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定襄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여 아사나덕온부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태복소경(太僕少卿)이었던 이사문은 이때 배행검과 함께 출병했으며, 서군의 정무정, 동군의 이문간(李文暕)과 합류하여 배행검의 지휘를 받았다. 이후 이경업은 윤주자사(潤州刺史)로 전임되었다.

광택(光宅) 원년(684년), 조카인 이경업의 음모를 알고 사전에 조정에 사자를 보내 이경업의 반란 음모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후 이경업은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뜻이 맞는 이들을 모아 양주에서 반란을 이르켰다. 그리고 이경업이 설중장의 의견에 따라 윤주(潤州)를 공격할 때 자사였던 이사문은 이경업의 공격을 받았다.

이사문은 오랫동안 이경업의 공격을 방어해냈으나 결국 힘이 다해서 윤주성은 함락되었고 자신도 이경업에게 사로잡혔다. 이경업의 참모인 위사온이 이경업에게 이사문을 참수하여 조리를 돌리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경업은 이사문의 권고를 일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숙부께서는 무씨(武氏)에게 아첨했으니 마땅히 성을 무씨(武氏)로 고쳐야 한다.

叔黨於武氏, 宜改姓武.

자치통감


이사문은 결국 이경업에 의해 무씨가 되었다. 이경업은 이사문의 사마인 유연사(劉延嗣)가 항복하지 않으려고 하자 참수하려고 했으나 위사온의 구명으로 결국 유연사를 처형하지 않고 이사문과 함께 유폐하였다.

이후 이경업의 난이 종식되면서 이사문 또한 연좌되어 처형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이사문의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여 특별히 그를 연좌에서 면해주고 태복소경(太僕少卿)[1]으로 임명하였다. 측천무후는 이사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경업이 경의 성을 무씨(武氏)로 고쳤으니 짐이 지금 다시 그 성씨를 빼앗지 않겠다.

敬業改卿姓武, 朕今不復奪也.

자치통감


이후 측천무후로부터 무씨 성을 하사받아 무사문이 되었으며, 예부상서[2]로 임명되었고 이때 측천무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서(周書)》 무성편(武成篇)에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졌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곧 천명을 받을 조짐입니다.

신당서


측천무후는 무사문의 진언을 듣고 기뻐하여 연호를 수공(垂拱)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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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는 관명을 자주 바꾼 시절이어서 사복소경(司僕少卿)으로 불렸다.[2] 마찬가지로 관명을 바꿔서 춘관상서(春官尙書)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