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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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ohn_Byng.jpg

1. 개요
2. 일생
2.1. 해군 경력
2.2. 미노르카 해전과 최후


1. 개요[편집]


영국의 해군 제독. 7년 전쟁의 첫번째 전투인 미노르카 해전에서 패한 뒤 총살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2. 일생[편집]



2.1. 해군 경력[편집]


존 빙은 1704년 10월 29일 잉글랜드 베드포드셔주 사우스힐에서 트린톤 자작 조지 빙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18년 3월 13세의 나이로 영국 해군에 입대했고 같은 해 8월 11일 콰드러플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시칠리아에서 복무하며 파사로 곶 해전에 참가했다. 1723년, 존 빙은 중위로 승진했고 1727년에는 HMS 지브롤터 호의 대위로 승진했다. 1742년, 존 빙은 뉴펀들랜드 식민지 해군 준장이 되었고 1745년에는 소장이 되었으며, 1745년과 1746년에는 리스에서 해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747년, 존 빙은 지중해 함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751년 로체스터 자치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이 의원직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1754년, 존 빙은 허트포드셔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 위치한 브로담 공험 저택의 건축을 위탁했다. 이렇듯 그는 순조로운 경력을 이어갔으나 1756년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사건이 벌어진다.


2.2. 미노르카 해전과 최후[편집]


1756년, 영국 해군부는 프랑스 해군이 미노르카 섬을 공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영국 해군부는 3월 8일 지브롤터 해협에 있던 존 빙을 제독으로 승진시키고 3월 11일까지 함대를 준비하여 미노르카 섬으로 출격하는 프랑스 해군을 제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전열함 10척은 상태가 엉망이어서 당장에 수리가 필요했다. 이에 존 빙은 비스케 해협과 만에 있는 27척의 배 중 일부라도 동원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영국 해군성은 존 빙이 이 선박을 이용하는 건 물론이고 이 선박들에서 일하는 선원들을 데려가는 것도 거부하고 주어진 전열함 10척의 수리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상태가 안 좋은 10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적을 막으러 출항해야 했다.

이후 1756년 5월 20일에 벌어진 미노르카 해전에서, 존 빙은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직 배 한 척도 가라앉지 않긴 했지만 더 싸워봐야 전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전쟁 협의회를 소집해 지브롤터로 철수하자고 제안했고 함장 전원이 동의를 표했다. 결국 존 빙의 함대는 지브롤터로 철수했고 미노르카 섬 요새 수비대는 6월 28일에 항복했다. 이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분노했고 영국 해군부는 그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을 들어 그를 체포하게 했다. 결국 존 빙은 7월 26일에 전격 체포되어 8월 19일 그리니치로 보내졌고 12월 23일 포츠머스로 옮겨졌다.

12월 27일, 존 빙의 재판은 포츠머스 항구에 있는 성 조지 호에서 개최되었다. 당초 존 빙의 무능과 무책임을 성토하던 국민들은 점차 존 빙이 처했던 진짜 상황을 알게 되자 해군부가 모든 책임을 존 빙에게 떠넘겼다고 비난하며 존 빙을 동정했고, 심지어는 당시 미노르카 해전의 프랑스 함대 제독도 존 빙 제독은 패전의 책임이 없다고 변호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많은 해군 인사들은 국왕의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조지 2세는 무슨 생각인지 확실한 증인과 증거가 있는대도 무시하고 국법대로 집행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존 빙은 1757년 1월 27일 총살형 판결을 받은 뒤 5월 14일 전열함 모나크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향년 53세. 그의 시신은 사우스힐에 매장되었다. 사실상 해군성에게 희생양으로 취급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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