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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麤群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고구려의 대란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구려 후기의 인물이자 외척.

세군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만 기록이 나오며, 추군(麤群)은 실제 인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외의 기록이 없어 실제 인명은 알 수 없다.

2. 고구려의 대란[편집]


안원왕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과 중부인 그리고 소부인이었다. 추군은 딸인 중부인을 안원왕에게 시집보내서 외손자인 양원왕을 얻게 되었고, 태자 책봉 역시 받았다.

하지만 세군의 딸 소부인 역시 왕자를 낳았고, 545년 안원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그해 12월 20일, 궁문 앞에서 추군과 세군의 무리가 차기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세군은 추군에게 패배했지만 군사들을 해산하지 않았고, 추군은 세군의 자손들을 죽였다. 추군과 세군의 싸움에서 2,000여명이 사망했다고 하며[1] 안원왕도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 이듬해 정월(546년 1월?)에 양원왕이 즉위했다.

이 해(545년)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高麗國)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戊戌, 24일)에 코마노쿠니(狛國, 박국)[2]

누타노스오리코케(鵠香岡上王, 곡향상강왕)[3][4]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해(546년)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려(高麗)가 정월 병오에 쿠노오리쿠쿠(中夫人,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코쿠오리코케(狛王, 박왕)에게는 세 오리쿠쿠(夫人, 부인)[5]

가 있었는데 마카리오리쿠쿠(正夫人, 정부인)는 아들이 없었다. 쿠노오리쿠쿠가 마카리요모(世子, 세자)를 낳았는데 그쪽의 외척이 추군(麤群)이었다. 시소오리쿠쿠(小夫人,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쪽의 외척이 세군(細群)이었다. 코쿠오리코케의 질병이 심해지자 추군과 세군이 각각 쿠노오리쿠쿠와 시소오리쿠쿠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세군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3. 기타[편집]


외손자인 양원왕을 재위에 올리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양원왕의 치세는 순탄치 못했다(...) 내부적으로 승려 혜량이나 왕족 장배왕이 각각 신라와 일본으로 망명했고, 557년에는 간주리가 환도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대외적으로도 죽령 이서의 땅을 551년 백제와 신라에게 상실해버렸다. 물론 전부 양원왕이나 추군의 탓은 아니지만 불안한 시국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밖에 없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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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세군 측에서 20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2]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駒(구)로 표기해놓고 코마(こま)라고 훈독하였다. 이는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삼국은 서로를 오랑캐, 짐승 등 나쁜 의미로 부르곤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를 '코라이(こうらい)'라고 음독하지만, '코마신사(高麗神社)', '코마씨(高麗氏)'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부문에서는 관습적으로 '코마'라고 훈독하기도 한다.[3] 여기서 '곡향'은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곡림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던 사라쌍수가 있는 쿠시나가르의 숲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던 날 숲의 나무들이 부처의 열반을 슬퍼하여 그만 하얗게 말라버렸고, 그 모습이 마치 고니떼와 같았다는 데서 고니 곡 자를 써서 '곡림'이라고 부른 것이다.[4] 이를 근거로 추군은 국내성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귀족 불교 세력, 세군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진 불교 세력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6세기 이후 국왕 중심적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진 귀족 불교 세력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5] 백제에서 왕후를 가리키던 말인 '어륙(於陸)'과 동계통의 단어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