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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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종순(韓鍾淳)
생몰
1893년 11월 2일 ~ 1932년 5월 30일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동
사망지
경상남도 함안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한종순은 1893년 11월 2일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동에서 함안 지역 유지 한태규(韓泰奎)[1]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강기수(姜琪秀), 박건병(朴建秉)[2], 조한휘(趙漢輝), 조병흠(趙丙欽), 한관렬 등과 함게 함안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인근의 비봉산에 올라가 고천제(告天祭)를 올린 후 곧 하산하여, 봉성동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자 구타했다.

이어 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이후 체포된 그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2년 5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종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09년 1월 애국계몽단체 대한협회의 함안군지회 및 칠원군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그해 2월 함안군지회 평의원에 취임했다.# 1911년 9월 공립함안보통학교 학무위원에 취임했다.# 1913년 2월 12일, 1912년 1월에 함안공립보통학교 부지 매수비용으로 28엔 71전을 기부한 것으로서 조선총독부로부터 나무잔을 하사받았다.# 1915년 12월 23일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에 임명되어#, 1917년까지 역임했다. 1917년 12월 7일 함안지방금융조합 조합장에 취임하여# 이후 1929년까지 지냈으며#, 그 사이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함안군 함안면장을 지냈다.#[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건병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