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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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5px-탁영교지.jpg
[1]
성명
김일손(金馹孫)
본관
김해 김씨 삼현파(三賢派)
출생
1464년 2월 13일 (음력 1월 7일)
조선 경상도 청도군 현산현 토평리 백곡마을
사망
1498년 8월 14일 (음력 7월 27일) (향년 34세)
조선 한성부 광통방
국적
조선

계운(季雲)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시호
문민(文愍)
부모
부친 김맹(金孟, 1410 ~ 1483)
모친 용인 이씨 이양(李讓)의 딸
형제자매
형 김준손(金駿孫, 1454 ~ 1508), 김기손(金驥孫, 1456 ~ 1493)
누나 파평 윤씨 윤기분(尹起汾)의 처, 한양 조씨 조건(趙鍵)의 처
부인
단양 우씨[2]
예안 김씨 [3]
자녀
양자 김대장(金大壯, 1493 ∼ 1549)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정치인, 작가.


2. 생애[편집]


김일손은 1486년 문과에서 2등을 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홍문관,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조선시대 엘리트 관원들이 역임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김일손은 일찍이 스승으로 섬긴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사림파 중의 1명으로 무오사화의 희생양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극돈의 평을 보면 인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극돈이 김일손의 이조좌랑 추천을 거부했을 때 김일손에 대해 평하기를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하였다.[4] 그러나 후일 김일손은 이조좌랑[5]이 됐다. 사초에 임금인 세조의 사건에 대해서 이극돈이 이를 사초에서 빼줄 것을 부탁했으나 김일손이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고 결국에는 김일손이 붕당을 획책한다며 이극돈을 탄핵하여 이극돈이 파직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둘은 원수처럼 됐다. 무오사화이극돈유자광이 결탁하여 일으킨 사화로도 보는 시각이 있는 걸 보면 안타까운 부분.[6]

연산군 때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성종 재위시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썼던 사초(史草)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김일손을 비롯한 신진 세력인 사림파(士林派)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는데 <연산군일기>는 이 과정을 생중계하듯이 낱낱이 적어서 후세에 전했다.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세조에 관한 소문을 확인 과정도 안 거치고 사초에 기록하였는데 "세조가 죽은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후궁과 수상한 사이였고 다른 후궁과도 찝적댔다."라는 소리를 사초에 적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세조는 분명 형제와 조카를 죽인 패륜아였지만, 직계가족으로 한정한다면 가족관계 하나만큼은 조선 역대 왕 그 누구보다도 깔끔한 편이었다. 당장 세조는 전근대 권력자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던 축첩 문제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고,[7] 역시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자식과의 갈등 또한 없었다. 되려 자신과 다른 성정을 지닌 장남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게 뭐 대단한 것가 싶겠지만, 역대 조선의 왕 중 이런 모습을 보여준 왕이 거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또한 김일손이 소문을 자신에게 알려줬다고 주장한 허반은 "내가 알려준 소문은 상중에 고기를 먹으라고 권했다는 소문"[8]이라고 실토하는 등 김일손은 그냥 사초에 주작질을 해서 넣었다.

이 외에도 김일손과 함께 엮인 사림파 사관들이 사초에 적은 내용 상당수가 근거 미비, 혹은 애초에 조작하여 만든어낸 악성 루머였다는 점이 드러나는 등, 공사구분 못하고 사실관계 파악 못하며 반대파 비난을 위한 악성루머를 공문서에 기술하는, 이극돈의 주장 따라 당대 사림파 신하들의 저열한 수준이 까발려진 사건이었다. 일부 의견에서는 김일손이 훈구파와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한 일이었고, 그저 일처리가 경솔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비판의 근거 자체가 김일손이 손수 주작질해서 만든 루머였다. 사관의 일이라는게 완전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적 감정을 담아 조의제문[9]을 사초에 기록한 것은 사관의 책무에서 많이 벗어난 행동이었다. 결국 이 일로 김일손은 1498년 거열형을 맞이했다. 다만 중종 때 영의정 남곤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평은 애초 남곤은 김일손과 마찬가지로 김종직의 제자로 사형제 관계인데다가 원래부터 김일손과 친한 사이였다. 즉, 친한 사형이기에 사적으로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능력을 떠나서, 애초부터 사적으로 같은 스승 아래에서 공부하고 친밀한 사이이니 남곤이 김일손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3. 기타[편집]


  • 김해 김씨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고등 문관에 진출하는 일이 드물어지게 된다. 기술직이나 중인층에서는 조선 후기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그림 부문에서 단원 김홍도 등을 꼽을 수 있다.

  • 김일손은 정실 부인으로부터 자식이 없었고, 첩으로부터 아들 둘을 얻었으나 효수되었다. 김일손이 34세의 나이에 자식 없이 죽었으므로 그의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김대장(金大壯)은 두 아들을 뒀는데, 장남은 김갱(金鏗), 차남은 김장(金鏘)이다. 무오사화 때 김일손의 친척들도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유배를 가게 됐는데, 김대장은 그의 형 김대유(金大有)와 함께 남원부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장남 김갱(金鏗)은 고향 청도로 돌아갔으나 차남 김장(金鏗)은 아버지 묘소를 돌보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북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김갱은 자식이 없이 죽었으나 김장의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김장(金鏗)의 후손들로는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 정치인 김무성 등이 있다.

  • 중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었고, 순조 대에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하는데, 실제 그가 사용했던 거문고(탁영금)이 보물로 지정되어 남아있다.


4. 대중매체[편집]


  • 1995년 6월 17일 KBS 역사실험 [세조의 정통성논란이 부른 참극 무오사화의 주역 김일손과 이극돈 (역사의 라이벌)]에 부패한 훈구파 이극돈과 사림파 김일손의 대립이라는, 전형적인 옛 대중적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ijNlUANiF8&t=157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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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일손의 교지인 탁영교지(濯纓敎旨), 보기 드물게 금박을 섞어 만든 붉은 장지를 사용하였다.[2] 우극관(禹克寬)의 딸[3] 김미손(金尾孫)의 딸[4] 이후 김일손이 사초에 카더라 통신을 적어넣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을 보면 이극돈이 제대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5]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일컫는 말이다. 관직 서열은 낮은 편이지만 삼사(三司)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인사를 좌우할 수 있는 요직이다. 동서분당이 시작된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도 이조전랑(吏曹銓郞) 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다.[6] 다만 그저 설일 뿐이며, 신빙성마저 떨어진다. 조의제문 사건이 단순 문제에서 사화(士禍)로 번질 조짐이 보이자 이극돈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있다. 실제로 이극돈은 무오사화 이후 제때 보고를 안 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7] 다만 후궁과 거기서 본 자식도 있긴 하다.[8] 사실 이는 예법에 어긋나긴 하지만 역사상에서도 건강을 우려하여 상중에 고기를 먹게 하는 얘기는 많이 있다.[9] 차라리 김일손 자신의 글이라면 처형받는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지 않고 당대의 명사이자 자기 스승인 김종직의 글을 싣는 바람에 일파만파가 되었다. 일족과 동문 전체를 끌고 들어갈 결과를 내다보지 못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일부러 저지른 일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부분. 허나 동문들의 생각은 다 같지 않아서 무오사화 당시에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힘을 얻었는데 이 때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과 홍한도 이에 동참했다. 그만큼 김일손이 생각없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