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카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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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 앗 딘 카이카우스
페르시아어, 아랍어 : عز الدين كيكاوس پور كيخسرو
영어 Izz ad-Din Kaykaus ibn Kayhkusraw
터키어 I. İzzeddin Keykâvus

생애 1180년 11월 6일 ~ 1220년 1월 7일
재위 1211년 6월 ~ 1220년 1월 7일

1. 개요
2. 생애
2.1. 내전과 즉위
2.2. 시노프 점령
2.4. 알레포 원정과 죽음
3. 기타


1. 개요[편집]


룸 술탄국의 9대 술탄. 내전을 극복하고 시노프를 점령, 타우루스 산맥 이북을 수복하는 등 여러 전공을 세웠다. 비록 9년에 불과한 치세였지만 후계자이자 동생인 케이쿠바트 1세의 전성기의 기반을 이루었다.

2. 생애[편집]



2.1. 내전과 즉위[편집]


케이휘스레브 1세의 장남으로, 1211년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부왕이 전사하자 콘야에서 술탄에 추대되었다. 다만 두 동생인 안탈리아 총독 케이페리둔 이브라힘과 토카트 총독 알라엣딘 케이쿠바트가 반란을 일으켰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다니슈멘드 등의 외세와 형제의 숙부이자 에르주룸의 아미르인 무기트 앗딘 토그릴샤가 그들을 지원하였다. 이브라힘의 경우 키프로스 왕국의 십자군 세력에 도움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반군이 콘야를 장악하자 케이카우스는 말라티아로 피신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아미르들이 여전히 그를 지지했기에 케이카우스는 곧 카이세리를 탈환하였고, 이브라힘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동시에 케이카우스는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1세와 협상하여 헤라클레아 (에레을리) 및 울루클르샤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이에 케이쿠바트는 앙카라로 도주하여 카스타모누의 튀르크 부족들과 연대하여 버텼으나 결국 사로잡혔다. 케이카우스는 두 동생들을 용서하였고, 라틴 제국과 맞서느라 여념이 없던 서쪽의 테오도로스 1세와도 부왕에 대한 복수 대신 평화 협상에 나서 양측의 대립을 끝내었다.[1]

2.2. 시노프 점령[편집]


내부를 안정시킨 케이카우스는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한 부친에 이어 북쪽 방면의 영토 확장에 나섰다. 1214년 트레비존드 제국알렉시오스 1세가 시노페 외곽에서 사냥하던 중 튀르크 부족들의 포로가 되어 케이카우스에게 인계되었다. 케이카우스는 알렉시오스의 석방을 대가로 시노페 할양과 트레비존드 제국의 복속을 조건으로 걸었고, 그해 11월 수일 간 이어진 성대한 연회와 함께 이행되었다. 케이카우스는 점령 후에도 시노프에서 서방인 / 동로마 상인들의 왕래를 허가하였고, 아르메니아인 라이스 헤이톤에게 행정을 맡겼다. 다만 시내의 성당들은 모스크로 개조되었고, 1215년 4월-9월간 그리스인 건축가 세바스토스의 설계 및 아미르 15인의 투자 하에 성벽이 재건되었다.[2]

2.3. 킬리키아 원정[편집]


치세 초엽의 내전 도중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1세는 케이카우스에게서 할양받은 에레을리 및 울루클르샤 외에도 라란데 (카라만)까지 점령하며 콘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216년, 반격에 나선 케이카우스는 우선 세 도시들을 수복하였고 카이세리에 군대를 집결시킨 후 아이유브령 알레포의 아미르 앗 자히르 가지에게 킬리키아 협공을 권하였다. 다만 후자는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채로 같은해 사망하였고, 케이카우스는 대신 마라쉬의 아미르 누스렛딘 하산과 함께 아르메니아 영토로 진격하였다. 당시 아르메니아는 안티오크 공국 계승 전쟁에 참가, 레몽 루벤을 도와 안티오크를 점령하였다. 이에 트리폴리로 피신한 보에몽 4세는 케이카우스와 동맹하였다.

룸 셀주크 군은 친친, 한친 성채를 연이어 포위하였고, 두 성채 모두 항복하였다. 케이카우스는 저항하지 않는 자들은 용서, 보급품을 취하고 수비대를 배치한 후 남하하였다. 고령의 레오 1세는 램프론 가문의 콘스탄티노스에게 군대를 주어 일전을 벌이게 하였고, 케이카우스는 부관 무바리즈 앗 딘 바흐람샤에게 3천 선발대를 주어 대치하게 하였다. 그동안 술탄의 본대는 케반 성채를 포위했는데, 성주 레온이 역습에 나서 포위측 투석기를 태워버리는 등 강하게 저항하자 포위를 풀고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1217년 케이카우스는 아르메니아 군을 격파하고 콘스탄티노스를 사로잡았다. 이후 레오 1세가 배상금을 납부, 콘스탄티노스의 석방과 현상 유지의 휴전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2.4. 알레포 원정과 죽음[편집]


킬리키아 원정 도중 사모사타 영주 알 아프달 이븐 살라흐 앗 딘이 케이카우스에 접근하여 술탄위를 되찾게 해준다면 알레포를 할양하겠다 약속하였다. 당시 알레포의 아미르 알 아지즈 무함마드는 불과 5세에 불과하였고, 5차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아이유브 술탄 알 아딜도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따라서 케이카우스는 알 아프달과 아이유브 왕조를 침공했으나 두개의 거점을 점령한 후 다툼이 벌어져 후자가 연합에서 이탈하였고, 알레포와 이웃한 자지라의 아미르 알 아슈라프 무사가 개입하여 룸 셀주크 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케이카우스는 모술의 아미르 바드르 앗 딘 룰루와 동맹하여 아이유브 조에 맞서려 하였으나 1220년에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 기타[편집]


1220년 케이카우스는 앙카라에 마드라사를 세웠고, 1217년에는 시바스에 의학 대학의 성격을 지닌 시파이예 마드라사를 세웠다. 시파이예 마드라사는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케이카우스의 영묘 역시 후자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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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니케아 제국에 대한 튀르크 부족들의 개별 공격은 이어졌다[2] 지금도 시노프 성벽 서문 옆의 성탑에 이를 기념하는 그리스어와 아랍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