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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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鄙
? ~ 기원전 257년

1. 소개
2. 생애



1. 소개[편집]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위(魏)나라의 장수.


2. 생애[편집]


마릉 전투에서 방연을 비롯한 위나라의 고위 장수들과 수많은 군사들을 잃고 군사력이 별볼일 없어진 위나라에서 신릉군과 더불어서 그나마 좀 이름있는 위나라 장군이었다.

사기. 맹산군이 5국 연합군으로 진나라를 공격을 할 때 쯤에 진비가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위나라에서는 진비는 상당히 신뢰받는 장군이었다. 신릉군이 병부를 훔쳐서 조나라를 구할 적에 전방에 군을 이끌고 대기하던 진비에게서 군사를 넘겨받아야 했는데, 그를 죽일 수 밖에 없게 됨을 한탄했다고 한다. 실제로 진비는 병부를 맞추고도 명분 없이 수레 한 대로 군사 지휘권을 넘겨 받으려 한 신릉군을 의심했고, 결국 신릉군 옆에 있던 주해가 소매 속에 숨겼던 40근짜리 철퇴를 꺼내 쳐죽였다.[1]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신릉군이 그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진비의 일족과 그의 식객들이 훗날에 신릉군을 참소해서 신릉군을 몰락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그 일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하고 만다.

[1] 상당히 여파가 큰 죽음으로, 위나라 왕은 유능한 장군을 잃게 됐고, 신릉군은 왕을 속이고 장군을 죽인 죄로 한 동안에 위나라에 못 돌아가게 됐으며, 진나라는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한 것 + 전국사군자 신릉군이 위나라에 없으므로 위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신릉군 열전에는 신릉군이 도피한 10년간의 위나라에 대해 별다른 내용이 없으나, 사실상 이미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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