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빅토리아 호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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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프린세스 빅토리아
3. 사고 당시
4. 사고 이후



1. 개요[편집]


MV Princess Victoria

1953년 1월 31일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향하던 프린세스 빅토리아호가 침몰한 사고. 1953년 북해 홍수를 유발한 폭풍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2. 프린세스 빅토리아[편집]


프린세스 빅토리아호는 1947년에 제작된 선박으로, 제작자는 윌리엄 데니(William Denny)와 브라더즈 오브 덤버튼(Brothers of Dumbarton)이다. 영국에서 4번째로 운항을 시작한 페리선이었다. 무게는 2,694톤에 승객은 최대 1,500명이 탑승 가능했다. 차량은 40대 가량 넣을 수 있었다. 운행했던 6년 동안 주로 노스 해협을 가로질러 스코틀랜드의 스트랜라(Stranraer)와 북아일랜드의 란(Larne)을 오고 갔다.

특이사항으로, 프린세스 빅토리아 호는 당시로썬 최신 기술이었던 카 페리선이었다. 지금이야 카 페리는 흔하지만, 당시는 차를 끌고 배 안에 탑승한다는 일 자체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운전자가 선미의 램프로 차를 운전해 배 안에 주차하면 1.7m 높이의 문이 닫혔다.


3. 사고 당시[편집]


당시 배엔 179명이 탑승했었다. 선장은 55세의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으로, 스트랜라와 란을 17년 간 배로 오고간 경력이 있었다. 라디오 담당은 데이빗 브로드풋(David Broadfoot)이었다.

사고 당일, 강풍과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배는 오전 7시 45분에 란에서 스트랜라로 출발했다. 원래 예정보다 45분 늦게 출발했다. 승무원 51명, 승객 128명이 탑승했는데, 날씨가 나빠서 예약을 하고도 타지 않았던 사람들이 좀 있었다. 짐은 차를 비롯해 44톤 가량 실렸었다.

배는 코스대로 잠시 라이언 호(Loch Ryan)에 들렸다. 그런데 날씨가 더 나빠지고, 풍랑이 거세졌다. 9m 높이의 파도에 배가 너무 흔들려 사람들이 넘어질 정도였다. 오전 9시, 퍼거슨 선장은 배를 되돌려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심한 풍랑 때문에 페리의 메인 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엄청난 양의 물이 들어왔다. 풍랑 때문에 배가 흔들리고, 안의 물마저 거세게 흔들리자 배가 점차 위험해졌다. 퍼거슨 선장은 인근에 예인선을 요청해 배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배가 계속 흔들려 사람들이 아예 내던저지는 상황에서, 선장은 란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선장은 배를 돌렸으나, 돌리는 과정에서 파도에 다시 한번 부딪히면서 피해가 더 커졌다.

오전 10시,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으라 했다. 배는 인근 배에 SOS신호를 보냈다. 인근을 지나던 배 포트패트릭(Portpatrick)과 도나하디(Donaghadee), 그리고 구축함 HMS 콘테스트에서 구조 신호를 받고 배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바람이 시속 190km로 부는 심각한 날씨와, 아직 엔진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SOS신호를 보낸 지점에서 5마일 가량 떨어져, 신호를 받고 출발한 배들이 프린세스 빅토리아 호를 찾지 못했다.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최대한 승객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오후 1시 58분 경엔 배는 거의 90도 각도로 기울었고, 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승객들 태우려 급히 구명보트를 내렸으나, 배가 너무 기울어 한 쪽 만 내릴 수 있었다. 아이와 여자가 먼저 구명보트에 탑승해 내려보내졌다. 하지만 풍랑이 워낙 거세 구명보트마저 뒤집혔다. 다른 배에서 구명보트를 내보냈지만, 파도가 너무 거세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현장에 도착한 배들은 일단 구명보트를 내려 보내고, 구명보트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안가 프린세스 빅토리아호는 이미 수심 96m 아래로 침몰한 뒤였다.

탑승객 중 단 44명만 살아남았다. 154명은 사망했다. 선장도 배와 운명을 함께했고, 다른 모든 승무원들도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사망자 중엔 북아일랜드 부총리도 있었다. 먼저 보내진 여성과 아이들이 탑승한 구명정이 뒤집혔던 바람에, 생존자 중 여성과 아이는 한명도 없었다. 사고는 2차대전 이후 영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해상 사고로 기록됐으나, 이 기록은 이후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에게 깨졌다.


4. 사고 이후[편집]


라디오 담당이었던 데이빗 브로드풋은 목숨을 걸고 승객들을 탈출시키려 했기에, 사후 조지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현재 그가 받은 조지 십자장은 스트랜라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구조를 도왔던 배의 승무원들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HMS 콘테스트 장교들은 조지 십자장을 받았다.

승객들을 구조했던 도나하디 호의 구명보트는 현재 울스터 포크 박물관(Ulster Folk and Transport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침몰한 곳이 수심이 깊은 곳이라, 당시 기술로는 힘들어서 인양 작업은 포기됐다.

스트랜리와 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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