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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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스토리
3. 비평 및 흥행
4. 등장인물
5. 여담


1. 개요[편집]





1999년 2월 13일에 개봉한 한국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B29엔터프라이즈. 감독은 김강덕, 김현석, 김혁, 박승현. 각본에 김혁. 각색에 김성욱. 이 작품에 참여했던 제작진은 그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서 선구적 위치에서 활동해 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빼꼼을 제작한 RG 스튜디오의 김강덕 대표 등이 있다)

2. 스토리[편집]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미래 지구는 과학기술의 탁월한 진보로 기아와 질병등의 일반적인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정신적 혼돈속에 빠져있다.

이때를 틈타 '서유기'의 삼장법사에 의해 세계 여덟개의 방위점에 봉인해 두었던 전설속 천룡팔부중 여덟 요괴는 그 봉인을 풀고 지구 곳곳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에 맞서 지구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인물 R과 함께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을 토대로 4기의 철인사천왕을 만든다. 그리고 이들을 조종할 유일한 인물들로 네 소년 건, 루이, 쟝, 스파이크를 찾아낸다. 정체불명의 힘에 의한 컴퓨터시스템의 오작동으로 이들은 훈련도중 큰 부상을 당한다. 여덟요괴의 계략인줄 모르는 건 일행은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며 오해와 갈등속에 누명을 쓴 스파이크는 요괴에 홀로 대항하는 독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서로간의 오해와 갈등이 더욱 커지면서 철인사천왕에 탑승해서도 제대로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건과 그의 친구들. 결국 요괴에게 당하게 되고 요괴들은 점점 세력을 넓혀 전세계 전산망을 장악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모든 대륙간 탄도탄과 전략 핵미사일로 철인사천왕 기지를 완전히 파괴하려고 하는데...

출처 - Daum 영화



3. 비평 및 흥행[편집]


한국 최초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표방하고 나선 작품인데, 그래픽이 너무 저질이라 믿기지 않겠지만 이래 봬도 카툰 렌더링 애니메이션이다. 본작이 1998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도전이었다. 카툰 렌더링이 2000~2001년 사이에 드림캐스트, 플레이스테이션 2를 통해 많이 알려진 걸 생각하면 당시 저 기술을 쓰는데 돈을 왕창 썼다고 봐야 한다. 참고로 스폰서 중에는 집까지 팔아서 자금을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의욕이 넘쳐서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며 유명 시나리오 작가에게 각본을 부탁하기도 했는데, 유치한 만화 각본 같은 건 쓰지 않겠다라는 답변을 받자 아예 감독이 직접 각본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후 상영회에 저 각본가도 초대를 받았는데, 시나리오가 개판이다 라는 멋진 감상평을 날려 감독과 멱살잡고 싸웠다고 한다(...).

사실 시나리오에 결함이 많았던 건 사실인데, 주인공들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싸움에 배경과 진실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으며, 작중 등장한 8마리의 요괴 중에서 주인공들과 싸운 요괴는 달랑 2마리다. 리더 격인 요괴는 연기 비슷한 모습일 뿐이었으며, 나머지 5마리는 아예 나오질 못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설레발이 많았지만, 상술한 시나리오 문제가 너무 컸으며 이를 상쇄할 만큼 영상미가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다. 결국 흥행은 완전히 실패했다.[2] 제작 발표회 당시 기사를 보면 극장판 외에도 해외 수출 및 완구 발매, TV 시리즈 제작까지 계획했던 것 같지만 망해버리는 바람에 뭐...

상영 당시 국내 애니메이션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어, 제작과정과 애니메이션 제작의 힘든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가지로 현실적이고 고달픈 비화를 그대로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개봉 당일 현장에서 상영관에 5명도 없는 것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4. 등장인물[편집]




5. 여담[편집]


이 작품은 원래 극장판 상영이후 1999년 10월에 SBS에서 총26부작으로 제작될 예정이였으나, 당연히 흥행 실패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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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를 감안하면 이게 정말 무리수였던 게, 이 시기 인간의 생체적 질감을 제대로 3D 그래픽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과 하드웨어를 갖춘 기업은 픽사루카스필름 밖에 없었다. 5년 후, 일본에서 애플시드 극장판이 카툰 렌더링 기법을 썼는데 5년 동안 발전한 기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도 어색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체의 카툰렌더링 표현은 어려운 작업이었다.[2] 최종 관객은 서울 기준 개봉관인 국도극장에서 9,315명, 집계가 되지 않은 또다른 개봉관인 양재동의 교원회관에서 약 2만명이 관람하였고, 당시 서울과 지방의 애니메이션 관객 비율이 1대 5 정도로 보던 관행을 놓고 볼때 전국 관객은 18만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