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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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관직 Magistratus Imperii Romani
(명예로운 경력 Cursus Hon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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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Imperator

임페라토르
Imperator Caesar Augustus

고위 관직
Magistratus

독재관
Dictator

기병장관
magister equitum

감찰관
Censor

집정관
Consul

법무관
Praetor

수석 조영관
Aedilis Curulis
재무관
Quaestor
트리부누스 밀리툼
Tribunus Militum
평민 관직
Magistratus Plebis

호민관
Tribunus Plebis

평민 조영관
Aedilis Plebis
속주 총독
Rector Provinciae

원로원 속주 총독\A]
Proconsul
황제 속주 총독
Legatus Augusti pro Praetor
황제령 이집트 행정 장관
Praefectus Aegypti

황제 속주 행정관
Procurator
원로원 속주 총독\B]
Proconsul









라틴어
Aedile
1. 개요
2. 기원
3. 선출과 역할
4. 변질과 사멸



1. 개요[편집]


고대 로마의 관직. 안찰관으로도 번역된다. 로마시의 곡물과 물 공급을 감독하고 시민들에게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 등 각종 오락과 축제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


2. 기원[편집]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조영관은 기원전 494년 호민관이 탄생했을 때 함께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본래 평민들이 유일하게 거점으로 삼은 사원인 케레스 신전을 관리하던 관료들로, 이 시기부터 호민관의 보조자로서 파트리키의 횡포로부터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또한 평민들의 기록을 케레스 신전에 보관하고 관리했으며, 시장이나 공공 장소에서 평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하지만 평민의 대표로서의 권위와 명예는 오직 호민관에게만 주어졌고 이들은 보조 역할만 수행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별로 각광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로마가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을 확대하면서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고 로마시의 규모가 갈수록 팽창하면서, 이들의 중요성은 한층 커졌다. 본래 로마의 행정을 도맡아야 할 집정관들이 외적과 상대하느라 손을 못 대는 일이 허다했고, 나중에는 6명 내지 8명으로 구성된 집정 무관이 설립되어 여러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다보니 도시를 관리하고 시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국민의 화합을 도모하는 임무를 맡은 관직을 따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임기 내내 로마 시내에서 평민들과 함께 지내며 여러 분쟁을 해결하던 조영관들이 이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후 조영관들은 로마의 도로를 유지하고, 곡물과 물 공급을 감독했으며, 파트리키가 도맡은 고위 행정관들을 대신해 치안 업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438년부터는 외국의 비밀 종교집단이 로마에 들어와서 '로마인의 고결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임무도 맡았다. 하지만 그들이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많은 연례 축제를 주관하고 대중을 위한 경기 개최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평민들은 이들이 주관한 행사를 통해 로마인으로서 자부심을 고취하고 서로 화합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로마를 수호하는 신들에 대한 신앙심을 고취했다. 한편, 그들은 감찰관이 인구 조사 등 여러 임무 중 하나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대신 그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러나 집정관, 집정 무관, 호민관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직위로 취급받는데 비해 수십만 로마 시민들의 복지와 오락을 책임져야 하는 막대한 부담을 짊어져야 하니, 평민 조영관들의 부담은 갈수록 가중되었다. 급기야 기원전 367년 평민이 집정관 한 자리를 의무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리키니우스-섹스투스 법이 반포되면서 귀족과 평민이 오랜만에 화합한 것을 기념해 통상적인 로마 축제에 하루가 추가되자, 조영관들은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며 축제 주관을 거부했다. 이에 귀족들은 자신들이 그 비용을 마련해줄 테니 자기들 선에서 조영관을 2명 추가하게 해달라고 제안했고, 평민 조영관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귀족만이 맡는 조영관이 추가되면서, 조영관의 최종 형태가 완성되었다.


3. 선출과 역할[편집]


기원전 367년 이래, 평민 조영관(Plebeian aediles)과 수석 조영관(Curule aediles)은 로마 시민이 속한 35개 부족을 기반으로 조직된 부족 선거(comitia populi tributa)에서 선출되었다. 본래 27세 이상의 성인이 출마할 수 있었지만, 기원전 180년 호민관 루키우스 빌리우스 아날리스에 의해 반포된 빌리아 아날리스 법(Lex Villia Annalis)에 따라 36세 이상만이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조영관은 7월에 선출되어 1월 1일에 취임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법률에 대하여(De Legibus)>에서 조영관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로마시의 미관과 복지 관리: 하수도 및 수로를 수리하고 거리를 청소하며 도로를 포장하고, 화재를 예방하고 낡은 건물을 보수하며 목욕탕 및 선술집을 감독한다. 또한 감찰관이 반포한 사치 금지법을 집행하고, 창녀, 도박꾼, 비밀 종교 조직 등 미풍양속을 해치는 이들을 단속하고 고리대금업자들을 처벌했다.

2. 물품 관리: 로마시로 공급되는 물품의 품질을 감독하고 시중에 적용되는 도량형의 정확성을 조사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을 구입해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3. 경기 관리: 로마를 수호하는 신들을 기리기 위한 축제를 주관하거나 전쟁의 승리 등 국가적으로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또는 전 국민이 추앙하는 인물의 장례식이 열릴 때 등 여러 사유로 열리는 경기를 조직 및 감독했다. 평민 조영관들은 평민만의 경기를 독자적으로 주관할 수 있었지만, 전체 계급이 함께 즐기는 대규모 행사는 오직 수석 조영관 만이 맡을 수 있었고, 평민 조영관들은 보조하는 역할만 맡았다.



4. 변질과 사멸[편집]


초기에 호민관의 보조원으로서 자질구레한 일이나 하는 하찮은 관직으로 취급되었던 조영관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명예로운 경력'(쿠르수스 호노룸)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조영관은 로마 시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망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축제와 오락을 갈망하는 평민들이 만족할 만한 대규모 행사와 경기를 거행한다면,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 더 높은 관직에 오를 가능성이 지극히 높아졌다. 이 때문에, 조영관은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직으로 취급되었고, 조영관 선거는 집정관 선거만큼이나 치열했다.

그러다보니, 본래 로마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던 조영관은 야심을 품은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조영관들은 검투사 및 서커스 경기를 가능한 한 크게 거행하고 곡물을 국법에 정해진 것보다 훨씬 싸게 구매해서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재원이 소모되었기에, 조영관 임기를 수행한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막대한 빚더미에 짓눌렸다. 이것을 발판 삼아 법무관, 집정관에 선임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경쟁에서 밀려나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될 경우엔 파멸적인 미래가 기다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65년 조영관에 선임된 뒤 유피테르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축하 행사를 조직했다. 그는 포로 로마노와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수려한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고 공개 연회, 서커스, 정교한 연극 무대, 화려한 검투사 대회를 열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주관한 검투사 대회에 출전한 검투사는 320명에 달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너무 많은 검투사들을 모으자 그의 정적들은 로마에 머물 수 있는 검투사의 수를 제한하는 법안을 급히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렇듯 거대한 행사를 개최하느라 막대한 빚을 짊어져야 했지만, 카이사르는 조영관 경력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조영관을 거쳐 집정관에 도전했지만 3번 연속 낙선해 막대한 빚에 짓눌리자 당국을 뒤엎고 권력을 쟁탈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파멸했다.

그 후 카이사르의 내전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케레알리스(cereales)'라고 불리는 2명의 평민 조영관을 추가해, 축제와 경기 주관에만 치우쳐버린 기존 조영관들을 대신해 곡물 공급만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된 후, 조영관은 쇠퇴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이 본래 맡았던 경기 관리와 미풍양속을 위한 퇴폐 풍조 단속은 법무관에게 이전되었고, 도시의 미관과 물 공급 책임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로마시 장관)의 역할이 되었다. 여기에 케레스 신전 관리 등 조영관들이 수행하던 다양한 종교적 의무에 대한 권한은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 넘어갔다.

이렇듯 수많은 권한이 넘어가고 오직 목욕탕 관리, 매음굴 단속, 매춘부 등록 같은 자질구레한 것만 남자, 아무도 이 무력한 직책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전임 호민관과 재무관을 무작위로 선택해 조영관을 강제로 맡겼다. 조영관은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모종의 시기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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