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모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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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2년 2월 1일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크레모나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급습하여 벌어진 전투. 외젠은 이 전투에서 적 지휘관을 생포하는 공적을 세운다.

2. 배경[편집]


1701년 11월, 키아리 전투 패배 후 2달간 사부아 공자 외젠의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던 빌레루아 공작 휘하 프랑스군은 겨울 숙영지로 철수했다. 프랑스군의 본부는 아다 강과 포 강의 분기점에 있는 요새화된 크레모나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키아리 전투 패배 소식을 접한 루이 14세는 빌레루아 공작에게 내년에 지원군을 파견해줄 테니 그때까지 적과 함부로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고, 빌레루아 공작은 국왕의 지시에 따라 모든 군사 행동을 중단하고 이듬해 봄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외젠은 가뜩이나 병력이 열세한 상황에서 적 지원군이 온다면 골치아픈데다 본국의 지원이 미진하고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는 것도 벅찬 처지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단시일에 승부를 내야 했다. 이에 외젠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적의 본거지인 크레모나를 급습하기로 결심한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오스트리아군[편집]



3.2. 프랑스군[편집]


  • 총사령관: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
  • 병력: 알 수 없음.

4. 전투 경과[편집]


1702년 1월 31일 밤, 외젠은 특별히 엄선한 보병 4천명과 기병 800명을 이끌고 크레모나로 접근했다. 얼마 후 크레모나에 잠입해 있던 스파이가 이들을 숨겨진 지하 배수로로 안내했다. 외젠과 병사들은 이 지하 배수로를 따라 도시로 진입한 뒤 생 마거릿 문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숙영지에 들이닥쳤다. 프랑스 수비대는 갑작스런 적의 야습에 놀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빌레루아 공작은 그의 숙소에서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외젠은 자신의 뒤를 따라올 샤를 토마 데 로렌-보데몽의 부대가 포 강의 수문을 점령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샤를 토마는 야간에 산악 지대를 행군하느라 생각보다 늦게 현장에 도착했고, 딜론 대위가 이끄는 35명의 프랑스군 병사들이 바이게이트를 설치하고 이들을 오래 붙들어 놔 오마호니 소령이 이끄는 아일랜드 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바람에 포 강의 수문을 장악하지 못했다. 이에 외젠은 오스트리아군에 소속된 아일랜드 출신 장교를 보내 오마호니 소령에게 계속 저항하면 몰살할 것이니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오마호니 소령은 즉시 이 장교를 체포하게 한 뒤 부하들을 이끌고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대항했다.

이 무렵, 앞서 외젠이 이끄는 부대에게 습격당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크레모나의 프랑스 수비대 생존자들이 속속 오마호니의 부대에 합세했고,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도 아군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구원군을 파견했다. 이에 외젠은 크레모나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퇴각했다. 이리하여 크레모나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오스트리아군은 크레모나 전투에서 2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프랑스군은 1,1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또한 많은 프랑스 장교들이 적에게 포획되었는데, 그 중엔 프랑스군 지휘관인 빌레루아 공작도 있었다. 크레모나 전투에서 총사령관이 생포되는 악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워 크레모나를 지켜낸 오마호니 소령은 루이 14세에게 상찬을 받았고 제임스 스튜어트[1]에게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루이 14세는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을 새 지휘관으로 선임해 외젠과 맞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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