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섭(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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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기섭.jpg
성명
최기섭(崔琪燮)

농은(農隱)
본관
해주 최씨[1]
생몰
1912년 10월 16일 ~ 2002년 7월 7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2]
사망지
전라남도 영암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포장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 상세[편집]


최기섭은 1912년 10월 16일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서 아버지 최병준(崔秉俊)과 어머니 전주 최씨 최창윤(崔昌潤)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7년 3월 영암군 구림공립보통학교(鳩林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2년 8월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전남운동협의회 영암군지부에서 활동했으며 구림야학단(鳩林夜學團)을 조직해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전남운동협의회 영암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전남운동협의회가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야학(夜學)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이 때 전위조직을 건설할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으나, 시기가 성숙치 못했으므로 우선은 대중운동에 의한 준비활동에 힘을 쏟기로 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1933년 8월에 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발전적으로 개편되었고, 해남을 비롯하여 완도·장흥·강진·영암 등 5개 군에 지부조직이 설치되었다. 이 때 이들의 조직 방침은 ‘농민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 마을에 3명 내지 5명으로써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각각 결성하고,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운동은 1933년 여름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으로 조직원 윤가현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중단되었으며, 1934년 2월에는 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가 발각되었다. 이 일로 체포된 최기섭은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암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2002년 7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8월 15일 최기섭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전한공파 32세.[2] 해주 최씨 집성촌이다. 조선시대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최경창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