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 아이브록스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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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아이브록스 붕괴.jpg

1. 개요
2. 상세
3. 이후
4. 유사 사고



1. 개요[편집]


1902 Ibrox Disaster

1902년 4월 5일 스코틀랜드 아이브록스 파크(현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관중석이 붕괴한 사고.


2. 상세[편집]


당일 오후 3시 30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이 열렸다. 선수 전원이 프로선수인 역사상 첫 경기였고, 그만큼 팬들의 기대도 컸기에, 경기장에 68,000명에 달하는 관중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당시 관중석은 철근 위에 목재로만 만들어진 구조라 이 수많은 인원을 감당하기엔 부족했다. 거기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목재로 지을 땐 좀 더 튼튼한 적송을 썼으나, 덜 튼튼한 황송을 사용했다. 이렇게 짓는게 가격이 더 저렴하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지어진 관중석이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이니 약해진 상태였는데, 경기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경기를 조금이라도 더 앞에서 보겠다며 몰려들자 한쪽에 더 무게가 가해지면서 관중석이 버티지 못했다. 조인트 17개가 부서지면서 18m 크기에 달하는 큰 구멍이 생겼다. 관중들도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오후 4시경, 한쪽이 무너졌다. 수백명의 관중들이 12m 밑으로 추락했다.

사고를 본 인근 관중들은 충격에 빠져 관중석에서 빠져나왔다. 아예 경기장까지 내려간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 워낙 집중한 건지 사고를 못알아챈 관중들도 많았다.

이 사고로 25명이 사망하고 587명이 부상을 입었다. 2명은 현장에서, 23명은 치료 도중 사망했다.


3. 이후[편집]


사고에도 불구하고 약 20분간 경기를 멈춘 뒤, 경기를 계속 진행했다. 갑자기 경기를 취소하면 사람들이 빠져나오면서 부상자들을 구하러 가기가 더 힘들다는 이유였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FA측에서 이를 공식 경기로 인정하지 않아 5월 3닐 버밍엄의 빌라 파크에서 재경기가 열렸다.

2년 전에 관중석을 건설했던 건설업자는 구속되었으나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은 이 사고 이후에도 사건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1971 아이브록스 참사가 있다.

현재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는 두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4. 유사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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