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 빅 게임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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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빅 게임 참사.png

1. 개요
2. 사고 당시
3. 사고 이후
4. 유사 사고



1. 개요[편집]


1900 Big Game Disaster
Thanksgiving Day Disaster

1900년 11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붕괴 사고.


2. 사고 당시[편집]


빅 게임은 미국 풋볼단 스탠포드 카디널(Stanford Cardinal)과 칼 버켈레이 골든 베어스(Cal Berkeley Golden Bears)간의 매치를 부르는 말로 1892년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행사다.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풋볼 경기 중 하나다.

1900년 추수감사절 오후 2시 30분에 레크리에이션 파크 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도 그 인기를 자랑하듯이 경기 시작 4시간 전인데도 수많은 인원이 모였다. 당시 표를 1달러씩 팔았고 당시 기준으로 저렴하다 하기 힘든 가격임에도 표가 완판될 정도였다. 당연히 경기장은 19,000명의 관중들로 가득 찼다. 그러자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갔다.

파일:빅 게임 당시.jpg
레크레이션 파크 경기장 바로 옆에는 샌프란시스코 앤 퍼시픽 유리 가공 공장(San Francisco and Pacific Glass Works)이 있었다. 이 공장은 5층 정도의 높이로, 경기장 보다 훨씬 높아 이론상 이 위에선 경기장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표를 못 구한 사람들이 공장 지붕 위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할 시점엔 400명이나 모여들어 지붕이 꽉 찼을 정도였다. 문제는 지붕을 만들 땐 사람이 모여드는 걸 감안하고 만든게 아니었다. 지붕 자체의 무게와 때때로 오는 비의 무게를 버티기엔 충분했으나, 수많은 사람을 버티지는 못했다. 공장 측에서도 이건 당연히 알고 있었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막으려 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막는 데 실패했다. 경비를 불러 해산 시켜도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위험성도 모른 채 "이거 무너지면 다 같이 죽는거야.(If this thing breaks we all are gonna down together)"라 농담까지 했다. 공장 사람들은 결국 경찰을 불렀다.

그런데 얼마 안가 4시 50분 쯤, 사람들의 무게를 못 이긴 지붕 한쪽이 무너졌다. 그 위에 있던 100여명의 사람들은 공장 안으로 추락했다. 하필이면 당시 공장이 가동중이었고, 사람들은 용광로와 기계 위로 떨어졌다. 사람들에 맞은 기계의 호스가 끊겨 뜨거운 기름이 튀었고, 사람들은 추락하면서 부상을 입고 기계 때문에 화상까지 입었다. 용광로는 불순물이 들어가면 안 돼서 철제 덮개로 덮은 상황이긴 했으나, 덮개가 안 뜨거운 건 아니었다. 당시 용광로는 섭씨 1648도의 온도로 돌아가며 유리를 녹이는 중이었고, 덮개도 그만큼 뜨거웠다. 그 위로 떨어진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한 공장 인부는 "사람이 구워지면서 죽었다.(human beings roast to death.)" 라 말하기도 했다.

공장 직원들은 사고를 목격하고 바로 기계를 끄고 공장에 널부러진 부상자들을 구출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소방대가 도착했으나, 아직 기계가 식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 위에 떨어져있어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다 부상자 수에 비해 구급차가 적었다. 부상자들은 구급차 외에 급히 대여한 인근 주민의 자가용과 마차 등으로 병원에 옮겨졌다. 한 소방관은 뉴스 인터뷰에서 "전쟁을 겪어본적이 있는데, 지금 상황은 전쟁보다도 끔찍하다." 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사고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가장 어린 사람은 9살의 로렌스 미엘(Lawrence Miel)이었다. 한 부상자는 3년간 병원에 지내며 절단수술까지 받으며 연명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사고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스포츠 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편집]


경기 자체는 사고 당시 굉음 때문에 잠시 멈췄으나 계속 진행됐다. 거기다 굉음이 난 곳도 공장이라 평소 소음이 잦았기에, 평범한 공장 소음으로 착각한 이들도 많았다. 경기는 스탠포드가 5점, 칼 버켈레이가 0점을 획득하며 스탠포드 측이 승리했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사망자가 크게 나온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관심이 다소 적어 반응이 반으로 나뉘었다. 한 언론은 사고를 크게 보도했으나, 다른 언론은 경기 결과를 먼저 알려주면서 사고는 당시 있었던 해프닝 정도로 소개했다.

사고 이후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조의금을 전달하기 위핸 리매치 경기가 크리스마스에 열린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다.

사고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공장 지붕 자체는 튼튼하게 지어졌고, 단지 사람들이 잔뜩 올라가는 사태를 예상 못했을 뿐이었다. 공장 직원들도 사람들이 올라가는 걸 막으려 경비는 물론이고 경찰까지 부른 상태였다. 공장측은 사건을 막으려 애쓰다 애꿎은 건물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고, 이 사고의 가해자들은 사상자들이었다.

경기장은 이후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무너진 뒤 철거됐다.

인근 홀리 크로스 공동 묘지엔 희생자를 기리는 묘비가 세워져있다.#


4. 유사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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