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 아이브록스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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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고 당시
3. 사고 이후

파일:아이브록스 참사.jpg
(사고 당시 무너졌던 난간)

1. 개요[편집]


1971 Ibrox Disaster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일어난 참사. 1902년 4월 5일에 일어난 1902 아이브록스 참사1971년 1월 2일에 일어난 참사가 있다. 이 문서에서는 1971년에 일어난 참사를 다룬다.


2. 사고 당시[편집]


1971년 1월 2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셀틱 FC레인저스 FC올드 펌 더비 경기를 치렀다. 당시 무려 8만명의 관중이 경기장에 들어섰다. 관중 중에는 케니 달글리시도 있었다. 경기는 0-0으로 치열하게 공방이 이뤄졌다. 그러던 후반 44분 셀틱 FC의 공격수 지미 존스톤이 골을 넣으면서 셀틱이 승리하는 듯 했다. 그런데 경기 종료 직전 레인저스 FC의 공격수 콜린 스타인이 골을 넣으면서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동점골로 끝나게 되자 양측의 팬들은 흥분했고, 동쪽 스탠드의 관중들과 경기가 끝났다 생각하고 나가던 관중들이 동점 골 소식에 다시 입장하면서 사람이 너무 몰려버렸다. 결국 사람이 너무 몰린 나머지, 출입구와 바로 붙어있던 13번 계단의 철재 난간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넘어지고 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람 위에 사람이 깔리고, 그 위에 사람이 깔리면서 최대 180cm나 쌓였다.

결과적으로 66명이 사망하고 1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9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사망자 수가 가장 많았던 축구 참사였다.

사망자는 전부 50세 이하였고, 그 중 절반 이상이 19세 이하의 청소년이었다. 최연소 희생자 나이젤 피컵은 당시 겨우 8살이었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생에 처음으로 경기장을 방문했다가 변을 당했다. 사망자 중 피터 이스턴, 마틴 패튼, 메이슨 필립스, 브라이언 토드, 더글러스 모리슨은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사망자 중 유일한 여성은 마거릿 퍼거슨으로, 경기가 열리기 전 막 태어난 콜린 스타인의 딸 니컬라를 위해 테디베어를 만들어 선물한 적이 있는 셀틱측의 팬이었다. 스타인과 그의 아내가 집에 마거릿을 초대해 같이 차를 했을 정도로 친했던 사이였다.


3. 사고 이후[편집]


사고 후 1년간 조사와 재판이 진행된 뒤, 1973년에 "그린 가이드(Green Guide)가 정해져 스포츠 관중들의 안전을 지키게 됐다. 이후 올드 펌 더비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는 일은 줄었다.

아이브록스 스타디움 정문엔 존 그레이그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유가족과 팬들은 이 곳에서 기리고 있다. 동상 밑의 벽돌에는 1902년에 일어난 참사의 희생자와, 1961년에 있었던 계단 붕괴로 숨진 사망자의 이름, 그리고 1971년에 일어난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2010년 레인저스의 서포터들이 사고 40주기를 맞이해 리버풀 서포터스와 함께 나이젤 피컵의 무덤을 찾아 작은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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