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천시사열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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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수문상친림관역도.jpg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파일:영화당친림사선도.jpg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

파일:모화관친림시재도.jpg
모화관친림시재도(慕華館親臨試才圖)

파일:연융대사연도.jpg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濬川試射閱武圖. 조선 영조 36년인 1760년에 왕의 명으로 청계천 준천(濬川)을 완성한 후 그 과정과 포상 행사를 그림으로 남긴 4첩의 채색 기록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1760년 2월 23일 영조의 명으로 청계천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비 사업을 시작하여 4월 15일에 공사를 완성한 후 이를 그린 기록화이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 모화관친림시재도(慕華館親臨試才圖),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청계천은 서울로 밀려드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출하는 폐기물이 청계천으로 몰리고 백성들이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가면서 청계천 내부에 흙들이 계속 쌓이는 등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이러다 큰 비라도 내린다면 서울 전 지역에 큰 홍수 피해를 일어날 것이 확실하였기에 국가에서 청계천 공사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전까지 청계천은 매년 조금만 가 와도 주변이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으나 이때 꾸불꾸불하던 하천을 직선화할 정도로 조직화되고 전문화된 공사를 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이후 100여년 간은 홍수 피해가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이 있고, 실제로도 이후 청계천은 홍수 피해가 거의 없다.

이 공사 당시 도성의 방민(坊民), 시전상인,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 모군(募軍) 등 백성 약 21만 5천여 명을 동원하여 57일간 공사를 진행하였고, 공사에 참여한 인원들에게 품삯을 지급했다.

당시 준천사의 사업 내용을 모두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과 함께 1760년 청계천 공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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