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즈먼 대교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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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스만 대교 붕괴.jpg

1. 개요
2. 태즈먼 대교
3. 사고 당시
4. 사고 이후


1. 개요[편집]


Tasman Bridge Disaster

1975년 1월 5일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매니아에서 태즈먼 대교(Tasman Bridge)가 선박과의 충돌로 무너진 사고.


2. 태즈먼 대교[편집]


1940년대에 태즈매이니아의 호바트(Hobart)가 급성장 했고, 그만큼 더윈트 강(Derwent River) 건너 도시인 클라렌스(Clarence)와 연결해줄 도시가 필요했다. 그래서 1943년엔 아치형 부교를 지어 두 지역을 이었다. 덕분에 클라렌스는 20년간 인구가 4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부교였기에 한계가 있었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다리를 교체할 필요가 생겼고, 60년대에 길이 1,416m, 4차선의 태즈먼 대교가 지어지게 됐다. 14번 기둥과 15번 기둥 사이는 350피트 가량 거리를 넓혀 강을 지나는 배가 사이로 통과할 수 있게 했다. 1970년대 초기엔 하루에 차량 25,000대가 지날 정도로 유용하게 쓰였다. 다만 다리를 지으면서 다리가 배와 충돌할 가능성은 계산하지 않았고, 위의 도로를 버틸 정도로는 지었지만 배가 충돌해도 견딜 정도로는 짓지 않았다.


3. 사고 당시[편집]


1975년 1월 5일 오후 9시, 벌크선 이라와라 호수(Lake Illawara)가 아연 도금 철근 콘크리트 1만톤을 싣고 이동중이었다. 배 길이는 140m, 폭은 18m, 최대 속도는 12.5노트였다. 도착지는 태즈매이니아의 루타나(Lutana)였다. 선장은 당시 기준 60세의 볼슬로우 펠크(Boleslaw Pelc)였고, 승무원 42명이 탑승중이었다.

약간의 안개가 낀 가운데, 선장은 강에 배가 하나도 없는 걸 확인하고 배를 최고 속도로 올렸다. 배가 최고속도 8노트에 달하면서 배가 조금씩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배가 기우는 걸 확인한 선장은 배를 다시 바로잡으려 했다. 엔진도 멈추고 까지 내려가면서 최대한 배를 멈춰보려 했으나, 결국 배는 대교의 18번, 19번 기둥과 충돌했다.

처음엔 충돌에도 다리가 멀쩡하나 싶었다. 선장도 "다행이야. 그리 크게 부딪히진 않았어(Thank god. It didn't hit hard.)" 라 안심했지만, 이내 충돌을 못 버틴 다리에 금이 갔고, 전선이 끊기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배 또한 충돌의 충격을 못이기고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겁에 질려 배에서 뛰어내렸다. 결국 금이 더 커지면서 18번 기둥과 19번 기둥이 무너졌고, 17번 기둥과 20번 기둥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지자, 두 기둥 사이의 127m 길이 도로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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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무너질 때 위에 차량은 없었지만, 충돌의 충격으로 전선이 끊기면서 도로 위의 가로등이 다 꺼졌다. 홀든 스테이션 왜건 차량의 운전자 머레이 링(Murray Ling)은 운전 도중 갑자기 가로등이 꺼지고, 도로가 사라지는 걸 목격하고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량을 멈춘 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프랭크 맨레이(Frank Manley)와 실비아 맨레이(Sylvia Manley), 딸 샤론(Sharon Manley)이 탔던 홀든 모나로 차량도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차량은 다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멈췄고, 머레이 링은 차에서 내려 다른 차량에게 경고했으나, 다른 차량들은 이 경고를 보지 못하고 결국 추락했다.

그렇게 차량 4대가 결국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 남자 2명과 여자 3명[1]이 사망했다. 그리고 배가 가라앉으면서 남자 승무원 7명이 탈출하는데 실패해 익사했다.

배가 가라앉자 승무원들은 재빨리 탈출했다. 구명정을 내려 탈출했고, 아예 배에서 뛰어내린 승무원도 있었다. 근처에서 요트를 타던 사람들은 사고를 목격하고 현장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구조했다. 개인 보트를 끌고 와 구조한 사람도 있었다. 머레이는 버스 한대가 오는걸 목격하고 다시 경고했다. 다행히 버스는 경고를 목격하고 난간을 긁어가며 속도를 늦춘 끝에 간신히 멈췄다.

결국 사고로 12명이 사망했다. 그나마 일요일 오후라 다리 위를 지나던 차량이 많지 않아 피해가 크지 않았다.


4. 사고 이후[편집]


당시 학교와 회사, 병원 대부분이 호바트에 있었기에, 두 도시가 끊긴 상황이라 빨리 대책이 필요했다. 위에 다른 다리가 있긴 했지만, 태즈먼 대교가 있던 당시에 3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30분이나 돌아가야 했던 엄청 먼 거리였다. 대교가 다시 지어지기 까지 두 도시를 연결하는 페리선이 운용됐다.

1975년 10월, 다리가 다시 지어지기 시작해 1977년에 완공됐다. 지어지면서 다리가 전보다 좀 더 넓어졌다. 또 1976년에 호바트와 클라렌스를 잇는 다른 다리인 배일리 대교(Bailey Bridge)가 지어졌다. 1984년에 또 다른 다리가 지어져 두 도시를 연결했다.

선장 볼슬로우 펠크는 6개월간 항해면허가 정지됐고, 1975년에 은퇴했다.

사고 이후 새로 지어진 태즈먼 대교에 추모 명패가 붙었다. 인근 몬타구 베이에도 추모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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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마스 엘벳 존스(Thomas Elvet Johns), 로버트 리젝(Robert Rezek), 조이스 스토크(Joyce Mary Stokoe), 파멜라 진 스와드(Pamela Jean Sward), 레지날드 프랜시스 터너(Reginald Frances Tur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