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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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항일빨치산 1세대 출신의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17년 12월 9일에 만주 길림성 연길현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았다. 1924년에 유격대 공작원들이 자주 출몰하는 왕청으로 이사하였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나중에 항일 유격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1936년 3월, 왕청현에서 빨치산에 가담하였다. 특이하게도 해방 이후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잔류하여 중국 경비대에서 복무하였다.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소련군의 만주진공 직전[1] 만주에 지하공작원으로 파견되어 공작금으로 땅과 집을 사고 지주로 행세하면서 일본군으로부터 극비 자료를 빼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국공내전에 참전하기 위해 중국에 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지경수는 소작농들에게 자발적으로 땅을 나누어주었으나 국부군이 진주하자 국부군의 자료를 빼내기 위해 다시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준 땅을 돌려받아 지주행세를 하였고, 인민해방군이 만주를 접수한 이후 반동파로 몰려서 맞아죽을 뻔 했으나 심판장에 항일 빨치산들이 나가 그가 지하공작을 하던 항일유격대원이라고 보증해준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이 그를 북한으로 소환함에 따라 1954년 8월에야 귀국하여 평안북도 내무국 과원이 되었다. 지여경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을 평양에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당국에서 신의주로 입국했으면 신의주에서 일할 것이지 왜 일을 귀찮게 만드냐고 면박을 주어 벽동군 내무서장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1956년 9월, 창성군 현지지도를 나간 김일성을 만나게 되어 내무성 국장으로 파격승진하였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오백룡을 데리고 현지지도를 갔던 김일성이 지경수를 보고 저거 지경수 아니냐고 물었으나, 오백룡은 만약 지경수가 맞다면 아는 척을 했을건데 하지 않은 것을 봐선 아닌 듯 하다고 대답했지만, 김일성이 다시 알아보라고 지시하여 확인해본 결과 지경수가 맞았고, 그렇게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 군사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1965년부터 호위사령부에서 일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 선전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중요한 직책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를 몸 가까이 모시고 사업"하였다고 쓰고 있다. 1970년 10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보선되었다고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7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73년 4월에 호위사령부 부사령관에 이르러 중장 계급을 단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다가 1976년 8월 25일, 59세를 일기로 병으로 사망했다. 로동신문은 명의 없는 부고를 발표, "지경수동지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수령님을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호보위하며 그이께서 맡겨주신 혁명임무를 무조건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였다. 실로 지경수동지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어렵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일편단심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공화국북반부에서 사회주의건설의 촉진을 위하여서와 인민군대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이후 혁명렬사릉으로 이장되어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반신상이 제막되었다.

여러 문헌에서 그를 김정일 후계구도에 시비걸다가 숙청당한 '당검열위원장 지경수'라고 쓰고 있는데 그가 당검열위원장을 지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1976년도 남한 보도에서는 일관적으로 그를 호위사령관, 경호총책으로 쓰고 있다. 다만 김정일이 그를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은 그때도 돌았다. 그리고 김정일에게 개기다가 죽은 것 치고는 죽자마자 부고도 발표되었고 현재도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있는 등 뭔가 기묘한 점이 많다. 다만 부고에 어떤 명의도 없고 대의원에 선출된 그가 중간에 대의원에서 소환되었는지 부고에서 대의원이라는 언급도 없는 등 석연찮은 점도 있긴 하다. 박병엽은 그가 김동규가 김정일을 비판했을때 지병학과 함께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가 김동규 파로 몰려서 추궁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정작 김동규 본인은 숙청되지 않고 1977년 후반기까지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이를 보면 1976년 후반 ~ 1977년 초반에 지병학, 지경수 등을 겨냥한 숙청이 있었는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참고로 76년도에 떠돌던 기사에 따르면 그가 사망한 이후 호위사령관은 전문섭이 이었다고 한다. 근데 북한에서 발표한 전문섭 약력에는 전문섭이 1963년 12월부터 사회안전성 부상 겸 호위사령관의 전신인 호위총국장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동시기 남한에서도 적어도 1964년부터는 전문섭이 호위총국장임을 알고 있었다. 즉 '호위사령관' 지경수가 죽어서 전문섭이 이었다는 서술 역시 지경수가 당검열위원장이었다는 서술보다는 조금 개연성이 있지만 역시나 신빙성이 부족한 서술이다. 또 정작 1980년 기사에서는 호위총국 부국장이었다고 좀 더 정확하게 쓰고 있다.

2022년, 지경수 소개편집물이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3. 여담[편집]


아들 지광호와 딸 지여경이 있는데, 2022년 현재에도 살아 있어 소개편집물에 등장하고 있다.

4. 참고문헌[편집]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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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히 김일성은 이게 자신의 한반도 해방 최후공세라고 구라를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