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나

아아, 또 곰팡이가 피어 있네.
그린 지 10일밖에 안 됐는데
방부제가 듣지 않았던 건가.
다음엔 좀 더 방에 불을 때 두어야지....

이 나라 녀석들이 '저주'라고 부르는 이 장마는
나와는 상성이 최악인 저주다.
그도 그럴 것이 안료도, 그림 재료도
전부 다 습기가 차서 못 쓰게 되어 버린다.

모처럼 그린 제자의 초상화였지만
이건 또 다시 그려야 한다.

하아... 미안해. 이제 도구가 없어.
너와는 당분간 또 만날 수 없게 되겠네.

곰팡이가 피어버린 제자를 놔두고
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가본 것까지는 좋았지
만, 눈앞에 있는 것은 수몰된 폐허와 비구름뿐....
정말이지 재미없는 풍경이다.

저주 같은 불합리한 것이 없었다면,
지금도 이 마을은 활기 넘치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을까.

...내 제자도, 친구도 아직
내 옆에서 웃고 있었을까.

동료 화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저주의 괴물에 쫓기듯 이사를 갔다.

더 좋은 곳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휴...
어디 보자, 뭔가 그림 재료로 쓸만한 건 없으려
나.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마녀라는 것이다.
골칫거리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폐허에 남았다.
이 마을 말고 나를 받아들여 줄 것 같은 곳은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람이 떠난 건물 안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내 소꿉친구려나.
...아아, 마을을 나갈 때
짐승에게 당해버린 건가.

내 제자도 그렇고
운이 없는 녀석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림 재료도 안료도 없는데
그려야 되는 것이 늘어나 버렸다.

뭐... 그 녀석 자신을 사용하면 돼.
색깔은 단색이 돼버리겠지만, 참아줘.

이곳에는 윤리도 도덕도 없다.
있는 것은 고작해야
나의 자기만족과 감상 정도다.

적색, 홍색, 주홍색에 심홍색. 그리고 흰색.
그 녀석의 색깔은 이것이 전부다.
농담과 음영으로 기억 속의 모습을 쫓듯
캔버스를 채워간다.

한정된 양의 그림 재료.
다시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단판 승부의 초상화.
그 녀석의 색깔로 그 녀석의 삶을 새긴다.
애도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서다.

귀에 익어버린 빗소리 속에서
나는 그저 붓을 놀렸다.

며칠 동안 꼬박 그린 그녀석의 초상화는
마침 물감을 다 써버리는 것과동시에
간신히 완성했다.

...내가 죽으면
이 그림도 분명 썩어 없어지겠지.

뭐, 난 그걸로 됐어. 상관없어.

하지만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
사람이 분명히 살았다는 것....
그 모든 게 잊혀 버린다는 건
좀 슬프네.

이 비가 그치면,
다음엔 더 큰 그림을 그려볼까.

...대작이라는 건 시간이 걸리는 거라서 말이지.

오랜만에 해를 보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숨 돌리기 위해 너.
그래. 이곳의 영주님을 주제로 한 장 그리기로 했
다. 어? 아아, 괜찮아.
덕분에 지금은 그림 재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으니까.

그리고 넌
어차피 어떤 물감으로 칠해도
너의 색이 돼버려.

...참 난해한 소재야.

하지만 그래서 더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오랜만에, 살아있는 동안에 말이지.
뭐야, 천재 화가 체르나님이
열의를 갖고 그려준다는데.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