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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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첫 등장
3. 서주 시대 이후
4. 주요 역임자


太宰

1. 개요[편집]


태재는 고대 중국의 관직이다. 서주(西周) 시대 때 최초로 설치된 관직으로 그 당시에는 재상의 지위를 가진 관직이다.


2. 첫 등장[편집]


태재의 뜻을 알기 전에 재상을 뜻하는 재(宰) 자는 갑골문자를 쓰던 상나라 시절 때부터 등장한 유서깊은 회의자로 본디 제사 음식을 조리하고 분배하는 임무를 가진 요리사를 의미하는 글자였다. 지금와서 보면 제사 음식을 분배하는게 뭔 대수인가 싶겠지만 고기를 제대로 나누는 것은 고기가 현대보다 귀했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대로 분배받지 못하면 싸움이 났고, 심지어는 칼부림 끝에 죽은 사례마저 있을 지경이다.[1]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주 시대 들어서는 주나라 천자 근처에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문무백관들의 수장으로서 그들을 통솔하면서 천자를 보좌하는 승상(丞相)과 같은 재상직이 된 것이다.

'태재는 왕이 수도를 개발할 때, 방위를 판별하고 국도와 교외의 경계를 확정하며,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배분 하는 일을 한다.'라는 내용이 주례에 등장한다. 그리고 더 자세하게 그들의 임무를 알아보면 나라의 모든 법령과 전적을 관리한다. 전적은 곧 통치, 교육, 예법, 법도, 형벌, 행정에 관한 근거들이다.[2]


3. 서주 시대 이후[편집]


봉건제도에서 주나라는 천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지의 제후들을 희성의 친척들에게 주요 지역에 분봉하고, 그 외에는 사위나 공신들에게 마지막에는 변방 지역의 군장 및 민족의 우두머리들에게 작위를 분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속이 약해지고, 그 결과 주나라의 권위가 떨어져갔고, 주여왕(周厲王) 때는 폭정으로 국인(國人)들의 반란으로 폐위당하고 말았다. 그 사이 공화시대를 겪다가 그 뒤 주선왕의 중흥을 거쳤다.[3] 선왕이 죽고 주유왕(周幽王)이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봉화를 이용했다가[4] 역으로 견융의 침략으로 수도인 호경[5]만 잃고 그 아들인 주평왕(周平王) 대에는 낙읍(洛邑)[6][7]으로 천도하면서 권위는 떨어졌고, 태재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실추되었다.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에도 태재를 설치했는데, 그때 들어서는 재상 자리는 다른 지위로 이관되었다.[8]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국가의 제례를 관리하여, 나라에서는 예법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는데, 관련 지식이 대단히 방대했다. 그래서 예전같이 재상만 아닐 뿐 나름대로 대접받는 지위였다.[9]

진(秦)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뒤에는 그 지위가 더 떨어져 원래대로 제사 음식을 조리하고 분배하는 지위로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시대의 발전으로 원래 역할을 그대로 맡게된 사례로 볼 수 있다.

한(漢)나라 대에는 구경 중 하나로 제사와 예법을 담당한 태상(太常)의 부하로 정해졌다. 지위는 600석으로 제사 용구를 담당했고, 휘하에는 태재승(太宰丞)이 있었다.[10]

그런데 역설적으로 서진(西晋) 시대에 와서 지위가 급상승했는데, 최고급 명예직인 삼사(三師) 중 하나인 태사(太師)[11]가 추존 황제인 사마사(司馬師)의 이름을 피휘하여 태재라 하는 바람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북송(北宋) 시대 때는 휘종 대에 그 우복야(右僕射)가 문하시랑과 태재를 겸하게 하는 개편이 있었다.


4. 주요 역임자[편집]


화독
백비
사마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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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추시대정영공이 공자 송에게 자라탕을 엄숙한 제사 자리에서 '식지가 떨리면 진미를 먹는다.'라는 말을 듣고 골탕을 먹이려고 일부러 공자 송에게 자라탕을 분배하지 않자 공자 송은 공자 귀생과 짜고 정영공을 죽여버렸다. 그만큼 제사 음식의 고른 분배는 중요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식지동 문서 참조.[2] 출처는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 5권 122쪽[3] 단 중흥이라고 하나 이때도 주왕의 권위는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 중흥이 권위가 실추되는 시점을 늦춘 의의는 있다.[4] 포사가 웃게 만들기 위해 봉화를 이용한 고사가 바로 그것이다.[5] 훗날의 장안(長安)이다.[6] 지금의 낙양시다.[7] 달리 성주(成周)라고도 불린다.[8] 대표적으로 초나라영윤과 진나라의 정경 직이 그러했다.[9] 출처는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 5권 123 쪽[10] 출처는 본삼국지 11권 42~43 쪽[11] 삼국지연의에서 동탁이 한 그 태사 맞다.[12] 상술했듯이 사마사의 이름을 피휘하여 태사가 태재가 된 것이니 서진 이전 시대의 태사를 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