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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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이태원
李台元


파일:소설가 이태원.jpg

출생
1942년 4월 26일[1]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면 읍내동 교동마을
(현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사망
2008년 4월 13일[2]
본관
경주 이씨
학력
대구칠곡초등학교 (졸업 / 42회)
경북중학교 (졸업 / 42회)
경북고등학교 (졸업 / 42회)
경력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공모 당선, 중앙문단 데뷔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국제 PEN클럽 협회 회원
소설가 협회 회원
민족문화 작가회의 회원
작품
- 「객사」, 「개국」, 「낙동강」, 「우리들의 봄 춘자, 「우리들의 죽음」, 「초야」, 「꿈꾸는 버러지들」, 「향가」, 「가로등」, 「0의 행진」, 「유아무야」, 「단양 아리랑」, 「밤길」, 「졸고 있는 말」, 「사명」, 「하늘이여 땅이여」 등 30여 편의 작품
- 장편 : 「객사」, 「개국」, 「낙동강」, 「0의 행진」, 「초야」, 「꿈꾸는 버러지들」, 「가로등」
- 중편 : 「유야무야」, 「우리들의 봄 춘자」, 「단양 아리랑」
- 단편 : 「밤길」, 「졸고 있는 말」, 「돌을 던져라」, 「사명」, 「하늘이여 땅이여」
- 인터넷 연재소설 : 「우리들의 죽음」, 「향가」 등 20여 편
- 신문연재 : 「개국」(1978년, 대구매일신문), 「낙동강」(1980년, 대구매일신문),
「객사」(2013년 1월 8일~ 2015년 8월 14일, 대구팔공신문),
「낙동강」(2015년 8월 18일 ~ 연재 중, 대구팔공신문)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목록



1. 개요[편집]


역사의 물줄기에 인간의 발을 담그는 작가.

송파문학 2008년 13호 中 소설가 오은주


대한민국소설가.


2. 생애[편집]


일제강점기 말이던 1942년 4월 26일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면 읍내동 교동(校洞) 부락(현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교동마을)에서 태어난 이태원은 1955년에 칠곡초등학교를 42회로 졸업하고, 1961년에 경북중·고등학교를 42회로 졸업하였다.

글재주가 뛰어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지방문학지에 응모한 단편소설이 당선돼 소설가로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장돌림이나 잡역부의 생활을 하며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차근차근 문학적인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1960년 4.19 혁명 때 가산을 모두 날리고 살기 위해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집안의 맏아들로서 생계 활동을 하였다.

그는 생계활동을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장돌림이나 잡역부의 생활을 하며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여가시간에는 문학창작활동을 이어나갔다.

1970년,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공모전에 장편소설 ‘객사(客舍)’를 응모하여 당선됨으로써 중앙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1975년을 기점으로 인권탄압 시대에 작가들이 항거하면서 만든 자유실천문인협회에 가입해 고은, 이호철, 이문구, 박태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노동 작가에서 역사작가로 변신한 그는 1978년 대하소설 ‘개국(開國)’을 대구매일신문에 연재했고, 1980년대에는 대하소설 ‘낙동강’을 대구매일신문에 연재하는 등 목숨보다 더 아끼던 수십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후 2008년 3월 8일 67세로 삶을 마감하였다.[3]


3. 기타[편집]


  • 아버지가 전매청에 다녀 남부럽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늘 1~2등을 놓치지 않은 우등생이었다.

  • 독서광이었다.

  • 1969년에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십 편의 습작을 써 공모전에 응모했으나 번번이 탈락하기도 했다.

  • 1970년[4]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공모전 장편소설 객사(客舍)가 당선되며 화려하게 중앙 문단에 진출했다.[5]

  • 인권탄압 시대인 1975년을 기점으로 민주화와 인권 향상에 대한 문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유실천문인협회에 가입했다.[6]

  • 노동작가에서 역사작가로 변신한 그는 객사, 낙동강, 그 외에 소설에서도 작품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핍박받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민초를 등장시켜 세상의 부조리에 짓눌리고 그에 맞서는 이야기로 엮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지도 빈한하지도 않은,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문단에서 좋은 작가로서 자리를 조용히 매김하며 세상을 살아갔다.

  • 객사(客舍)는 KBS-TV 3.1절 특집, MBC-TV 광복절 특집, TBC-TV[7]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되었다. 1979년에는 국립극단이 3.1절 60주년 기념 연극으로 서울, 부산, 대구 등 주요 도시에 순회공연하였다.[8]

  • 대구에서 작품 객사(客舍)가 국립극단 3.1절 60주년 기념 연극으로 대구시민회관에서 공연됐다.[9][10]

  •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 '머릿속과 가슴 속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객지의 곤궁한 삶에 대한 희한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집안의 맏아들로서 책무도 다하고, 이 민족의 구성원으로서도 제 값을 다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내 실생활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만은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욕망이 생겨났다.”고 말했다.[11]




4. 작품목록[편집]


  • 객사/동아일보/1970

  • 객사/한길사/1978

  • 초야/태창문화사/1982


  • 꿈꾸는 버러지들/민문고/1992

  • 가로등/민문고/1992

  • 낙동강/영웅/1993

  • 우리들의 봄 춘자/부산경제신문/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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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3월 12일.[2] 음력 3월 8일[3] 글 : 서정호(徐正호) <문인, 칠곡초교 40회>[4] 당해 28세[5] 동아일보 1970년 12월 28일자 석간 5면 문화지에 당선관련 신문기사가 실렸다.[6] 고은, 이호철, 이문구, 박태순, 황석영 등 한국문단의 기라성 같은 소설가와 함께 활동했다.[7] 현 KBS-2TV[8] 국립극단 제 90회 공연[9] 문단 사상 초유로 국립극단과 세 TV 방송국에서 특집극으로 방영된 유일한 초대형 작품[10] 1979년 3월 15일 ~ 16일 오후 7:30분 대구시민회관에서 국립극단 공연[11] 송파문학 인터뷰 中 소설가 이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