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뢰

최근 편집일시 :

韓賴
(1141 ~ 1170)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고려 중기의 문신. 사망 당시 품계는 종5품.

의종, 김돈중과 함께 무신정변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좀 더 정확히는 김부식과 앞의 두 명의 3인방이 오랫동안 무신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온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라면, 한뢰는 그것을 터뜨리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1170년 2월에 의종이 연복정에 행차하자 풍악을 울리면서 뱃놀이를 했으며, 3월에도 뱃놀이를 하면서 연회를 했고, 5월에는 의종이 잔치를 베푼 후에 따로 또 작은 연회를 베풀어 이복기와 그에게 붉은 가죽띠, 물소뿔로 만든 혁대를 하사했다. 이후 7월에도 보현원 남쪽 시내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술판을 벌이고 시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8월.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 도중에 무신들의 오병수박희 대회를 열었다. 이 때 종3품의 대장군 이소응이 지쳐서 나가떨어지자 한뢰가 냅다 이소응의 뺨을 후려쳤고, 그걸 본 문신들과 의종은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우대받고 있었다 해도 이소응은 정말 무신들의 원로였고 나이도 품계도 한뢰보다 훨씬 높았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나선 안 될 하극상이 일어난 거다.

이에 분노한 정중부가 의종 앞에서 한뢰의 멱살을 잡고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지만 너보다 나이도 많고 품계도 높은데 그럴 수 있냐?"라고 일갈하자 의종이 정중부를 말리고 한뢰에 대한 처벌은 어물쩍 넘어가버린다. 어쩌면 이게 무신들의 화를 더 끌어올렸을지도 모른다. 분명 잘못을 저지른 한뢰를 의종이 오히려 두둔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보현원 사건에서 소수지만 같은 무인들끼리 전투가 벌어진 걸 생각하면, 만약 한뢰의 행패와 의종의 두둔만 아니었어도 몇 시간 뒤 보현원에서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정변이 시작되자 문신들이 학살되기 시작했고 이복기 등은 곧바로 잡혀 죽었는데 한뢰는 도망쳐서 의종에게 가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한 뒤 용상 밑에 숨었다. 이후 한뢰를 쫓던 정중부가 무신들과 함께 무장을 하고 들어와서는 의종한테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설명하면서 "그런데 문신이 아직 하나가 남았는데요?"라며 한뢰를 내놓으라고 돌려 말하니 의종이 모르쇠로 일관하니까 "용상 밑에 한뢰가 있잖아요?"라며 대놓고 얘기했다. 그리고 의종이 미적거리는 사이 이고가 들어와서 용상 밑에 숨은 한뢰를 끌어내 칼로 그를 참수하면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한뢰는 의종한테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의종도 무장하고 들어와 살벌하게 나온 무신들을 보고 겁을 먹은터라 어찌할수가 없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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