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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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코바니 시리아.jpg
코바니 전경. 뒤의 언덕을 넘으면 터키 땅이다
파일:코바니 시리아 2.jpg
코바니 전투 후의 코바니. 휘날리는 YPG 깃발이 다에시에 대해 굳건히 버틴 도시를 상징하는 듯하다.

1. 개요
2. 역사
2.1. 시리아 내전
3. 갤러리


1. 개요[편집]


아랍어 كوباني / عَيْن الْعَرَب
쿠르드어 مەنبج
시리아어 ܚܣܝܟܐ
터키어, 영어 Kobani

시리아 북부의 도시. 정식 아랍어 지명은 아인 알 아랍이지만, 주민들의 다수가 사용하는 쿠르드어 지명인 코바니로 흔히 알려져 있다. 알레포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라카에서 서북쪽으로 90km, 만비즈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시리아 내전 이전 인구는 4만 5천이었고, 현재는 약 4만으로 집계된다. 누사이빈 & 카미실로, 제일란프나르 & 라스 알 아인, 악차칼레 & 텔 아비야드의 경우처럼 이곳 역시 1차 대전 후 철도를 따라 국경선이 그어지며 기존의 도시가 터키령과 시리아령으로 나뉘었다. 다만 코바니의 규모에 비해 터키령의 무르쉬트프나르 (Mürşitpınar)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따라서 동북쪽으로 8km 떨어진 과거 시리아 문화권의 수루츠가 제대로 된 상대 도시라 할 수 있다.

2012년 이래로 쿠르드 주도의 북시리아 연방 (로자바)에 속하였고, 유프라테스 자치구의 주도이다. 본래 시리아의 주요 쿠르드 도시들 중 하나였지만 2014년 다에시 (ISIL)의 총공세를 격퇴하며 세계에 알려졌다. 코바니 전투이슬람 국가 토벌전에 있어 국제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하게 되는 결정적인 전장이었다. 승전과 함께 과거 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의 거점이었던 코바니는 쿠르드 민족주의 및 독립국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터키에겐 눈의 가시가 되었다. 2019년 터키 쿠르드 침공으로 동남쪽 50km의 텔아비야드가 터키군에게 점령되자 연방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로자바 측의 요청으로 시리아 정부군 및 러시아군이 진입하여 수비를 맡고 있다. 다만 민간 행정은 여전히 로자바에 속하는 등 불안한 공존이 이어지고 있다.

2. 역사[편집]


지명 코바니는 1911년 콘야-바그다드 철도 건설 시에 감독을 맡은 독일계 회사를 가르켜 영어 Company에 대응되는 독일어 단어 Kompanie (콤파니)를 쿠르드식으로 발음한 것이라 전해진다. 본래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했으나 19세기 이래로 쿠르드인들이 평지로 이주하여 주류가 되었고, 1925년 셰이크 사이드 반란의 실패 후 터키의 쿠르드 인들이 망명해오며 대세를 굳혔다. 1980년 경에는 쿠르드 노동자당의 지도자로 터키의 쿠르드 독립 운동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이 터키군의 추적을 피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인 시리아로 망명하였다. 시리아와의 접경 지역인 마르딘 주 출신인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코바니에 주로 머물며 쿠르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코바니에 그가 머물던 주택은 후일 로자바 당국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2.1. 시리아 내전[편집]


파일:시리아 코바니 3.jpg
코바니 전투 당시 전경

코바니는 시리아 내전 발발 후 정부군이 철수하자 2012년 7월 인민방위대가 접수하여 코바니 지역에 편성되었다. 2014년 1월 북시리아 연방인 로자바가 설립되자 코바니는 유프라테스 지역의 주도로 편성되었다. 2014년 7월 다에시만비즈에 이어 코바니를 향해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20만에 달하는 쿠르드 난민이 국경을 넘어 터키로 망명하였다. 그해 9월 다에시는 코바니를 포위하였고, 뒤이어 시가지 동부를 장악하며 함락을 목전에 두는 듯하였다. 세계 각지의 쿠르드 인들은 코바니 구원을 위한 시위를 벌였고, 미군이 대대적인 공습을 통해 지원에 나섰다. 그리고 쿠르드 세력의 연대를 우려하여 중립을 지키던 터키 역시 미국의 압력으로 이라크 쿠르디스탄 병력의 이동을 승인하였다. 이어진 코바니 전투에서 3천에 불과한 인민방위대와 지역 민병대는 미군 및 시리아 반군의 지원에 힘입어 결사 항전하였고, 4개월 간의 격전 끝에 2배가 넘는 다에시 군을 격퇴하였다.

2015년 1월, 다에시가 철수하며 코바니 전투는 양측 합쳐 3천여명이 전사하고 시가지의 70%의 파괴된 채로 종결되었다. 전후 이슬람 극단주의에 신물이 난 주민 일부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다. 코바니 전투는 욱일승천하던 다에시의 기세를 꺾어 그 공세 종말점이 되었고, 국제 연합군은 반격의 추진력을 얻어 텔아비야드 공세에 나선다.[1] 다만 2015년 6월 25일 다에시는 밤을 틈타 백여명의 병력을 투입시켜 폭탄 테러와 총기 난사를 가하였고, 3일 간의 진압전 끝에 민간인 230여, 군인 40여명이 희생되었다. YPG와 시리아 정부는 다에시의 차량이 터키 국경에서 넘어왔다며 비난하였고, 터키는 물론 극구 부인하였다. 이후 2016년 코바니 병원이 세워지는 등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다만 2019년 10월 북시리아 공세에 나선 터키군과의 완충지대 설정을 위해 시리아 군이 진주하였고, 2021년 4월 터키군이 코바니의 압둘라 외잘란 생가에 폭격을 가하는 등 불안은 이어지고 있다.

3. 갤러리[편집]


파일:시리아 코바니.jpg

파일:시리아 코바니4.jpg

파일:코바니 시리아 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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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로써 코바니 지역과 자지라 지역이 육로로 이어지며 고립된 3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어 불안하던 로자바의 입지가 점차 공고해지기 시작한다. 이후 아프린 ~ 만비즈 ~ 코바니 역시 이어지며 로자바 전역이 육로로 이어졌으나 2018년 터키군이 아프린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며 다시 월경지가 생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