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 2: 거짓말하는 꽃/아이템

충성을 보여라!
너의 몸의 일부를 잘라서!
제구를 만들어라.

1998. 07. 14

김지원 선생이 내게 도자기를 맡겼다. 그런데 교측에서 어떻게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나에게 생령 단지라는 것에 대해 떠보기 시작했다. 내가 김지원 선생과 교류하며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단지가 어디 있는지 정보를 넘겨주면 재단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까지 해왔다.

대체 재단 측에서 이토록 바라는 생령 단지란 무엇이며 거래 조건으로 내걸은 재단의 일원이라는 자리는 어떤 자리란 말인가.
난 아직 이 학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군.

과학 선생 보시게나. 나 생물 선생 이도형이네.
자네도 요새 신관과 본관을 잇는 연결 통로에 관련된 흉흉한 소문들을 알고 있을 테지.

연결 통로로 간 학생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지. 난 그 소문들이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해왔었네. 바로 어제까지는 말일세.

밤늦게 연결 통로를 지나고 있는데 함께 가자는 속삭임이 들려오더군. 속삭임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어. 나는 급히 달렸지. 속삭임이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순간, 난 겨우 통로를 벗어났다네.

소문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야.
밤에는 학생들의 출입을 막아야겠어.
해결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각각 배전반의 부품을 빼서 관리하는 게 좋겠네.
나는 생물실에 보관할 테니 자네는 과학실에 보관해주길 바라네.

밤에 병원을 순찰하는데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시체 보관 냉장고 안에서 손이 나오더니 시체의 머리 부분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사라진 머리라도 찾듯이 말이다.
그날 이후로 종종 시체 보관 냉장고의 손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혹시 사라진 머리를 찾아다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참수형을 진행하는 사람을 망나니라 칭한다.
망나니의 아들로 태어난 남자는 자신의 출생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나 폐쇄병동에서의 인체 실험이 성공하여 시력을 되찾았다.
그 이후로 그는 폐쇄병동을 지키는 간수가 되었으며 조직에 무한한 충성심을 보였다.

간수 영감은 신단수의 파수꾼이다.
원래 간수 영감은 가축을 도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죽을 병에 걸려 폐쇄병동에 실험체로 끌려왔을 때는 살아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수많은 실험을 견디고 살아나자 골인귀는 영감에게 간수 일을 맡겼다.

실험체의 뒷처리에 있어서 간수 영감의 실력은 최고였다.
나무를 분쇄할 때 사용하는 기계로 실험체를 처리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신단수의 관리도 맡게 되자 간수 영감은 흘러버렸던 피를 모아 신단수에게 주기 시작하였다.
피를 먹은 신단수가 잘 자라자 골인귀 이사장은 매우 흡족해 했다.

1931년 2월 17일
골인귀 이사장은 정월 첫날을 기념하여 식수 행사를 진행하였다.
특이하게 지하에 있는 폐쇄병동 옆에 큰 공간을 만들어 나무를 심었다.

식수 행사를 마친 이사장은 오늘 심은 나무는 신단수라며 그 무엇보다 소중히 지킬 것을 명령했다.
신단수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 경고했다.
하지만 이 지하에서 나무가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31년 2월 26일
최근 들어 폐쇄병동에 방문자가 늘었다. 지금까지 골인귀 이사장 말고는 폐쇄병동에 들어왔다가 살아서 나간 사람은 없었다.
방문자들은 지관과 무당들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신단수의 상태를 살피고 제를 올렸다.
가장 영기가 강한 무당은 신단수는 영계의 통로를 열어준다며 그 비밀이 풀리는 순간 영생의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1931년 3월 7일
지관과 무당들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신단수가 부쩍 시들어 버렸다.
골인귀 이사장이 역정을 낼 때마다 지관과 무당들은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신단수가 죽게 된다면 저들은 폐쇄병동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1931년 3월 14일
지난 밤 우둔한 놈이 학교에 몰래 들어왔다. 그 놈은 동네 어귀의 거렁뱅이로 음식을 훔치러 학교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어찌하였는지 지하로 들어오는 문을 열고 폐쇄병동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 우둔한 놈은 운이 없게도 간수 영감에게 붙잡혔고, 간수 영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렁뱅이를 죽여 분쇄기로 갈아버렸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곱게 갈려진 거렁뱅이를 신단수에 뿌렸다.
큰일이다. 신단수에 저런 부정스러운 것을 뿌리다니 골인귀 이사장이 알게 된다면 간수 영감은 죽은 목숨일 것이다.

1931년 3월 16일
간수 영감은 골인귀 이사장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분노한 이사장은 당장이라도 간수 영감을 찢어 죽일 기세다.
무슨 생각으로 신단수한테 불손한 짓을 한거냐며 추궁하는 이사장에게 간수 영감은 공손히 말했다.
신단수가 피를 마시고 싶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했다고.

이사장은 격노했다.
신단수가 죽기라도 하면 사지를 찢어 죽일 거라며 영감을 독방에 가두었다.

1931년 3월 19일
간수 영감이 풀려났다. 거렁뱅이의 피를 먹은 신단수가 되살아났다.
골인귀 이사장은 신단수의 관리를 간수 영감에게 일임하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신단수에게 사람의 피를 먹이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신단수를 먹일 만큼의 피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폐쇄병동의 실험을 더 많이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1931년 5월 5일
실험이 거듭될 수록 신단수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폐쇄병동은 이미 실험체로 가득 찼다.
한 병동에 여러 명의 실험체를 수용하였다.
어디서 이 많은 실험체를 데리고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실험체 중에는 어린 학생이 가장 많았다.
폐쇄병동 지상에 있는 학교에서 데려오는 것일까?

골인귀 이사장은 신단수에 깨끗한 피만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특정 약물 또는 병원체 실험을 했을 경우에는 피를 사용할 수 없다.
이렇게 피를 사용할 수 없는 실험체는 사망 진단을 내리자마자 소각시키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은 연구원의 몫이다.

열세 번째 병원체 실험체인 238번이 사망했다.
다른 실험체의 전염을 막기 위해 즉시 소각실로 이동하였다. 소각로의 문을 닫고 불을 지폈다.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병동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생각하고 화력을 최대로 올렸다.
그러자 소각로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명 사망한 실험체였다. 사망 진단에 실수는 없었다.
급히 소각로 문을 열자 불에 탄 실험체는 아직 살아 있었다.
실험체는 큰 숨을 내쉬더니 이내 사망하였다.

그 뒤로 가끔 소각로에서 꿈틀대는 238번을 목격하였다.

내가 죽였다. 이 많은 사람들을.
처음에는 대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한 숭고한 실험에 참여하는 거라고.
골인귀 이사장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인체 실험의 목적은 골인귀 이사장의 영생을 위한 사리사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죽은 자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난 내가 죽인 이들의 이름을 모았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이곳에 잠들겠다.

최근 들어 치료실에 입원한 환자들의 광증(狂證) 발생 빈도율이 높아졌음.
인체 실험 중 투입한 신경안정제의 배합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유추됨.
광증(狂證) 환자의 발생률이 높아질수록 환자 관리의 어려움이 야기됨.
의료진의 희생이 따를 수 있으니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 대책이 필요함.

최근 탈출을 시도하는 실험체들이 늘고 있음에 경계를 각별히 주의하길 요망함.
특히 지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부적 동판의 관리에 특히 주의해야 할 것.
부적 동판은 우리 연두 재단의 신성한 주술적 의미를 담아 열쇠로 제작한 것이므로
탈출을 시도하는 실험체들이 늘고 있는 작금의 사태가 아니더라도 귀중히 여겨야 할 물품임.

명대로 하겠습니다.

2000. 01. 20

무당이 알려준 절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스님은 이 항아리가 오행의 기운을 재배치해서 사람의 뼛가루를 섞어 만든 거라고 하셨다.
또한 항아리 안에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을 넣으면 그 사람의 혼을 가두거나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물건이라고 했다.
만약 항아리 속에 사람의 혼이 가둬진 채로 항아리를 깨버린다면, 그 사람은 미궁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김지원 선생은 왜 이런 것을 만든 거지.

학교에서 심령 사진을 찍으려는 시도 중에 우연히 유영오 교장 선생님을 촬영했다.
그런데 기이한 게 찍혔다. 교장 선생님의 머리 옆에 몸에서 뻗어 나온 머리가 영혼의 형태로 하나 더 있는 광경이었다.
인화한 사진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교장 선생님한테 들켜버렸다.
교장 선생님은 불같이 화를 내며 사진을 뺏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기껏 손에 넣은 심령 사진을 잃은 건 아쉽지만 오컬트부원으로서의 학구열이 치솟는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혹시 교장 선생님한테 생령이 씌인 건 아닐까?

생령은 일반적인 귀신하고는 다르다. 생령이란 살아있는 자의 영혼을 뜻하는 단어다.
내가 교장 선생님에게 생령이 씌인 게 아닐까 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교장 선생님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이 성격이 변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중얼중얼거리는 것도 종종 목격되었으며 전에 했던 이야기를 잊어버리는 일도 잦았다.
이런 교장 선생님을 두고 다른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은 건망증이 심하고 조금 특이한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만약 교장 선생님에게 살아있는 자의 영혼이 씌인 거라면 이야기가 맞아 떨어진다.
일반적인 귀신과는 다르게 살아있는 자의 영혼이 몸에 씌인 경우에는 몸의 주도권을 나눠가지자고 타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오랜 시간 동안 귀신이 몸에 씌인 상태가 되고도 이상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 사용을 마쳤다면 무용실로 가져와 주세요.

2000. 01. 18.

결국 난 항아리를 가지고 신들렸다는 용한 무당을 찾았다.
무당은 내가 항아리를 품에 안고 들어올 때부터 항아리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니 썩 가지고 꺼지라고 했다.
나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이 항아리의 정체를 어떻게라도 알 수 없겠냐며 무당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무당은 종이에 절의 이름을 적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