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호르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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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Qohor / Three Thousand of Qohor
얼음과 불의 노래의 과거 사건.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여담



1. 개요[편집]


피의 세기코호르 앞에서 있었던 전투로 도트라키의 불패신화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이자 거세병의 명성을 높인 전투.


2. 배경[편집]


발리리아의 멸망 이후 피의 세기도트라키는 주변의 도시와 국가들을 닥치는대로 정복하고 약탈했으며 잔인하기로 유명한 칼 테모가 이끄는 2만 5천명의 칼라사르는 서부 진출을 위해 자유도시 코호르 앞까지 몰아닥쳤다.

코호르인들은 이에 대비해 성벽을 높이고 주둔군을 2배로 늘린 뒤 저명한 용병단인 둘째 아들들과 눈부신 깃발단을 고용했으며 동시에 아스타포에 사절단을 보내 거세병 3천 명을 구매했다.


3. 전투[편집]


첫째 날 전투에서 도트라키는 5천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코호르 주둔군은 거의 궤멸해 버렸고 두 용병단은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도주해 버렸다. 도트라키들은 먹고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거세병 3천 명이 도달하였고 다음날 새벽 성문 앞에 대열을 갖춘 채로 도트라키들을 맞았다. 도트라키들은 이들의 숫자를 우습게 여기고 돌진으로 응전했다. 총 18번의 돌격과 3번의 화살 세례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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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결과, 거세병은 2천 4백명이 전사하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음에도 도시를 지켜내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도트락 군대는 1만 2천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칼라사르의 절반 정도가 전투원이니 전투원의 절반이 죽은 셈이다. 무엇보다 총지휘관인 칼 테모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의형제이며 최고의 용사들인 혈기수들마저 전부 죽었다. 새로운 칼은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로 부하들과 함께 거세병들 앞에 자신의 머리를 한 움큼씩 잘라서 놓고 물러나게 하였다.

이 전투로 거세병의 명성이 사방에 알려졌으며 동시에 도트라키의 불패신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로 코호르의 도시 경비는 전적으로 거세병에게 맡기고 있으며,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그들 하나하나가 창 끝에 사람의 머리카락을 땋아 만든 장식을 달고 있다고 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 본편에선 조라 모르몬트대너리스 타르가르옌에게 거세병을 구입하기를 권하며 이 이야기를 한다.


4. 여담[편집]


  • 실제 역사에서도 용병들이 고용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 용병들이 보여준 모습으로 1792년 8월 10일 봉기당시 자신들의 고용주였던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운 일화나[1] 카를 5세로마를 침공해 박살을 내버린 사코 디 로마 당시에 교황이자 고용주였던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싸워 500명중 42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한 일화가 유명하다. 차이점은 코호르의 전투와는 달리 끝내 고용주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
  • 실제 역사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몽골은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기마민족이라는 점에서 도트락인과 닮아있고, 맘루크 또한 노예 아이를 데려다가 키워 만들어진 정예부대라는 점, 불패신화를 기록하던 몽골군이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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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이 16세는 그들이 성난 시위대를 막지 못할것을 예감하고 "그대들은 모두 소임을 다했다. 이제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으나 용병들은 왕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 전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