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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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러시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7월 23일 브란덴부르크의 카이 부근에서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맞붙은 전투. 러시아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의 합세를 막으려던 프로이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2. 배경[편집]


1759년 4월 말, 러시아의 대군이 브란덴부르크를 향한 진군을 개시했다. 당시 그들을 막아야할 동프로이센군 지휘관 크리스토프 추 도나쉴로디엔은 병력이 18,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그해 6월 초 표트르 살티코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도나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포젠에 입성했다. 살티코프는 크로센으로 진군해 브란덴부르크에 진입하려 했다. 러시아군은 7월 17일까지 오데르 강에서 몇 km 떨어진 쥴리차우에 도달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도나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해 그를 경질하고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 장군 휘하 분견대를 현지에 파견해 적이 브란덴부르크로 진입하는 걸 저지하게 했다.

7월 22일 현장에 도착한 베델은 다음날 새벽 러시아군을 정찰했다. 당시 그가 있는 지역은 숲이 우거져 있어서 러시아군 전체를 살펴보지 못하고 단지 일부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제한된 시야를 통해 확인한 러시아군을 전체 러시아군의 좌익이라고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후위대였다. 그는 러시아군은 당장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영으로 돌아가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규합하려 했다. 그런데 오전 11시, 쥴리차우에서 약 9km 떨어진 팔츠이크 마을에 주둔한 프로이센군 좌익 부대가 러시아군이 숲에서 나와 진군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베델은 즉시 보고를 받았으나 이를 믿지 않고 직접 러시아군을 관철하고 나서야 그게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제서야 적의 규모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이며, 적이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적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베델은 도나가 너무 소극적으로 행동한다며 경질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의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적이 행군하고 있을 때 공격을 개시해 큰 타격을 입히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7월 23일 정오, 그는 전군에 추격 명령을 내린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프로이센군[편집]


  • 사령관: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
  • 병력: 30개 보병대대, 63개 중대, 56개 야전포대, 29,400명

3.2. 러시아군[편집]


  • 사령관: 표트르 살티코프
  • 병력: 52개 보병대대, 53개 기병중대, 8개 코사크 연대, 188개 야전포대, 대대포 128개, 52,300명

4. 전투 경과[편집]


7월 23일 오후 3시, 프로이센군 선두 부대가 카이 근처에 도착했다. 프로이센 좌익 기병대는 곧 코사크 연대가 점령한 도로로 진격했고 프로이센 선봉대 5개 보병대대는 곧바로 기병대를 따라와 코사크 연대를 후방으로 몰아냈다. 이후 그들은 팔츠이크와 카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기병대를 공격해 러시아 보병대로 몰아넣었다. 이후 프로이센 기병대는 러시아 진지 남쪽 모퉁이를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적의 맹렬한 공격에 혼란에 빠져 뒤로 물러났다. 이렇듯 전황이 잘 풀리자 기세가 오른 베델은 지속적인 공세를 지시했다.

그러나 곧 전열을 재정비한 러시아군이 팔츠이크 마을 안팍에서 새로운 대열을 형성하고 야전포대를 재배치한 뒤 압도적인 포화를 퍼부으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러시아군은 자신들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던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화력을 퍼부어 패퇴시켰고, 뒤이어 공격을 가해온 프로이센 보병대를 향해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여 역시 패토시켰다. 이에 제20 프로이센 기병연대가 팔츻히크와 글로겐 사이에 위치한 숲을 따라 좌측을 전진해 러시아군의 후방을 공격했으나 이 역시 격퇴되었다.

오후 4시경 워베르스노우 휘하의 프러시아 후위대 3개 대대가 러시아 진지에 맞서 진격했으나 러시아 포병들의 화력에 못 이겨 패퇴했다. 당시 프로이센 포병대는 제때에 현장에 도착하지 못해서 별다른 엄호를 받지도 못한 프로이센 보병대는 비참하게 패주했고 워베르스노우는 전사했다. 베델은 마지막으로 남은 큐라시어 4개 연대를 투입해 러시아 전선의 남쪽 모퉁이를 공략하게 했다. 이들은 제 역할을 잘 수행해 러시아군의 기세를 꺾는데 일조했으나 전황을 바꾸지 못했다. 결국 오후 8시가 되었을 때 더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베델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후 그는 모사우에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본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5. 결과[편집]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8,300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러시아군은 4,700명을 잃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자신들을 공격한 베델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지 않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했으며,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역시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에게 기병대 18,500명을 이끌고 신속하게 이동하여 러시아군과 합류하게 했다. 라우돈 남작은 이 명령을 받들어 신속히 이동해 8월 초에 러시아군과 합류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과 일전을 치르기로 결심하고 쿠네르스도르프 전투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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