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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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일본의 바둑과 명인
2.2. 명인을 둔 경쟁
3. 대국
4. 대국 이후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吐血局. 1835년 아카보시 인테쓰(赤星因徹, 1810~1835) 七단과 혼인보 죠와(本因坊丈和, 1787~1847) 九단의 대국이 종료된 후 인테쓰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 해당 대국에 붙여진 이름. 비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져서는 안 되는 처절한 승부에 붙이기도 한다.


2. 배경[편집]



2.1. 일본의 바둑과 명인[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이후 벌어진 분쟁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해 에도 막부가 설립되면서 일본의 내전은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그런데 시마바라의 난 등 불안요소는 있었고 거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들이 많은 만큼 이들의 관심을 돌릴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둑을 통해 이들의 승부를 칼부림이 아닌 바둑판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막부의 지원을 받으며 바둑이 성장하면서 바둑기사를 전문적으로 배출하는 가문이 생겼으며, 일종의 이벤트 매치로 쇼군덴노 앞에서 어성기를 두기도 했다. 더 나아가 아예 바둑을 전담하는 관리인 기소(碁所)라는 직책이 신설되고 여기에 오른 사람을 명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직책은 그냥 타이틀 같은 명예직이 아닌 기사에 대한 단위를 내려주고[1] 그들을 통솔하는 등 막대한 실권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명인을 두고 벌이는 정치적인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서로 합의해서 명인이 정해지기도 하지만 양쪽 전부 물러서지 않으면 일종의 단두대 매치를 벌여 명인위를 정하는데 이를 쟁기(爭棋)라 한다.

또한 이 명인위가 어느정도 세습 비슷하게 바뀌면서 명인위를 두고 경쟁하는 힘 있는 가문들은 네 개로 좁혀졌는데, 현재의 혼인보 배의 전신이 된 혼인보(本因坊), 이노우에(井上), 야쓰이(安井), 하야시(林) 정도이다. 이들은 서로 이기기 위해 각지의 재능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두거나 아예 입양을 해서 세를 불려나갔다.


2.2. 명인을 둔 경쟁[편집]


1828년, 새로운 명인을 뽑기 위해 다시 각 가문의 경쟁이 시작된다. 경쟁자는 이노우에 11대 가주 인세키(幻庵因碩, 1798~1859)와 혼인보 12대 장문인 죠와, 그리고 야쓰이 가문의 가주 지도쿠(安井知得, 1776~1838)이다. 인세키는 떠오르는 명인 후보로 8단이 되기까지 죠와에게 34승 28패를 거두며 전적에서 앞서나가고 있었고, 죠와는 지도쿠도 버거운 마당에 인세키까지 상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하야시 가문의 가주 겐비(林元美, 1778~1861)와의 협력과 더불어 인세키에게는 '내가 명인이 되면 6년 후에 너에게 명인을 주고 물러나겠다.'는 비밀약속과 함께 명인위에 오르는 동의를 얻어 마침내 명인이 되는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막상 명인이 된 이후로 죠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2] 인세키의 도전도 거부한다. 당시 명인은 자신이 두는 대국을 마음대로 중단하거나 아예 도전조차 받지 않는 권한을 갖고있는데다, 앞서 한 약속에서 인세키에게 불리한 점이[3] 작용하여 인세키는 죠와에게서 명인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인 대신 다른 사람을 도전하게 하여 대신 명인위를 얻고자 했다. 자신보다 단수가 낮은 인물이 현 명인을 이기면 다시 자신이 도전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 그래서 어찌저찌 이노우에가와 죠와의 대국이 성사되고 거기서 자신을 정선으로 5승을 거둔 수제자 인테쓰를 죠와의 상대로 내보낸다.


3. 대국[편집]




4. 대국 이후[편집]




5.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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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인은 유일한 9단이고, 준명인은 8단, 그 외의 강자들은 7단이 된다.[2] 이때 약속에 대한 인질로 잡혔던 자신의 아들까지 죽는다.[3] 약속은 비밀이었지만 명인위에 오르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공개적이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