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고려)

덤프버전 :

1. 개요
2. 생애
3. 여담


李深
(? ~ 1148)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2. 생애[편집]


이심이 매국 행위를 모의할 당시 당시 고려는 남송과 관계가 소원하고 과 가까웠다. 이심은 고려 사람 지지용[1], 남송 사람 장철(張喆)과 함께 남송에 나라를 팔아먹을 계획을 짠다. 남송의 태사 진회에게 서한과 고려지도를 전할 것을 송 상인 팽인(彭寅)에게 부탁했는데, 서한과 지도가 진회에게 보내지기도 전에 도강(都綱, 송나라 상인) 임대유의 손에 들어간다.

以爲若以伐金爲名, 假道高麗, 我爲內應, 則高麗可圖也.

만약에 금을 정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고려에 길을 빌리면, 우리들이 내응하여 곧 고려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심은 서한에서 동방흔(東方昕)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정체를 숨기려고도 했으나, 임대유가 고려에 이 서한을 알리고 조사가 진행되며 용의자가 좁혀진다. 의종 2년(1148) 10월, 장철, 이심, 지지용이 옥에 갇히고 국문을 받은 끝에 모두 죄를 자백했으니, 이심과 지지용은 옥사했으며 장철은 복주(伏誅)[2]됐다.


3. 여담[편집]


이심이 호응을 부탁한 재상 진회는 주화론자로 악비를 배척하고 금과 화친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런 진회가 금과의 군사적 충돌을 감수하고 고려에 파병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설령 남송에서 외교 관계가 냉랭한 고려에 병력을 보내겠다고 요구해도 고려가 흔쾌히 허락했을지, 고려가 파병에 수긍하더라도 남송이 고려로 돌릴 병력이 있기나 했을지 생각하면 이심 등의 계획은 진행조차 되지 않은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심은 유공식(柳公植)의 집에 고려 지도(高麗地圖)를 숨겨뒀다가 서한과 함께 송 상인에게 부치는데, 이심의 이름은 반란 모의보다는 이 '고려 지도'와 관련돼서 더 많이 언급된다. 고려는 이심 전에는 목종 5년(1102) 거란에 고려의 지리도를 바친 일이 있다. 이 지도는 제작 시기를 고려하면 목종대의 것과는 다르게 5도 양계로 행정구역이 바뀐 뒤의 지도일 것이며, 신편 한국사에서는 이들이 보낸 지도에는 지리지까지 포함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06:43:13에 나무위키 이심(고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지지용(智之用, ? ~ 1148)은 지녹연의 아들로 智之勇이라고도 한다.[2]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