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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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설
2. 개요
3. 여담
4. 문화재
5. 교통





1. 개설[편집]


화양읍의 가장 북서쪽에 있는 토평리는 이서면과 화양읍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마을로서 과거 이서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짐[1]


2. 개요[편집]



백곡(栢谷)
1리인 백곡(栢谷)은 이서고국의 왕성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들이 견고하게 삼면을 에워싸고, 낮은 곳은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천연의 산성 아닌 토성을 쌓았다. 왕성 남쪽인 앞은 청도천이 흘러 자연을 잘 활용한 왕성지로 건국연대와 국세(國勢), 멸망 연대도 두 설로 나뉜다. 그러나 이서국이 역사상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2리인 와촌(臥村,瓦村), 3리인 은행정(銀杏亭) 모두가 토성산의 연속으로 방위(防衛)촌이며 성외(城外)촌이다.
1리인 백곡이 이서국 멸망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수록되어 있는 주, 여, 강(江), 황(黃)씨들이 거주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조선시대초부터 경주 최씨가 거주했다는 구전은 있으나 규명되지 못하였다. 백곡 이전의 동명도 미상이고 이 마을 주위산에 잣나무가 많아 "잣실"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백곡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와우촌(臥牛村),와촌(臥村-2리)
지형이 풍수상으로 소가 누운 형국이라 와우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동쪽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흡사 소가 누운 것 같다.

은행정(銀杏亭-3리)
1500년 중엽에 김해인 삼족당 김대유 공이 정착했다. 그는 후진의 사표로 명성이 높았다. 은행정이란 마을 입구 산기슭에 두 그루의 은행노목이 있는데 농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동리의 수호신으로 삼아 동제를 지내며, 주민들이 불행한 일이 있어 기원을 하면 효험이 있어 동명까지 은행정으로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은행목은 동민들이 애지중지하는 신목(神木)이다.



3. 여담[편집]


조선시대 김일손이 태어난 마을이다.


4. 문화재[편집]


탁영종택

선조11년(1578) 紫溪祠를 紫溪書院으로 重建하고 紫溪書院에 탁영선생을 奉安하면서 宗宅이

있는 백곡에도 탁영선생 不祧廟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바 있고 현종2년(1661) 자계원이 賜額되면서 士林에 의한 私不遷位에서 公不遷位로 賜昇되어 선생의 내외분을 봉향하였다. 이후 헌종10년(1844) 昌潤이 노후된 부조묘를 재건하였으며 다시 1940년에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택에는 탁영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永慕閣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탁영종택은 여러차례 개축하여 건축적으로는 가치가 미흡하나 역사적으로 濯纓 金馹孫의 기상과 내외적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확고한 정신세계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있으므로 기념물로 指定한다.

해석

선조11년(1578) 자계사를 자계서원으로 중건하고 자계서원에 탁영선생을 봉안하면서 종택이
있는 백곡에도 탁영선생 부조묘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바 있고 현종2년(1661) 자계원이사액되면서 사림에 의한 사불천위에서 공불천위로 사승되어 선생의 내외분을 봉향하였다. 이후 헌종10년(1844) 창윤이 노후된 부조묘를 재건하였으며 다시 1940년에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택에는 탁영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영모각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탁영종택은 여러차례 개축하여 건축적으로는 가치가 미흡하나 역사적으로 탁영 김일손의 기상과 내외적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확고한 정신세계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있으므로 기념물로 지정한다.


5. 교통[편집]


청도의 2번 유등버스가 지난다.
20번 국도가 이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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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유사》 권1 이서국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