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아 도미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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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플라비우스 왕조의 공주, 가톨릭정교회 성인.


2. 상세[편집]


아버지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는 일찍이 베스파시아누스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베스파시아누스가 네 황제의 해 최종 승자가 되는 데 일조했으며 바타비아 반란 진압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후 70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71년 브리타니아 총독을 맡아 잉글랜드 북부에 거주하는 부족인 브리간테스 족을 토벌했으며, 74년 두 번째로 집정관을 역임했다. 또한 어머니 소 도미틸라는 베스파시아누스와 대 도미틸라의 딸이다. 형제로 83년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가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이며 47년 보결 집정관을 맡고 62년부터 68년까지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도시 치안관)를 역임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손자이자 72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결혼했다. 6촌 형제와 결혼한 셈. <라틴어 비문 모음(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에 기재된 비문에 따르면, 두 부부는 이름이 티투스 플라비우스로 동일한 2명의 아들을 포함한 7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동시대에 활동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클레멘스의 아주 어린 두 아들을 잠재적인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들의 이름을 도미티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한 퀸틸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의 여동생의 두 손자의 후견인을 맡았다고 기술했다. 일각에서는 도미티아누스가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하자 두 아이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지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탈무드에 따르면, 클레멘스[1]는 랍비 아키바와 깊은 교류를 맺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안으로 이동하는 선박에서 이뤄졌다. 강한 폭풍이 배를 위협하고 있을 때, 그는 아내를 갑판 아래로 데려가던 중 아키바가 간판 위에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폭풍이 잠잠해지자, 그는 이에 깊은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아키바의 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아키바의 전도를 받아 아내와 함께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도미틸라는 순교자들을 위한 지하 묘지 '카타콤베 디 도미틸라(Catacombe di Domitilla)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 측에서는 클레멘스와 도미틸라가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믿었다고 본다. 서기 1세기의 로마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아직까진 유대교의 분파로 볼 뿐 다른 종교로 취급하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기독교인인데 '유대인의 관습을 받드는 자'로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2]

95년 1월, 클레멘스는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4월에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에개 직임을 넘겼다. 그러나 그 해 5월에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유대인의 관습에 이끌려 무신론자( άθεότης)가 된" 혐의로 긴급 체포된 뒤 사형에 처해졌으며 아내 도미틸라는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을 주동한 스테파누스가 도미틸라의 집사였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는 저서 <교회사>에서 도미틸라가 클레멘스의 아내가 아니라 딸이며 폰티아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기술했다. 히에로니무스, 게오르기오스 싱켈로스 등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를 참고한 후대 역사가들도 도미틸라를 클레멘스의 딸로 표기했다. 5~6세기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성 네레우스와 아켈리우스의 행전>은 도미틸라를 클레멘스의 조카딸이자 처녀로 기재하면서, 도미틸라가 로마 다신교를 섬기는 약혼자에게 처녀성을 바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로 하자 약혼자에게 고발당해 폰티아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테라치나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처형되었다고 기술했지만 신빙성은 없다. 일부 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에게 추방당한 도미틸리가 2명이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에우세비우스가 고대 사료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서 클레멘스의 아내를 딸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가톨릭정교회는 도미틸라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각각 5월 7일과 5월 12일을 그녀의 축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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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무드에서는 켈로메노스(Kelomenos)로 명기되었다.[2] 후대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기독교와 유대교가 결별하기 시작한 계기는 서기 70년에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부자의 예루살렘 정복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정복을 기준으로 칼로 자르듯이 기독교와 유대교가 결별한 것은 아니다. 마치 후대의 관점에서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395년을 기점으로 동로마서로마가 갈라졌다고 하지만, 당대에는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두 후계황제한테 담당구역을 나눠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