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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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4. 정벌의 시작
5. 오희가 남송을 배신하다
6. 결말


1. 개요[편집]


파일:개희북벌 중 교전하고있는 금나라 병사들과 송나라 병사들의 모습.jpg
[1]
泰和征伐
중국 금나라 후기대에 벌어진 금나라의 3차 남송 정벌.[2] 금나라의 황제였던 장종 (章宗)의 재위 기간에 황제 장종과 그의 대신들이 추진한 정벌로 태화(泰和)는 장종 재위기의 연호(1201년~1208년)이다. 여담으로 당시 남송 황제 영종 재위기의 연호는 개희(開禧)(1205~1207)이다.


2. 배경[편집]


1204년 금나라 남쪽 변방 국경 근처에서 송나라의 군대 1만명이 집결을 한다는 보고가 그쪽 고을들을 책임지던 관리들에 의해 보고되었고 이것을 시작으로 송나라와 금나라의 전쟁 불씨가 점점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1206년 북방의 작은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이 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금나라는 조마조마하였고 하필 이때 세종이 죽고 장종 재위기에 접어들면서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남송의 재상 한탁주는 송나라 조정 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정강의 변 이후로 생긴 항금 감정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한탁주와 그의 일파들이 북벌을 강력히 주장한 끝에 남송 개희 2년 4월(1206년 4월)때 개희북벌이 시작되었다. 금 태화 6년 10월(1206년 10월)때 장종은 조정 대신들과 논의하여 남송을 정벌하기에 이른다.


3. 양측의 전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개희북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정벌의 시작[편집]


1206년 10월에 금나라의 장종이 남송 정벌 조서를 내려, 정벌 군대가 남송으로 출병한다. 근 몇달 동안은 송나라의 명장 필재우가 사주 및 여러 지역에서 금나라 군대를 학살하는등 활약하여 팽팽한 싸움이 지속되었으나, 몇개월이 지나면서 금나라가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5. 오희가 남송을 배신하다[편집]


말그대로 남송 북벌군대의 중요인물중 하나였던 남송의 명장 오린의 손자였던 오희가 남송을 배신하고 금나라 편이 되어 같이 남송을 정벌하게 되었다. 오희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촉왕(蜀王)에 봉할 것을 요구했고 금나라는 이에 응해 그를 촉왕에 봉해준다.

결과적으로 금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었고 남송의 평화협정 요청을 받아주기로 하였다. 이때 장종은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였는데 남송의 문부대신 사미원이 한탁주를 살해하여 소금으로 절인 한탁주의 목을 보냈다. 그리고 태화 7년(1208년) 남송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사미원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6. 결말[편집]


그후 한탁주의 머리는 수도 중도대흥부 중심쪽에 걸려지게 되고 장종은 종묘에 찾아가 선대황제 영령들에게 승리를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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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초상화는 개희북벌, 태화정벌 전투 기간중인 1206년 12월달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2] 태조때 일어난 정강의 변해릉양왕 시기의 발생된 채석기 전투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남송이 먼저 침략 시도를 하여 생긴 정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