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몰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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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몰레온
Τιμολέων

파일:티몰레온.jpg

생몰년도
기원전 411년 ~ 기원전 337년
출생지
그리스 코린트
사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지위
시라쿠사 참주
국가
시라쿠사
가족
티모데모스(아버지)
데마리스타(어머니)
티모파네스(형제)
시라쿠사의 참주
재위
기원전 344년 ~ 기원전 337년
전임
소 디오니시오스
후임
민주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시라쿠사 11대 참주. 고대 카르타고의 침략으로부터 시라쿠사를 구하고 민주정이 자리잡을 때까지 참주를 맡았다가 은퇴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코린트의 저명한 귀족인 티모데오스와 데마리스타 사이에서 출생했다. 형제로 티모파네스가 있었다. 기원전 368년에서 366년 사이에 코린트와 아르고스와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형제 티모파네스와 함께 기병으로 참전했고, 전투 도중에 부상당한 사령관을 구출했다. 그 후 도시를 지키는 용병대 지휘를 맡은 티모파네스는 코린트 시의 권력을 쟁취할 야심을 품고, 기원전 365년 코린토의 중앙 구역을 점거한 뒤 참주가 되려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형제의 행동에 분노했다. 처음에는 친구, 처남과 함께 형제를 찾아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자, 물러서서 머리를 가리고 울었고 다른 두 사람이 칼을 빼어 티모파네스를 살해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달하며,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다음과 같은 세부 사항을 추가로 전달했다.

"티몰레온은 옆에서 경비를 서서 어떤 경호원도 형제를 도와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주민들의 의견은 두 패로 나뉘었다. 일부는 그를 참주를 처단하여 도시를 구한 영웅이라고 칭송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를 형제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티모파네스의 지지자들은 그의 행동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심지어 어머니 데마리스타는 아들을 저주하고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법정에 출두한 뒤 자신의 범행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과두제 의회가 대표하는 코린트 정부는 논의 끝에 무죄를 선고했고, 티몰레온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시골로 내려가서 20여년 간 은둔 생활을 했다.

이무렵, 서지중해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라쿠사는 기원전 367년 대 디오니시오스가 사망한 뒤 대혼란에 휩싸였다. 뒤이어 참주가 된 소 디오니시오스는 기원전 357년 삼촌 디온에게 추방당했고, 디온은 기원전 354년 칼리포스에게 암살당했다. 칼리포스는 기원전 353년 히파리노스에게 축출되었고, 히파리노스는 정적들을 제거하고 시민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다가 기원전 351년 사망했다. 뒤이어 집권한 니사이오스는 술 중독에 빠진 채 정무를 돌보지 않고 나약한 모습으로 일관하다가 기원전 346년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축출되었다. 이렇듯 시라쿠사의 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그동안 시라쿠사에게 복종하던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독립하여 참주를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 중 한 명인 히케타스는 레온티노이 시에 군림한 뒤 카르타고 및 시라쿠사 내 반 디오니시오스 세력과 손을 잡았다.

양측간의 무력 충돌이 몇 차례 벌어진 끝에 기원전 344년 히케타스가 시라쿠사 시를 거진반 장악했고, 소 디오니시오스는 시라쿠사 맞은편 바다의 섬 오르티가로 피신해 그곳에서 농성했다. 여기에 카르타고인들은 시라쿠사가 혼란한 틈을 타 시칠리아를 완전 재패하기로 결심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고 모도시인 코린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코린트 정부는 누구를 지휘관으로 삼을 지 논의한 끝에 20여년간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티몰레온을 지휘관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는 코린트 정부의 통보에 따라 10척의 함대와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때 히케타스가 코린트 정부에 서신을 보내 "나는 카르타고 편을 들기로 했다. 만약 시칠리아로 군대를 보낸다면, 카르타고의 강력한 함대가 막을 것이다."라며 원정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코린트인들은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고, 티몰레온의 함대는 시칠리아로 진격했다.

티몰레온이 이탈리아 남부의 레기움에 도착했을 때, 카르타고군은 그리스 함대를 차단하기 위해 대한노 1세가 이끄는 20척의 삼단노선을 파견했다. 카르타고에서 파견한 사신이 그와 접견하여 히케타스와 힘을 합친다면 시칠리아를 분배할 때 코린트에게도 일정 부분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만약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군대를 코린트로 돌려야 했고, 제안을 거부한다면 카르타고 함대가 그를 막아설 게 분명했다. 이에 티몰레온은 레기아인들을 도우러 왔을 뿐 시칠리아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거짓말 해 카르타고 사절과 함대를 속인 뒤 야밤을 틈타 시칠리아로 항해해 시칠리아의 도시 타우로메니아에 잠입했다. 이후 타우로메니아에서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시라쿠사로 진군해, 히케타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시라쿠사 일부를 장악한 뒤 오르티가에서 소 디오니시오스와 만났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히케타스보다는 티몰레온에게 항복하는 편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항복했다. 티몰레온은 그로부터 오르티가를 접수받은 뒤 코린트로 이송시켰다.

대한노 1세가 상륙을 막지 못하자, 카르타고인들은 한노를 소환한 뒤 마고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마고는 5~6만의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카타나에 주둔한 티몰레온이 시라쿠사에 지속적으로 보급해줬기 때문에 함락이 어려웠다. 이에 마고와 히케타스는 카타나를 공략하기로 하고, 최고의 전사들을 선발해 그곳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수비대 지휘관 네온이 포위한 적군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경계가 허술한 점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하여 그들을 도망치게 만든 후, 시라쿠사의 또 다른 지역인 아흐라디나를 점령하여 그 주변의 성벽을 요새화하고 사방에 경비병을 배치했다. 마고와 히케타스는 카타나로 진군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하자 즉시 철수했다.

티몰레온이 시라쿠사를 성공적으로 구했다는 소식에 기뻐한 코린트인들은 10척의 배에 2,000명의 병사와 200명의 기병을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 카르타고는 이를 저지하고자 한노를 이탈리아 해안으로 파견해 그리스의 추가 병력이 상륙하는 걸 저지하게 했다. 그러다가 악천후가 며칠간 지속되자 적이 건너지 못하리라 여기고 시라쿠사로 항해하여 요새를 지나면서, "코린토스군이 바다를 건널 때 격파했다"라고 외쳐서 수비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날이 개었고, 그리스인들은 해협을 지키는 함대가 없는 걸 보고 재빨리 뗏목과 어선에 올라 시칠리아 해안으로 이동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에 상륙한 그리스군과 합세한 티몰레온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시라쿠사에서 카르타고군을 몰아냈다. 마고는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한 끝에 히케타스의 간절한 설득을 뿌리치고 아프리카로 도주했다. 티몰레온은 여세를 몰아 히케타스를 격파해 레온티노이 시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 패배에 격분하여 마고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자신들을 구해낸 티몰레온에게 열광하며 그를 참주로 세웠다.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통치자가 된 뒤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역대 참주들이 세웠던 오르티가 요새와 궁정, 심지어 참주들의 묘비를 모조리 파괴했다. 또한 민주제도가 가미된 새 헌법을 세우게 했으며, 거듭된 내란으로 줄어든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랑민들을 대거 거둬들이고 코린트 시로부터 자원자들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시민 수는 6만 명에 달했다. 그는 이주민들에게 토지와 도시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줬다. 여기에 전쟁 물자와 용병 고용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도시에 세워진 동상을 포함해 모든 기념물들을 팔았다. 이리하여 도시 내에 있던 거의 모든 동상이 제거되었지만, 기원전 480년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물리치고 시라쿠사의 전성기를 연 겔론 1세의 동상만이 보존되었다.

그는 뒤이어 시라쿠사로부터 독립한 도시 국가들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엔기온과 아폴로니아 레피노스를 공략하고 그곳의 참주들을 코린트로 압송했다. 히케타스는 티몰레온이 엔기온을 포위한 틈을 타 시라쿠사를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카르타고의 재침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시칠리아 도시국가들과 군사-정치적 연합을 결성했다. 나중에는 히케타스 역시 계속 티몰레온과 싸워봐야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와 연합하기로 했다. 기원전 341/340년, 티몰레온은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시칠리아 서부에 용병 1,000명을 보내 부유한 지역을 약탈하게 했다. 이후 엔텔라를 정복하고 15명의 카르타고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이후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주요 거점인 릴리바이움을 위협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에 맞서 하밀카르와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의 병력은 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7만 이상의 보병과 1만 이상의 기병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목표는 티몰레온을 격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칠리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티몰레온은 적의 규모를 알게 된 후 적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는 걸 막기 위해 가용한 모든 병력을 모아 시칠리아 서쪽으로 향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보병 6천 명과 기병 천명이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12,000명이었다고 한다. 진군하던 중 천여 명이 압도적인 적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여 달아나자, 그는 나머지 병사들에게 "저 비겁한 놈들이 전투 도중이 아니라 이전에 도망쳤으니 다행이다."라며 독려했다.

기원전 339년, 양군은 크리미소스 강 인근에서 격돌했다. 티몰레온의 군대는 강 근처 언덕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전차와 완전 무장한 보병대가 강을 건너는 걸 보고, 적군이 강을 중간까지 건넜을 때 급습했다. 카르타고군은 적의 첫번째 공격을 확고하게 버텼다. 그런데 갑자기 뇌우가 발생하더니 돌풍과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카르타고인들을 강타했다. 이에 그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지휘관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때를 틈타 맹공격을 퍼부어 적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강이 범람하여 제방을 덮치는 바람에 카르타고군의 사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카르타고군은 패주했고,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추격해 상당수의 적병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티몰레온이 승리의 기세를 몰아 시칠리아 전역을 장악하려 하자, 카르타고의 새 지휘관 기스코는 히케타스를 설득해 그를 적대하게 했다. 히케타스는 티몰레온이 메사나로 보낸 병사 400명과 이에타 지역의 용병 분견대를 살해했다. 티몰레온이 칼라브리아를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히케타스는 시라쿠사를 침공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티몰레온은 군을 돌려 히케타스를 추격했고, 다므리 강변에서 따라잡았다. 히케타스는 그의 군대가 자신을 추격하느라 지쳤고 자기가 먼저 가파른 둑을 선점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보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전투 결과는 히케타스의 패배였다. 히케타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레온티노이 시로 후퇴했으나 곧 군대의 반란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생포된 뒤 티몰레온에게 넘겨줬다. 히케타스와 그의 아들은 폭정을 일삼고 카르타고와 손을 잡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레온티노이 시민들 역시 재판을 벌여 히케타스의 아내와 딸들을 처형했다.

이리하여 히케타스를 끝장낸 그는 뒤이어 카타나로 향했다. 기원전 338년 아볼강 전투에서 카르타고 분견대와 합세한 카타나 참주 마메르코스를 격파했다. 결국 카르타고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티몰레온과 협상한 끝에 갈릭 강 서쪽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시칠리아 동부 참주들과 동맹을 맺지 않기로 했다. 그 후 티몰레온은 모든 참주들을 쉽사리 축출할 수 있었다. 다만 티몰레온이 시라쿠사를 구하려고 시칠리아에 상륙했을 때 처음으로 그의 편을 들었던 타우로메니아의 안드로마네스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종식된 직후, 그는 은퇴를 선언하고 시라쿠사인들이 마련해 준 집에 살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라파스티오스와 트메네티오스라는 인물이 민회에서 티몰레온을 비방하고 그를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시민들은 시라쿠사를 구한 영웅을 비방한 두 사람에게 분노하여 돌로 치려 했다. 그러자 티몰레온이 연단에 서서 그들을 만류했다.

"모든 시라쿠사인은 많은 노동과 의무를 자발적으로 견뎌냈기 때문에, 법적 권리를 원하는 만큼 누릴 수 있소. 그러니 그들의 연사를 방해하지 마시오."


그러면서 자신이 독재자가 되는 운명을 겪지 않게 해주고 시라쿠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준 신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를 탄핵하려 한 두 사람은 이에 감명을 받고 고발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장님이 되었지만 여전히 시라쿠사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병거에 태워서 중앙 광장으로 데려와서 자문을 구했다. 그는 양측의 의견을 경청한 뒤 자신의 의견을 밝혔고, 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했다. 기원전 337년 티몰레온이 사망하자, 시라쿠사인들은 음악, 승마, 체조 대회를 개최해 그를 추모했고, 청소년 활동을 위한 티몰레온테온 광장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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