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중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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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중원대전
二次中原大戰
The Second Great War of Zhongyuan

시기
기원전 295년
장소
위나라 중원일대
원인
위의 관중경략과 그 의도를 읽어낸 진이 조선과 밀약을 맺고 대응
위가 보인 외교적 결례로 인한 한의 분노
교전국
조선朝鮮
진秦
한韓
위魏
송宋
제齊[1]
지휘관
대사마대장군 하기
좌장군 악의
위장군 양수
한단군수 조사
임치군수 염파

진 우서장 사마착
진군 지휘관 상수
객장 아탈란테[2]

한군 지휘관 신차
위 대부 망묘
위 서하군수 초사
위 평양현령 임홍
위 고도성주 위경
위 조가성주 몽오

송군 지휘관 당앙

제군 지휘관 전교사
제 장군 전단
병력
조선 하동진공군 10만
조선 하남진공군 8만
조선 순우 주둔군 2만 3천
조선 극현 주둔군 1만 2천
조선 극현 지원군 9천
조선군 총합 22만 4천

진군 2만 6천
한군 1만 2천

총합 26만 2천
위 관중진공군 6만 8천
위 조가주둔군 1만 7천
위 고도주둔군 1만 5천
위 단씨주둔군 1만 1천
위 하남방어군 2만 2천
위 안읍탈환군 1만 6천
위 평양주둔군 6천 3백
위군 총합 15만 5천

송군 2만 5천
제군 2만 7천

총합 20만 7천
피해
조선군 약 2만 2천
진군 약 3천
위군 약 3만 2천
송군 약 5천 2백
제군 약 3천 8백
결과
조선과 진, 한 3국 연합의 승리
영향
조선의 주도하에 진, 한, 위, 주가 포함된 연종 성립
초, 제와 송에게 합횡의 건재함을 알리며 연종 견제
연종과 합횡의 대립
1. 개요
2. 배경
2.1. 위의 사정
2.2. 진의 사정
2.3. 한의 사정
2.4. 조선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흉노의 배신
3.2. 위군의 진군과 낙수도하전
3.3. 조선군의 진군
3.4. 조가전투
3.5. 고도전투
3.6. 대량 조선군의 하남침공에 원군을 청하다
3.7. 단씨전투
3.8. 위 하남방위군 조직완료 및 송,제의 반응
3.9. 약양전투
3.10. 하기의 전격전, 피뢰 항복하다
3.11. 천문전투
3.12. 하동침공 소식을 들은 망묘
3.13. 임홍의 오판과 안읍의 항복
3.14. 조선 하남진공군 하수를 넘다
3.15. 순우전투
3.16. 평양전투, 평양성의 필사적 저항
3.17. 신강전투
3.18. 야왕의 상황파악
3.19. 망묘의 선택
3.20. 대량의 상황파악
3.21. 평양함락, 그리고...
3.22. 송군의 합류
3.23. 한가로운 초나라
3.24. 염파 제나라의 진공을 눈치채다
3.25. 극현전투
3.26. 하기와 망묘의 협상
3.27. 소황전투[3]
4. 결말
4.1. 위나라의 항복
5. 전후처리
5.1. 조선의 협상안 정리
5.2. 황지회담 과 연종성립
5.3. 위의 책임추궁
5.4. 진과 한의 반응
5.5. 초의 반응
5.6. 제와 송의 반응
6. 영향
6.1. 조선 고립을 타파하고 중원제일국이 되다
6.1.1. 논공행상
6.2. 진 연종과 합횡사이 줄타기
6.3. 한 삼천판도의 완성을 노리다
6.4. 위 후계자 분쟁의 조짐



1. 개요[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295년 조선과 진, 한 삼국연합이 중원 일대에서 합횡군과 맞붙은 전쟁이다. 진, 한 측이 각자의 사정 때문에 개별적으로 조선에 밀사를 보내 위 공격을 요청하였고, 이를 5년 전 하남대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외교적 고립을 타파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조선 측에서 적극 호응하면서 발발하였다.

전쟁은 조선, 진, 한 삼국연합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결과 승리한 삼국은 위나라의 영토를 잠식하고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반면 합횡 측의 경우 패배한 위나라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어 2차 서하대전산동대전을 통해 중흥을 이루기 이전, 혹은 그 미만으로 축소되었으며, 위나라를 적극 도운 송나라 역시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제나라는 조선의 시선이 위나라로 쏠린 틈을 타 산동대전에서 상실한 영토를 일부 회복해 옛 수도인 임치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하였지만, 위나라의 합횡 이탈로 향후 조선 측의 어그로가 집중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2. 배경[편집]



2.1. 위의 사정[편집]


기원전 297년, 위나라 서하군의 태수이며 위 제일의 명궁이었던 대장군 경리가 저격을 당해 사망하고 그 일대가 어수선해지자, 진상은 둘째치고 주변 지역을 진정시킬 필요가 생긴 위 조정은 그나마 추린 후보 중 연륜과 용력을 자랑하여 일대의 위무에 적임이었던 대부 초사를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임으로 부임시킨다. 동시에 이러저러한 자체조사 결과 경리를 저격한 자는 흉노 측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4]

위는 하남대전 이후 합횡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외교적으로 공을 들여왔다. 송 왕실과 혼인을 맺고 한나라에 식량을 지원해주었으며, 하남대전에서 조선이 패배한 뒤에야 굴복하고 합횡에 들어온 진나라에도 조선군이 철수한 음진 일대의 영유를 인정하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5] 또한 진나라의 실세가 된 대량조 영직이 겉으로만 친초파인것을 확신하고 그녀와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렇게 공을 들인 게 무색하게도, 초성왕 웅괴의 사망으로 초의 왕위교체기가 도래하였을 때, 진나라에서 들려온 진왕 영탕과 대량조 영직 자매의 화해 소식이 위래의 역린[6]을 건드렸다. 위래는 지금껏 진행해오던 전략을 파기하면서, 상방 소진에게 관중을 경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진은 위래의 명에 군말없이 따르고 관중경략 계획을 세웠다. 바로 초왕이 죽은 틈을 타 진에게 남정을 공격하라 충동질하여 진이 남정을 치는사이 진을 합횡의 배반자로 몰아서 공격해 관중을 장악하고 합횡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위험천만한 계책이었다.[7][8] 이윽고 진에서 올해는 힘들고 내년에 남정을 공격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위래는 조용히 군사들을 모아 관중경략의 준비에 들어간다.

2.2. 진의 사정[편집]


동생 영직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기적적으로 화해한 지[9] 얼마 지나지 않아, 진왕 영탕은 위나라로부터 초나라 공격 제안을 받게된다. 시기상으로도 초는 국상 및 왕위 교체 상황이라, 방심하고 있는 남정을 급습해 탈환을 노려볼 만 했다. 모험을 걸어보기로 한 영탕은 곧 영직에게 골수 친초파들을 걸러내 격리하라고 명하였지만, 영직은 무언가가 걸린다는 듯 선뜻 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위화감을 느낀 영직은 '위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조선이지 초가 아니며, 위가 합횡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도 어디까지나 조선을 더 효과적으로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그렇기에 만일 진의 성과가 시원찮을 경우 위가 진을 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조언에 영탕은 일리는 있지만, 현재 진이 위의 변심까지 대비하면서 움직이기에는 여력이 없다 답하자, 영직은 느꼈던 위화감이 한층 더 강해졌다.

진이 여력이 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에 가까운데, 어째서 위는 진에게 우선 단독으로 초나라를 공격할 것을 권유하고, 이후에 지지하고 뒷받침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인가? 진이 단독으로 남정을 공략하고, 위가 이를 지지하는 정도로 자존심 강한 초가 굴복할 리는 없었다. 오히려 합횡 내에서 친위파와 친초파의 내분을 불러일으킬 뿐. 초를 굴복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진이 남양으로 진군하고 다른 중원 국가들이 초의 중심부를 압박하는 것인데도, 위는 남양이 아닌 남정 공격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 진나라의 단독행동을 부추기고 있었다.

영직 : 진의 전력이 남정과 무관으로 쏠리면. 같은 합횡 진영인 초를 배신한 진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관중을 공격한다.

그리고 전력 공백 상태인 관중 영토를 점령하고, 난관에 처한 초를 도와줬다는 외교적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국력을 늘리면서, 동시에 합횡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는군요. 굉장히, 교활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예요.


영탕은 영직의 설명과 위가 지나치게 외교적으로 진을 배려하던 일을 상기하며, 그전부터 이런 비열한 계책을 꾸민 것이냐고 치를 떨었다.[10] 대책을 논의한 결과, 영직은 3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처음 2가지는 초에게 위의 간계를 알리는 것과 위의 제안을 고의로 미루어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다. 전자는 자칫 영탕이 영직에게 감화되어 친초로 돌아섰다는 잘못된 신호를 대내외적으로 줄 수 있었고, 두번째는 시간을 길게 벌어야 1년이고 이후로 낌새를 챈 위가 다른 책략을 시도할 리스크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방도로...

따르는 척하면서 역으로 하동을 들이쳐 부숴버리자는 방법이 나왔다. 서하도 점거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하동을 공격하는 지에 대해서 영직은 진군이 하동을 공격하는 건 아니라고 답했다. 영탕은 조선에 도움을 요청해 위를 협공하자는 의도를 파악하였지만, 친조선파인 자신이 봐도 조선이 하동을 차지하면 감당하기 어렵다고 염려하였다. 이 염려에 위가 서하와 하동을 비교하면 당연히 하동을 우선할 것이고[11], 조선이 하동을 통째로 차지하더라도 진이 하동 땅을 좀 나눠달라고 요청하면 외교적 고립으로 동맹에 목마른 조선이 적당히 갈라 줄 것이라고 영직은 답하였다.

영탕은 조선이 믿어주겠냐고 재차 물었지만, 영직은 영탕과 영통이 동시에 서한을 보내면 조선도 믿어줄 테니[12] 서둘러 조선에 서한을 보내자고 재촉하였다. 결국 영통을 불러 설득한 후[13][14] 자신과 영통의 명의로 조선에 협력을 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2.3. 한의 사정[편집]


한은 한왕 한창이 승하하고 태자 한구가 왕위에 올랐다. 한구는 합횡내부에서 나오는 위와 초의 알력에 조만간 큰일이 있을것이라 여기고, 마찬가지로 왕이 죽어 혼란스러운 초보다 위를 선택하여 위에게 한의 국보 화씨벽을 바치고 한의 안전보장과 삼천땅의 일부를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위왕 위래는 한이 바친 화씨벽이 지역 하나와 교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며, 다만 한의 사직만은 보전해주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위래의 태도는 한왕과 한의 중신들을 모두 격분시켰다.

한왕 한구 : 아니 그래도 이 정도 보물의 값어치가......

대부 장평 : ..............그래서, 이 굴욕을 그냥 넘기겠다는 말씀이신지?

대부 한붕 :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대부 한섭 : 별 가치는 없지만 한의 종묘사직은 보존해 주겠다, 라. 그럼 한의 종묘사직도 별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요?

한공숙 한사 : 애초에 종묘사직의 보존이 무엇이지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에 신정만이 남는다 해도 종묘사직은 보존되는 게 아닌가요?


중신들의 이러한 반응에 한왕은 그럼 초에 붙어야 하는지를 묻자 상방 장평이 아예 조선과 손을 잡자고 말한다. 한왕은 의외의 답에 당황하지만 중신들은 모두 일리있는 말이라며, 조선이 하남에서 졌지만 여전히 대국이고, 이전 싸움으로 위국령 하남은 피폐해져 있으며, 한이 위의 후방을 위협하고 초와의 연계를 방해한다면 조선이 위와 1대1로 싸워서 질일은 없다고 설명한다. 중신들의 설득에 한왕은 조선과 손을 잡기로 결심하고 동생인 공자 기슬을 조선으로 보내어 위의 하남을 공격하면 화씨벽을 바치겠다고 요청한다.[15]

2.4. 조선의 사정[편집]


조선은 하남대전의 상처를 어느정도 회복한 이후 합횡을 붕괴시키기 위하여 첩보활동에 집중하고 있었다.[16]그러던 중 진에서 날아온 영탕과 영통의 서한을 통해서 알게된 위의 전략에 조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에 들어갔다. 승상 문소가 혹 이것이 지난 하남대전처럼 조선군을 유인하여 격멸하려는 합횡측의 책략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표하였지만, 하동이 박살나고 진의 북부 안정을 버려서까지 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쪽이 중론이 되며 이 서한의 내용이 진실인 쪽에 무게를 두었다. 결국 기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전쟁준비에 들어서려는 때에 이번에는 한나라의 공자 한기슬이 직접 사신으로와서 위의 위협에 한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17] 진과 한의 상충되는 말에 기설은 어찌된 영문인지 당황하였지만 중신들은 한이 착각하였을 뿐 위의 공격목표는 진이 확실하다고 진언하면서 착각여부와는 별개로 한을 끌여들이는것이 더 이득이니 한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이에 기설은 한의 제안을 수락하고, 하동에 대사마대장군 하기를 대장으로 좌장군 악의를 부장으로 삼아 10만[18]을 파견하고 하남에는 위장군 양수를 대장으로 한단군수 조사를 부장으로 삼아 8만을 파견 총합 18만의 대군을 소집하기로 결정한다.

3. 전투의 전개[편집]



3.1. 흉노의 배신 [편집]


조선의 위와의 전쟁에 앞서서 흉노에게 참전여부를 묻는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흉노가 참전의 대가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보수로 요청하자, 기설은 흉노의 고용대신 서하방면의 정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겄도 흉노가 비싼가격으로 부르자 단념하였다. 그런데 이때 흉노가 엉뚱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가뜩이나 커져가는 조선을 견제하고 돈도 벌겸 조선이 서하방면의 정보를 사가려한 사실을 위에게 팔아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서하군수 초사는 흉노가 알려준 정보를 듣고도 이를 무시하며 도리어 흉노가 조선에게 사주받고 역정보를 흘린다고 여겼다.[19]

3.2. 위군의 진군과 낙수도하전[편집]


위의 관중진공군이 예정대로 관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은 대부 망묘로 하동-서하 방면에서만 4만3천, 그리고 하남에서 2만5천을 소집하여 총합 6만8천의 대군이었다. 사실상 위나라에 남아있는 모든 여력을 쏟아부은 군대였다.

망묘가 이끄는 위군은 낙수에 도달하였고, 이는 중천쪽 진군에게 발견되어 진군이 이를 방해하려 하였다. 망묘는 진군의 수가 많지 않았기에 그대로 도하명령을 내렸지만, 도하 도중 진군 진영에서 날라온 화살에 위군 백여명이 사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망묘 자신에게 이 일을 알리려고 달려온 전령도 말을 끝맺기 전에 낙수 너머에서 날아온 화살에 절명하니, 놀란 망묘는 급히 후방으로 몸을 숨겼다.[20]

중천에는 상수가 6천의 군대를 이끌고 도하중인 위군을 방해하고 있었다. 병력은 적었지만 상수 휘하에 경리를 사살한 명궁 아탈란테가 있었다. 아탈란테가 낙수를 도하하려는 위군을 장거리에서 저격하자 위군은 생각치 못한 난관을 마주한 형국이 됐다.[21]

한편 후방으로 물러난 망묘는 방금전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고서는 경리를 죽인 범인이 흉노가 아니라 진나라였다고 여기고 이를 대대적으로 부대에 알렸다. 그러자 위군은 복수심에 가득차 사기가 올랐고 이내 다시 낙수를 진격 도하에 성공하였다.

상수 또한 처음부터 막으려는 진군의 숫자도 적었고 사마착이 시간만 벌고 오라 했기에 무리하지 않고 물러났다.[22]

3.3. 조선군의 진군[편집]


위군이 낙수를 도하하는 사이 조선군도 진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하동공략군 10만중 고도와 천문 점령 및 중모 견제 역할을 맡은 악의 별동대 2만9천이 현씨현으로 진격하였고, 본대 7만1천은 하기의 지휘아래 광랑성으로 진격하였다. 갑작스러운 조선의 급습에 광랑성은 저항한번 못하고 점령당하고 현씨현은 그대로 항복하였다.

이어서 하남공략군 8만 역시 조가성 점령을 위하여 진격하였다. 이런 조선군을 막아야할 중모의 위군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조선군이 진격하였다는 소식에 당황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고, 악의의 별동대와 하남방면군이 남긴 7천의 군사에 포위되어 대전내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23]

3.4. 조가전투[편집]


하남진공군의 첫 장애물인 조가성은 장군 몽오와 1만7천이 수비하고 있었으나 중모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몽오는 갑작스러운 조선의 대군에 성이 포위당하자 당황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몽오가 당황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공세에 들어갔으며 압도적인 폭력앞에 조가성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함락당하였으며, 성의 수성에 실패한 몽오는 그대로 하수를 넘어 대량으로 도망쳤다. 조가성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조선군은 기세를 몰아 하수도하에 필요한 급현과 숙서구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고, 곧바로 하수도하 준비에 들어갔다.

3.5. 고도전투[편집]


악의 별동대 2만9천은 현씨연을 점령후 고도에 대한 정보수집을 마치고 점령하기 위하여 진격하였다. 고도성주 위경은 조선군이 쳐들어오자 이대로 싸우면 숫적으로 밀리기에 한가지 꾀를 내니 성내부에 극소수의 병력 7백을 남기고, 깃발을 요란히 흔들어 마치 대군이 있는것처럼 위장하고, 나머지 1만4천3백을 이끌고 회전에 임하는것이었다. 조선군이 분명 성을 견제하기 위하여 병력을 나눌것이고 그러면 조금이라도 병력의 불리함이 줄어들것이기 때문이었다. 위경은 생각대로 악의는 8천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 후 나머지, 2만1천으로 위경의 군대와 마주쳤다. 비록 군대를 나누었지만 여전히 병력의 수는 조선군이 우세하였다. 악의는 무리없이 초전부터 서서히 기세를 올려가며 위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위경은 조선군을 단수로 몰아붙히려 하였지만, 악의는 결코 무리하지 않는 군사운용을 보여주었기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24]결국 위경은 이대로 진행되면 위군에 승산이 없다 여기고 모험을 걸었다. 그대로 전군을 휘몰아쳐 공세에 들어갔고 악의는 여기에 휘말려 양군이 엄청난 피해를 보게되었다. 큰 피해를 보자 악의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맹공에 들어가고 위경은 기다렸다듯이 악의 맹공을 흘려 조선군을 단수로 몰아붙혔다. 양군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도중...

고도성에서 함성이 울리며 성내부에 조선군의 깃발이 휘날렸다. 악의가 보낸 조선군 8천은 고도성의 요란한 깃발을 수상하게 여기고 공성에 들어가고 이내 성내부에 소수만 있다는것을 확신하고 공격하였고, 고도성에 남아있던 7백은 위장이 통하지 않자 그대로 조선군에 항복하고 고도성은 함락당하였다. 위경은 열세에 간신히 승률을 5대 5 가까이 맞춘 순간에 고도성이 함락당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악의에게 항복하였다.

3.6. 대량 조선군의 하남침공에 원군을 청하다[편집]


한편 조가성에서 도주하여 대량에 도착한 몽오는 위왕 위래에게 조선군의 대대적인 침공소식을 알렸다. 위래는 조선군 10만이 하남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급히 하남인근현에 징병령을 내리고 주변국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25]

이윽고 한나라 신정에 원군을 청하는 위의 사신이 도착하였다. 한왕은 사신의 다급한 요청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의 호위병에게 사신을 구금할것을 명령하였다. 당황한 사신이 저항하려 하였지만 일개 문관이 왕의 호위병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은 위의 구원요청을 무시하고 동시에 초로 향할 원군전령까지 막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보였다.[26]

3.7. 단씨전투[편집]


악의가 고도성을 공략하는 사이 하기가 이끄는 하동공략 본군은 소수를 도하하여 단씨를 포위하였다. 단씨를 포위한 하기는 공격명령을 내렸고 초전에 약간의 피해가 있었지만, 조선군의 맹공 한방에 엄청난 피해를 입자 단씨성주는 그대로 백기를 올리고 항복하였다. 단씨를 단기간에 점령한 하기는 그대로 속도를 올려 피뢰를 점령하기로 하고 전군에 속보로 진군하도록 명을 내렸다.

한편 하동령 피뢰에 조선군의 침공을 알리는 전령이 도착하였다.[27] 피뢰성주는 이미 하동의 모든 군사들은 망묘가 끌고 관중으로 향하여 대응할 군사가 없다고 하소연하지만 그렇다고 침공이 없던일이 되는것은아니었다. 성주는 전령에게 평양을 위시한 중요 성읍과 서하진공군에게도 연락하라 지시하고 자신도 일단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피뢰성주가 전령에게 이 소식을 듣고있는 사이 하기의 조선군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여 단씨와 피뢰사이의 거리 절반을 주파하고 있었다.[28][29]

3.8. 위 하남방위군 조직완료 및 송,제의 반응[편집]


대량에서는 급히 하남에 징병령을 내리고 2만2천의 방위군 조직을 완료하였다.[30][31] 위군 지휘관은 방위군 조직이 완료된자 조선군의 하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전군을 수원으로 진격시켰다.

그사이 송과 제에 보낸 사신들이 당도하여 조선의 침공사실을 알렸다. 송은 위의 주군이 대부분 관중에 있다는 소식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조선군의 남하를 막는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급히 2만5천의 군사를 소집하기로 하고, 대부 당앙에게 맡기어 하남으로 보내도록 하였다.[32][33] 한편 제도 위의 원군요청에 응하였지만 그들이 향하는 방향이 하남이 아닌 조선령 임치군이었다. 제는 조선이 하남으로 대규모 병력을 보내었으니 임치군에 보낼 원군은 없을 것이라 여겨 전교사와 전단에게 2만7천의 군사를 맡기어 임치회복을 명령하였다.[34]

3.9. 약양전투[편집]


하동과 하남이 조선군의 침공에 뒤집어지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망묘는 소수를 넘어 약양까지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사마착의 지휘하에 진군 2만6천이 위군을 막기 위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곧이어 위와 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초전의 분위기를 잡은 것은 위였으나, 사마착은 낙수에서 활약한 객장 아탈란테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위군의 공세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마착의 노력에도 진군의 피해는 계속해서 누적되어갔다.

3.10. 하기의 전격전, 피뢰 항복하다[편집]


앞서 피뢰는 전령을 통하여 조선군이 하동을 침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방어태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피뢰가 방어태세에 들어가는것보다 조선군이 피뢰성 주변을 포위하는것이 더 빨랐다. 미처 대비를 마치지 못하고 끝모를 대군에게 포위된 상황에 성주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조선군 지휘관 하기가 직접 위협하자 성주는 공포에 떨면서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에 하기는 일부 물자의 징발을 제외하고, 조선군은 피뢰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에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렇게 피뢰는 조선군에게 점령되었다.

3.11. 천문전투[편집]


고도점령에 성공한 악의는 본래 목적인 천문의 점령을 위하여, 약 2만5천의 병력을 아끌고 진격하였다. 한편 천문에서는 기존의 수비군 5천에 고도의 지원을 위하여 야왕에서 파견되었던 2천5백이 고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천문에 합류한 상황이었다. 악의는 공세에 들어갔지만 방비가 튼튼한 천문의 공격에 조선군의 피해만 커져갔다. 결국 조선군의 피해가 1할5푼까지 나오자, 이 이상의 피해를 입으면 중모의 견제와 하긴의 본대 후방의 보호가 어려웠기에 후퇴를 결심하였다.

천문을 수비하던 위군 장수는 악의가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여 추가로 피해를 입히기로 하였다. 그러나 악의가 이미 위군의 추격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기에 위군은 1200명이 전사라는 패배를 겪게 되었다. 이 전투의 피해로 천문은 천문 방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군사적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악의는 한결 수월하게 본대의 후방보호라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3.12. 하동침공 소식을 들은 망묘[편집]


한편 약양에서 진군을 몰아세운 망묘는 하동에서 달려온 전령이 가져온 하동침공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미 하동의 대부분 병력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에는 하동 전역을 조선군이 점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망묘는 공격을 중단하고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협상을 요청하였다. 망묘의 협상요청에 진나라측은 대량조 영직이 협상장으로 나왔다. 영직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망묘에게 협상을 요청한 사유를 물었다. 망묘는 영직의 물음에 무슨 핑계를 대야 하는가 고민하였지만, 영직이 조선 때문에 후퇴하는 거 알고 있으니 쓸데없이 머리 굴리려 하지 말라고 선수를 쳤다. 황망한 표정을 지은 망묘는 배신은 위나라만 할줄 아는 게 아니라는 답에 그제서야 진이 자신들의 계획을 사전에 감지하고 조선과 밀약을 맺은 것을 눈치챘다.

영직 : 자, 그럼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제가 줄 수 있는 것은 하동의 구원과, 위나라 장병 수만의 목숨이예요.

같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걸, 저울 반대편에 걸어 보시죠?

망묘 : ............소량을. 진측에 넘기겠다.


결국 위가 소량을 넘겨주는것으로 위진간의 평화협상이 맻어졌다. 서하군수 초사는 뒤늦게 망묘가 보낸 전령을 통하여 협상내용을 들었지만, 서하와 하동을 비교하면 당연하게도 하동이 중요하였기에, 망묘의 협상에 대하여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진은 서하군의 중심인 소량을 다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3.13. 임홍의 오판과 안읍의 항복[편집]


조선이 하동을 침략하여 피뢰까지 점령되자 평양현령 임홍은 즉시 신강과 안읍에 전령을 보내어 관중진공군이 돌아올 때까지 각자 거점을 방비하라고 명령한다. 임홍 자신이 담당하고 있고, 같은 분지에 있던 평양과 신강은 조선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지만, 안읍성주는 고민에 빠졌다.
이미 피뢰가 점령되고 병력의 대부분은 차출되어 관중에 있었다. 그리고 신강과 평양과 달리 안읍은 다른 분지에 속해 있었고 조선군에 훨씬 가까이 있었다. 안읍은 하동의 대표도시인 만큼 대도시였고, 지켜야할 성벽도 길었지만 오랜 전쟁과 이번의 관중진격으로 제대로된 병력이 없었다. 거기에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있었는데,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을 차출하여 성벽에 올려보내야 할 지도 몰랐다.[35] 장고의 장고끝에 안읍성주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몰래 피뢰의 조선군에 사절을 보냈다. 사절은 하기에게 더이상의 싸움으로 고통받기 싫으니 안읍은 이대로 개성하겠다며 항복을 요청하였다. 하기는 일순 당황하였지만 이내 피뢰에 일부 수비병력을 제외하고 전군을 이끌고 안읍으로 달려가 성을 접수하였다. 그렇게, 조선군은 하동의 중심지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력권에 넣는 데 성공했다.

3.14. 조선 하남진공군 하수를 넘다[편집]


하남진공군이 하수를 도하후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한단군수 조사가 2만의 군을 이끌고 평양, 계릉을 접수하고, 위장군 양수가 이끄는 본대 5만 3천으로 남하, 산조를 점령하고 대량을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다. 조선군이 움직이자 위 하남방어군 역시 이에 맞추어 양수의 본대를 견제하기 위해 대량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당앙이 이끄는 송군은 상현에서 병력집결을 완료하고 대량으로 출발하였으며, 한나라는 장군 신차에게 1만 2천의 병력을 맡기고 대량으로 진격하라 명하였다.[36]

3.15. 순우전투[편집]


전교사와 전단은 임치로 향하는 첫번째 관문 순우성에 당도하였다. 순우성주는 갑작스러운 제군의 공격에 놀랐지만, 이전의 맹상군이 공격해온 전거에 의하여 주둔 병력을 늘리고 방비도 해둔 상황이었고 이전 전투로 제군이 약하다는 인식하였는지 병사들에게 전처럼 하면 된다. 하면서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단이 이끄는 제군인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단은 신들린듯한 지휘로 조선군을 압박하였고, 수성의 입장에 병력차도 4천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군에게 3할9푼의 피해를 입히고 순식간에 성을 함락하였다.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이 손쉽게 순우를 점령한 전단의 솜씨에 전교사는 크게 감탄하면서 칭찬하였다.

3.16. 평양전투, 평양성의 필사적 저항[편집]


조사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과 계릉으로 향하였고, 두성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라고 압박하였다. 계릉은 이에 응하여 성문을 열었지만, 평양성주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항전의 뜻을 밝혔다. 조사는 이내 평양성을 포위하였고 전투가 벌어졌다. 조사는 전투 이전에 평양성의 방비와 병력등을 살펴보고는 쉽게 끝날것이라 낙관하였지만[37], 조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평양성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병사들의 숙련도는 조선군에 비할바가 못되었지만 병사들이 전투에 임하는 기세가 죽기를 각오했듯이 악착같았다. 평양의 필사적 저항에 조사는 당황하였고, 전투는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3.17. 신강전투[편집]


안읍의 무혈점령에 성공한 하기는 안읍성주로부터 임홍이 평양과 신강이 거점 방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크게 기뻐하며, 관중진공군의 보급로 차단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안읍이 조선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된 임홍이 하동인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 신강으로 진격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하기는 임홍이 이끄는 위군이 하동의 마지막 남은 병력인것을 눈치채고 관중진공군이 귀환 이전에 격파하기 위하여 유인책을 시도하였다. 우선 스스로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신강으로 향하였고, 나머지 병력을 둘로 나누어 보급로 차단을 위해 나서는척 하면서 신강 인근에 대기하고 있다 본대가 위군과의 전투중에 측면과 후방을 들이쳐 삼면에서 포위할 계획이었다.

임홍은 신강으로 향하는 2만 병력이 적군 총대장이 이끄는 부대임을 알아보고 전황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 전군을 이끌고 하기를 공격했다. 계책대로 위군이 유인책에 걸려들자 하기는 나발을 불어 대기하고 있던 부대에게 진격할것을 명하였고, 신강 인근에 대기하고있던 분대들이 진격하여 이내 임홍의 위군을 포위하였다. 뒤늦게 자신이 유인책에 걸린것을 안 임홍은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기위해 분전하였고 이내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아났다.[38] 그러나 임홍이 이끄는 위군은 궤멸했고, 더 이상 하동에 재대로된 병력은 남아 있지 않은 채로 하동의 주요 도시들이 전부 점령당하였다. 이 싸움을 지켜본 하동군내의 성들은 위군이 패배하자 바로 조선군에게 항복하였고 하동 전역이 조선군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3.18. 야왕의 상황파악[편집]


한편 하내의 야왕에서는 상황파악에 진력하고 있었다. 야왕에서 파악한 현 상황은 하남에 대규모 조선군의 침공과 중모가 아직 조선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는것 두가지였다. 이에 야왕성주는 중모에 전령을 보내어 고도방면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을 협격하자고 제안하였다.[39] 그러나 중모는 고도의 악의와 조사가 남긴 7천의 조선군에 양쪽으로 포위되어 있었기에 움직일수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야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3.19. 망묘의 선택[편집]


진군과의 협상으로 소량을 내주는 대신 무사히 서하로 퇴각에 성공한 망묘는 소량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하군수 초사를 만나고, 하동을 건너가기 위한 도하준비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망묘의 요청에 초사는 잠시 조용히 망묘를 이끌고 소량성 건너편 분음에 걸린 군기를 살펴보라고 하였다. 망묘가 의아해하면서 살펴보니 분음에 걸린 군기가 위군이 아닌 흑색기가 걸려있었다.[40] 초사는 이어서 왕성과 포판에서도 같은 군기가 올라와있고 이로 미루어보아 하동 전역이 이미 조선군에게 장악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망묘는 어이없어 하였지만, 결단만큼은 빨랐다. 즉시 이번 전쟁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조선에게 사신을 보내 협상하기로 하였다. 초사는 너무 서둘러 결정하는것이 아니냐 하였지만, 망묘는 시간이 흐르면 약해지는 건 자신들이니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는 지금 해야 한다고 설명한 뒤 진에게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협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3.20. 대량의 상황파악[편집]


대량의 위 조정은 그동안 상황파악에 주력하였고, 이내 고도가 조선군에게 점령당하고, 한이 이반하여 후방을 위협하는 것까지는 알게되었다.[41] 위래는 추가적인 상황 파악으로 조선군이 대략 10만에서 15만을 동원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관중의 망묘가 돌아올때까지 수비에 진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또 한이 합횡을 이반한것을 파악하자 송나라를 경유하여 수춘방면으로 조선의 침공사실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사이 양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대량 코앞인 산조를 점령하고, 대량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3.21. 평양함락, 그리고...[편집]


장기전 양상으로 흐른 평양전투는 위군의 분전에도 결국 조선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조사는 평양을 점령한 후 사로잡힌 성주에게 무엇때문에 그리 죽기살기로 저항하였는가 물었다. 이에 성주는 지난 하남대전에서 조선패잔병이 평양으로 흘러왔을때 주민들이 선의로 숨겨주었음에도 이들을 학살하고 수급을 베어간 사건을 언급하면서 뒤이어 말하기를...

평양성주 : 그걸 겪고 깨달았지. 조선놈들은 인간이 아니고 인의는 사치라는 걸.

이딴 전쟁과 피와 목에 미친 나라에서 나는 살기 싫거든.

그러니까 마지막 소원을 말하자면 어떻게든 내 목을 너희들에게 넘기지 않는 방법으로 죽여주면 좋겠는데.

성주의 말을 들은 조사는 충격받은듯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였고, 이때 겪은 일로 하여금 조사는 조선군에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는것을 느끼게 되었다.

3.22. 송군의 합류[편집]


드디어 당앙이 이끄는 송군이 대량에 합류하였다. 위 조정의 환영을 받은 당앙이었지만 그가 파악한 전황은 막막하기만 하였다. 먼저 한이 이반하고 조선군이 복수 이북을 점거하였고, 바로 코앞인 산조에 주둔한 조선군만 5만이 넘었다.[42] 이에 당앙은 위래에게 조선군에게 사신을 보내어 협상하는척 시간을 끌어 관중의 위군 또는 초군을 기다리자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위래로서도 나쁠것 없는 방법이었기에, 곧 소려를 산조에 있는 조선군에게 보내어 협상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산조에서 양수와 소려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소려가 조선의 요구사항에 대해 묻자 양수는 필수 요구사항인 대량의 항복, 위왕의 사죄, 그리고 합횡 탈퇴와 조위동맹의 체결을 언급하였고 이에 소려는 대량은 결코 약한 성읍이 아니며 사방에서 구원군이 몰려오고 있다며 허세를 부렸다. 그러자 양수는 이미 하동에도 조선군 10만이 진공해있는 상태며, 한나라는 이미 이반하여 이쪽에 붙었고, 위가 계획한 간교 역시 진나라에서 먼저 깨닫고 조선에게 도움을 청해서 이렇게 온 것이라 답한다. 양수는 덧붙이듯 막강한 대량의 방어력과 위군 및 송군을 믿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버텨보라고 소려를 조롱하였으며, 소려는 너무나도 충격스러운 사실에 아무말도 못하고 대량으로 돌아가니 회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돌아온 소려에게 하동의 상황을 알게된 위래 역시 충격을 받은듯 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추스리고 조선군의 이야기가 사실이건 거짓이건, 지금 하동이 어떤 상황이 되어 있건. 하남에서 조선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항전태세를 갖추라고 명한다. 그렇게 조위간의 일차 협상은 무위로 돌아간다.

3.23. 한가로운 초나라[편집]


2차중원대전이 종국으로 향하는 시점에서도 초나라 조정은 한가로이 선왕 웅괴의 시호를 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도 한나라가 군을 일으키고 하남방면이 시끄러운것은 알아챘지만, 그저 위한간의 국지전이라 생각하고 신경을 거두었다. 다만 오직 경취만이 그 특유의 감으로 무언가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나고있음을 느끼고 홀로 경가의 인력을 동원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경취의 감이 맞다는 듯 위나라의 전령이 수춘을 통과하여 맹새를 지나고 있었다. 사전에 위나라 전령을 통하여 화북의 상황을 파악한 소어가 위나라 전령에게 날랜 말을 건내주어 서둘러 달려가라고 보채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수춘의 모든 물자와 인력은 강동 재건에 집중되어있는 상황이었기에 수춘 단독으로 원군을 보낼수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게 초나라 조정은 2차 중원대전이 거의 끝날 쯔음에야 사태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24. 염파 제나라의 진공을 눈치채다[편집]


임치군수 염파는 순우가 단시간에 제나라에게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제나라의 공격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이에 임치와 가까운 안평에서 치수를 끼고 제군을 요격할 계획을 세운다. 더불어서 순우와 임치사이에 있는 극현이 공격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구원병을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제군은 이번원정의 최종목표를 극현을 점거하는것으로 정하고, 서둘러 진격에 나섰다. 또한 이번 싸움에는 총대장인 전교사가 직접 나서겠다 하였고, 전단은 위급시 자신히 적절히 조언을 하면 문제없을것이라 여기고 이에 응하였다.

3.25. 극현전투[편집]


그렇게 진군한 제군은 극현을 포위하였고 이내 공성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공성에 들어간 제군의 공세는 매서웠고, 극현성주가 초전은 버텨내었지만 이어지는 공세를 막지 못하고 극현은 낙성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순간 안평에서 염파가 스스로 9천의 증원군을 저쪽에서 나타났다. 원군의 등장에 극현성 수비군은 다시 기세가 올라 저항하였다.

그순간 전교사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걸었다. 전군에게 공성 지속명령을 내리고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성을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 도박은 성공하였고, 염파의 증원군이 극현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성은 제군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염파는 제군의 도박적 행각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증원군만으로는 성을 되찾기에는 요원해 보였기에 임치로 회군하였다. 물론 염파도 그냥 돌아가지는 않고 외곽에 전개된 제군을 공격하여 4푼의 피해를 입혔다. 이 피해 덕분에 제군은 더이상의 진군은 무리라고 판단 극현까지 점령한것으로 만족하고 원정을 종료하였다.[43]

3.26. 하기와 망묘의 협상[편집]


망묘의 협상요청을 받아들인 하기는 항복한 안읍성주와 고도성주 위경을 데리고 소량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협상장에서 이 두사람을 망묘와 초사에게 보여주었다. 망묘는 안읍과 고도가 이미 조선군에게 점령되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고, 하기의 항복요청에 세가지 조건을 걸었다.

1.소량을 제외한 현행 위진, 위조경계를 유지하면서 경계지역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단해줄 것.

2.서하에 있는 위군의 생존을 보장해줄 것.

3.종전 이후 위군의 무사귀국을 보장해줄 것.

- 망묘의 항복조건

망묘의 조건을 들은 하기가 진 대량조 영직에게 이 조건을 수락하겠냐고 묻자, 영직은 조선과 이전에 나누었던 약속을[44] 상기시키고 동의하자 하기 역시 망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협상이 타결되자 하기는 조선측은 현재 점령지를 제외한 위국령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할 테니, 위측도 평양 이북 지역과 하내에 적대행위 금지령을 내리라고 하였다. 아직 하내, 정확히 야왕과 천문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으며 전 평양현령 임홍이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정보를 사유로 들었다. 그제서야 망묘는 아직 조선이 온전하게 하동을 장악한게 아님을 깨달았지만, 이미 자기 입으로 협상타결을 지었기에 이제와서 되돌릴수 없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분했는지 망묘는 만일 자신이 배후의 움직임을 조장하면서 약속을 어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하고 넌지시 협박해보았지만 하기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러면 위군의 보급로를 끊으면 그뿐이라고 받아 넘겼다. 망묘는 그런 하기에게 자신이 본 사람들 중 성격 나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라고 투덜거렸다. 이어서 하기가 서둘러 전령을 보낼 것을 추천하면서 하남방면에도 조선군이 파견되었음을 알려주자, 망묘는 귀국에서는 땅에서 사람을 만들어내는 비술이라도 개발해냈느냐며 질렸다는 듯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망묘는 하기의 말에 서둘러 평양 이북과 하내에 전령을 급파하여 조선과의 협상이 이루어졌으니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양 이북 도시들의 성주들의 망묘의 전갈을 받아보고서는 이대로 조선군과 싸움을 지속하면 6만이 넘는 위군이 굶어죽을 것이라는 판단에 항전준비를 중단하였고, 임홍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내에서도 망묘의 전갈을 받고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하니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남뿐이었다.

3.27. 소황전투[45][편집]


일차협상이 종결된 후 양수는 위군이 아직도 항전을 고집하는 이유로 아직 항전 역량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위송연합군을 공격하고자 진격하였다. 위군 장군과 당앙은 진격해오는 조선군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기 위해 유인책을 걸어보았지만 양수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양수 역시 길게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내 위송연합군의 유인책에 걸려드는 척 하면서 양군은 소황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전에는 지형의 유리함을 가져간 위송연합군이 기세를 가져간듯 보였으나, 연합군의 공격에 희생된 조선군의 수는 600 정도로 6만에 달하던 하남의 조선군 전체에 비교하면 미미하여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양수의 지휘에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해오자 정면 힘싸움에서 밀려버린 연합군이 결국 패퇴하고 대량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소황에서 연합군이 패퇴하였지만 그래도 위래는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양수는 대량 인근에 주둔하여 압박을 가하면서 하동에서의 전령을 기다리게 되었다.

4. 결말[편집]



4.1. 위나라의 항복 [편집]


소황 전투 이후에도 위래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위래에게 하동에서 전령이 오고, 고대하던 망묘의 관중원정군은 조선의 하동진공군에게 항복하고 하동 전역이 조선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령의 비보에 위래는 눈물을 머금고 조선측의 사절을 대량으로 불러와 협상하도록 지시하니, 그렇게 기원전 295년 2차 중원대전의 전역은 종결되었다.

5. 전후처리[편집]



5.1. 조선의 협상안 정리[편집]


전쟁이 종결되자 조선조정에서 전후협상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진과 한은 자신들의 협상권한을 조선에게 이양하고 조선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기설은 곧 신료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준비한 협상안을 보여주었다. 기설이 초기에 작성한 협상은 아래와 같다.

1.조선, 진, 한 삼국은 동맹을 맻고, 위는 조선하고만 동맹은 맻는다.

2.위국령 중모와 왕성을 조선에 할양한다.

3.조선은 하남령을 일체와 위국 서하전역, 여량산 이동 잔존 위국령, 민지, 의양을 교환한다.

4.한나라에게 민지와 의양을 할양한다.

5.진나라에게 포판, 지읍, 영호, 분읍, 피씨를 할양한다.

기설의 협상 초안에 승상 문소가 위국을 멸하려 하는 지에 대해 묻자 기설은 승상이 나의 복안을 파악했다면서 좋아했다.[46] 문소는 지금은 위를 이용하고 제를 경계해야 할 때라며 기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줄것을 청하였고, 기설은 곧 생각을 바꾸어 위도 다른 국가들과의 동맹에 끼어주었다. 이후 조선상 비의가 진나라에 할양하는 영토의 크기가 약간 많은것 같다고 진언하자 기설은 측신 옥로가 서하를 온전히 주면 진은 결코 조선을 배신할수없다고 진언하여 그렇게 했다 하였다. 이에 비의를 비롯한 중신들은 진나라의 할양건에 납득하였다.[47]

다음 논의건은 하남령 전체 반환건이었다. 이건에는 대사마대장군 하기는 하남령 전체를 위에게 주어서는 안되고 일부 필수지역을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 이유로 세가지 이유를 댔는데

첫째, 최소 방릉에서 숙서구에 이르는 구간이 필요한 이유는, 하남에서 일이 일어날 경우 빠르게 개입하기 위함이요 아직 위에 대한 신용도가 낮기에 긴급한 상황 발생시 신속히 개입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중모는 분지 지형이라 외침에 강한 구조라 적의 손에 들어갈시 탈환하기 까다로운 지역이었으므로 반드시 조선령에 편입해야했다.

셋째, 숙서구는 하간 개발의 요점이자, 유사시 하류 지역에 수공을 가할 수도 있는 무기로도 기능할 수 있으니 생산력 진흥과 동군의 방위를 위해 반드시 가져와한다.

하기의 진언에 기설은 그렇게 되면 하남 점령지만으로 삼천과 서하 잔존지역, 그리고 여량산 이동지역과 교환해야 하는데 아무리 위가 몰려있어도 이 교환건을 받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결국 기설은 숙고끝에 안읍과 곡옥을 교환패로 내놓고 대신 하동 북부의 위국 잔존령을 전부 요구하기로 한다. 또한 초안에 해지의 소금 이권을 진에게 주기로 하였는데, 이것을 위에게 주어 하동의 균형을 맞추기로 하였고 또 해지를 위에 넘겨주는 대신 궤진을 조선이 가지는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기설의 이러한 대체안에 조선상 비의는 조선왕의 영민함에 다시금 경의를 표하면서 감탄하였다. 그렇게 수정된 협상안은 아래와 같다.

1.조선, 진, 한, 위 사국은 동맹을 맻는다.

2.위국령 중모와 왕성을 조선에 할양한다.

3.조선은 하남점령지와 안읍-곡옥-해지일대와 위국의 서하전역, 평양 이북 하수 이동 잔존 위국령 전체와 민지, 의양을 교환한다.

4.한나라에게 민지와 의양을 할양한다.

5.진나라에게 포판, 지읍, 영호, 분읍, 피씨를 할양한다.

조정은 최종적으로 협상안을 정하고 사신으로 승상 문소를 위국측 대표와 만나기로한 황지로 보냈다.

5.2. 황지회담 과 연종성립[편집]


조위 양측은 대량인근 황지에서 정전회담을 열었다. 조선측 대표는 승상 문소였고, 위측의 대표는 예상외의 인물이 나왔다. 바로 주나라의 공자 주최였다. 위 조정[48]이 주나라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형식으로 회담을 맡긴것이었다.[49] 문소는 조정에서 정한 협상안을 주최에게 넘기고 협상안을 살펴본 주최는 곧바로 문소에게 질문을 던졌다. 의양과 민지 일대에 맹진은 포함여부[50]와 사국동맹의 목적에 대해 묻자 문소는 맹진은 제외되어 위국령으로 남을것이고, 사국동맹의 목적은 그동안 사국간에 이어져오던 원한의 청산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동맹의 일원이 침공받을시 대응하겠지만 특정 누구[51]를 적으로 삼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주최는 동맹만으로 과거의 원한 청산이 가능하냐고 회의적 시선을 던지자 문소 또한 그것만으로 어렵다는것은 알고있으며 굳이 강요할 생각은없으나 감정과는 별개로 그간의 원한을 청산하고 서로간에 화친하겠다는 약속은 성립되었고 이 약속을 어길시 조선은 좌시하지 않을것이라 분명히 언급하였다. 문소는 이 동맹의 명칭을 연종(連縱)이라 칭하였다.

주최는 곧 연소에게 주나라가 연종에 참여할수 있는가 타진하였고, 문소는 주나라의 연종 참여를 환영하며 수락하였다. 그렇게 최종협상은 아래와 같이 마무리 되었다.

1.조선, 진, 한, 위, 주 오국은 동맹을 맻는다.

2.위국령 중모와 왕성을 조선에 할양한다.

3.조선은 하남점령지와 안읍-곡옥-해지일대와 위국의 서하전역, 평양 이북 하수 이동 잔존 위국령 전체와 민지, 의양을 교환한다.

4.한나라에게 민지와 의양을 할양한다.

5.진나라에게 포판, 지읍, 영호, 분읍, 피씨를 할양한다.


5.3. 위의 책임추궁[편집]


이 최종협상안을 본 위의 태자 위의는 폭발하였다. 최소한 불리한 점 몇 가지는 고칠 줄 알았더니 주최는 주가 연종에 참여한다는 문구 수정을 제외한 조선측의 요구조건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주최를 추천한것이 평소에도 고깝게 보던 소진과 소씨일족이었다. 위의는 소진에 대해 강한 책임추궁을 위래에게 요청하였고, 위래는 이 요청을 물릴 수가 없었다. 결국 위래는 소진에게 2계급 강등과 봉지인 하양을 반납하라 명하였으나 위의는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진언하였고, 위래는 태형 2대[52]를 추가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고 위의도 그걸로 만족하고 받아들였다.

소진은 위래의 판결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런 소진에게 미안함을 느낀 위래는 신하들을 잠시 모두 물렸다.

5.4. 진과 한의 반응[편집]


최종협상안이 전달되자 진과 한은 상이한 반응을 내놓았다.

먼저 한은 전체적으로 협상안을 별 불만없이 받아들였으나 진, 정확히는 대량조 영직은 이 협상안에 약간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진왕 영탕은 너무 많은 영지를 할양받은 건에 부담스러워 하였지만[53] 영직은 반대로 조선이 상당히 후려친 것이라 여겼다. 분명 영토는 과하게 받았지만 진이 받은 위협을 크게 계산하지 않았고, 하동과 하남방면의 팽창을 막아버림으로 진의 확장방향을 남정, 초로 고정시켰다. 즉 받은 거에 비해서 조선에게 알게모르게 강제된 것이 많다는 것.

영탕은 이에 이제 진은 남쪽만 신경쓰면 되니 좋게좋게 생각하자며 달랬다. 영직이 그렇다면 당분간 초와의 분쟁을 피하고 내부정비에 들어가자고 진언하자 그렇게 되면 영직이 또다시 초의 주구로 욕을 먹을 것을 걱정한 영탕이었지만, 영직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5.5. 초의 반응[편집]


한의 방해로 조선의 침공 사실을 늦게 받게 된 초는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0만에서 15만 가량이라 듣자 황당해한다. 분명 5년 전 조선군은 5만여 명을 웃도는 대규모의 사상자를 냈는데, 조선은 5년만에 하남대전과 엇비슷한 규모의 침공군을 보낸 것이다.[54] 거기에 이를 요격할 위의 군대는 관중에 있다는 소식까지 듣자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사태파악이 힘들었다.

경취는 이제와서 초가 원군을 보내보았자 모든것이 끝난 이후가 될 터이니 우선 사태파악을 위하여 진에 사신을 보내고 제와 송에도 사신을 보내 합횡이 무너지는 사태를 막고자 하였다. 이에 진에는 소수가 파견되고 제와 송은 무안군 경취가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결국 초는 진에 보낸 소수를 통하여 2차 중원대전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고, 진에 대한 초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우선 한에게 합횡 배신의 대가를 묻기로 한다.

5.6. 제와 송의 반응[편집]


우선 송은 2차중원대전에 대한 전말을 알게되고 크게 분노했다. 위의 행위는 사실상 배신에 가까운 행위였고, 그로인해 합횡이 사실상 파탄직전까지 몰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리적으로 송이 합횡을 배신할 수도 없는 위치였기에 송은 합횡에 그대로 남게되었다.[55]

제나라는 이번 대전에서 조선을 급습하여 순우와 극현을 탈환하였지만 역으로 그것이 안 좋게 되었다. 연종의 성립으로 이제 조선의 다음 목표는 제나라로 고정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나라 조정은 모처럼의 승리에도 어느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때 경취가 찾아와 조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경취 : 지금 있는 연종의 장수[56]

가 모두 덤벼들어도 이 경취의 상대는 될 수 없다!!![57]

또 조선이 이번 전쟁에서 명백하게 무리를 하였고 태산 장성이 해체되었으니 태산을 점거하여 요새를 보강하면 조선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경취 자신이 수춘에 주둔하여 제의 위기시 응원하겠다고 다짐하자 그제서야 제의 모두가 안심하게 되었다.

6. 영향[편집]



6.1. 조선 고립을 타파하고 중원제일국이 되다[편집]


조선은 하남대전 패전의 치욕을 씻고 위신을 세우게 되었다. 특히 하수정비에 필요한 주요영역과 하동북부를 통째로 얻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강해진 국력이 더욱 상승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다만 임치군 방면에서 제의 침공으로 순우와 극현을 내주고, 연종이 성립되었지만 합횡만큼의 구속력과 목적이 없었기에 외부의 충돌에 흔들리기 쉬운 동맹체제라는 불안요소가 생겨났다. 그럼에도 이 2차중원대전의 결과로 위나라를 꺾어버리고 화북 국가들 대부분과 동맹을 맺고, 하동의 절반을 차지했고, 그 어느 누구도 조선이야말로 가장 압도적으로 강력한 중원제일국이라 칭하는데 이견은 보이지 않았다. [58]
이런 인정은 세가 약해진 합횡에게 커다란 부담을 주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조선과 연종의 국가들이 회복하기 전에 빠르게 세력을 넓혀야한다는 부담감을 주어 합횡, 정확히는 초의 외교전략이 급해졌다.

한편, 하기를 중심으로 흉노가 보인 행동이 심상치는 않음을 감지한 조선은 이를 차후 조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6.1.1. 논공행상[편집]


이번의 공으로 각각 차기 조선상과 대사마대장군의 자리를 무리 없이 받은 하기와 양수였고, 악의와 조사 또한 이에 걸맞는 승격... 이 기다려야 했건만, 평양 전투에서 크게 느낀 바가 있고 그 성정이 굉장히 고지식한 조사는 무려 자신의 공적을 산정한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하기와 어전에서 논쟁을 벌였다. 그 요지는 공을 산정함에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을 위시한 객관성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조선이었기에 숨겨져 있던 공에 대한 추산 또한 알게 모르게 논공행상에 고려되었던지라 장내의 분위기는 잘못하면 이제 막 조선상이 될 하기가 칼을 꺼내들거나 우발적인 전횡을 시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사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스로의 공적을 두고 제기한 이의였기에 그 자체로 말문이 막힌 하기는 그 산정 기준의 완벽한 객관화의 달성을 위해선 산정 기관 및 방식 또한 상관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정도로 논쟁을 끝내고 조사 또한 이에 납득하였다.

다만 이것으로 끝이였다면 어느 정도의 미담이건만, 하필 여지껏 묵묵하게 자신에게 맡은 일을 수행해 오면서 차근차근 승진해오던 악의가 이 논쟁의 불똥을 맞고 승진이 보류되었기에 이에 해당 이의를 이해했는지는 차처하고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6.2. 진 연종과 합횡사이 줄타기[편집]


조선의 정책으로 영토는 많이 얻었지만 미래가 강제당한 진은 초와 대립을 피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상층부의 뜻과는 다르게 인민들과 하급신료들은 엄청난 영토팽창에 흥분해 있었으며 빨리 남진하여 남정을 되찾고 치욕을 씻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결국 초나라 대귀족인 악군 계가 상행점검차 진나라에 방문하였다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악군 계는 무사하였지만,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고 그 일행들 역시 크고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에 진조정은 적극적으로 사태에 가담한 자들을 처벌하였고 진나라 대귀족들도 일이 너무 커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알아서 자중하였다.[59] 그리고 초에서 이번 2차 중원대전에 대하여 묻는 사신이 오자 모든 것은 위의 간계로 인함이고 초는 멀고 조선은 가까워 조선에 구원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며 초와는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진은 조선과 초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하였다.

6.3. 한 삼천판도의 완성을 노리다[편집]


전후협상 후 한은 삼천판도의 완성을 노리게 되었다. 그를 위해서는 위가 가지고 있는 맹진이 필요한데 한왕은 과거 소진이 의양을 주기로 한 약속을 명분으로 맹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위는 연종의 설립목적인 원한청산을 들먹이며, 한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결국 한조정은 말로는 안되겠으니 힘으로라도 맹진을 가져야겠다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두 나라의 분쟁을 감지한 주나라는 서둘러 연종장인 조선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기설은 맹진까지는 한나라에 줘도 괜찮다 여겨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하였다.

6.4. 위 후계자 분쟁의 조짐[편집]


전후 위나라의 권력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우선 왕인 위래와 그의 측근인 소진을 중심으로 외교를 전담하던 소씨 일족의 영향력이 크게 약해졌다. 특히 핵심적인 권력층이던 상방 소진은 가볍지만 육형을 받고 임관 시기의 지위보다 낮은 지위를 받았고 관청에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 공백을 틈타 권력을 쥔 이는 바로 망묘였다. 망묘는 빠른 협상을 통해 하동진공군을 무사귀환시킨 것으로 6만 장정들과 그 일가친척들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패전, 영토상실, 또 한 번 전쟁터가 되면서 피폐해진 하남령이란 3중고에 시달리게 된 위나라에서 이는 큰 지지기반이었다. 망묘는 '소진을 제어하지 못한' 국왕과 태자 위의를 배제[60]하고 송나라로 시집 갔던 둘째 왕녀 위리를 앞세워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61]

그렇게 위래가 의도적으로 정치에 배제시킨 둘째 왕녀 위리가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고, 조선이 이후 어린 셋째인 위포와 조선의 왕족을 결혼시킴으로서 또다시 벌어질 위나라의 왕위를 둔 내부 권력투쟁의 서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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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조구위(조선을 위협하여 위나라를 구하다.)를 위하여 조선령 임치군으로 진격[2] 중원이 아닌 의거 출신이라 편의상 AA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3] 1차 중원대전의 마지막 전투도 소황에서 치루어졌으니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전투다.[4] 위나라에서 이름 있는 인물 하나가 타살로 죽었다는 것 이외에 당시에는 의미가 크진 않았으나, 결국 후일 결정적인 순간 초동 대응에 차질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5] 원래 원한이 쌓여있던 상황에서 하남대전 이후 또다시 남정을 뜯어간 초나라와의 태도 차이를 부각시켜, 위나라가 하남대전 직전 5년 사이 3차례 진나라를 공격한 점을 희석시키고 진을 초보다는 위에 가깝게 끌어당기려는 목적이었다.[6] 2차례에 걸쳐서 일어난 위나라 왕위분쟁[7] 소대는 이 계책을 듣자마자 완전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엉성한 계획이라고 격노하였다.[8] 그러나 이미 위래에게 콩깍지가 씌인 소진은 소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밀어붙인다.[9] 메타적으로 다이스에서 크리 이후 고다이스 연타의 결과였다.[10] 이에 영직은 처음부터 그런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의 계기로 위의 전략이 변경된것 같다고 말한다. 천하의 영직도 위래의 역린건만은 파악하지 못하였다.[11] 협공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위군이 하동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진의 서하 진공은 쉬워지고 조선의 하동 공략은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12] 영탕은 하남대전 직전의 최후통첩에서도 조선과의 의리를 지키다가 하남대전에서 조선이 패한 뒤에야 마지못해 합횡에 합류한 친조선파였고, 영통은 조선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 하남대전 이후 귀환하였으며, 초나라의 지원을 받는 영직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이 진과 북방 유목민들과의 평화 유지를 위해 영향력을 계속 행사해 주는 조건으로 영통의 지위 보장을 요구해 소량조에 앉힌 바 있었다.[13] 영탕과 영직의 화해소식은 진내부에서 두사람만이 알고있다. 이에 영통에게도 사정을 이해시켜야했다.[14] 물론 영통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하였지만 영직의 말빨에 마지못해 납득하고 조선에 서한을 보낸다.[15] 위국령을 지나야 하는데 선왕의 조문사절을 명분으로 사신을 보내고 기슬은 사신단에 몰래 숨어서 동행하였다. 도중 검문을 두 번 받았지만 천운(다이스운)으로 들키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였다.[16] 왕인 기설이 직접 나서서 성공적으로 위가 송과 연대하여 초와 대립관계를 가진다는 고급정보를 알게된다.[17] 그 대가로 화씨벽을 조선에게 바치겠다고 하였다. 기설도 처음에는 의심하였다가 화씨벽을 바치겠다는 말에 한의 진심임을 알았다.[18] 이 병력의 규모는 사실 해당 방면의 목적을 기준으로 최소선(!)으로 동원한 것이라 그 보정과 어장 시작부터 누대에 걸쳐 철저히 벼려진 조선군의 기량이 합쳐저 무판정으로 100의 숙련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19] 위는 이전부터 흉노에게 적대적이었고 전임 서하군수 경리가 죽은것도 흉노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20] 조금만 더 그 자리에서 굳어있었으면 본인도 화살에 당할 뻔했다.[21] 의거왕이 아탈란테가 경리를 죽였다고 하자 잠잠해질 때까지 진나라에 가 있으라 하였고, 그런 그녀를 상수가 무릎 꿇으면서까지 객장으로 모셔온 것이다. 아탈란테는 진심으로 자신의 주군을 위하는 상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기꺼이 그녀를 위해 활을 들었다.[22] 메타적으로 이때 위군의 사기 상승으로 숙련도가 60에서 6상승한 66이 되었다.[23] 하남대전의 대가로 받아온 중모는 하북의 군사적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에게 받아온 것이지만 막상 제 역할을 해주어야 할 때 아무것도 못한 것이다.[24] 악의는 이전 산동대전부터 지금까지 고지식할만큼 정석적인 군사운용을 보여주었다.[25] 이때 몽오는 패전의 징계로 근신하도록 명하였다.[26] 초로 가는 가장 빠른길은 한나라를 통과하는 길이었기에 한나라의 구원요청을 한후 바로 초나라로 가는 것이 사신의 목적이었다. 그런 사신이 한에서 차단당하였기에 초는 대전내내 중원의 전투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고 모든 싸움이 끝날 때쯤에나 알게 되었다.[27] 참고로 조선군이 단씨와 고도를 함락할때까지도 전령이 늦은 사유는 급하게 움직이느라 평소 사용하지 않은 산길을 사용하여 길을 잃었기때문이다.[28] 산동대전 당시 고질이 보여준 기동전을 뛰어넘는 속도였다고 한다.[29] 하기 입장에서도 피뢰점령이 하동방면의 진공 중요고비중 하나였다. 단씨와 피뢰사이는 길이 하나뿐이었고 피뢰라는 뚜껑이 닫히면 조선군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었다.[30] 이미 피폐할대로 피폐한 하남에서 무리하게 징병하여 메타적으로 병력 숙련도는 48이었다.[31] 몽오를 제외한 네임드급 장수들(임홍, 초사) 대부분이 하동-서하쪽에 있어서 지휘관도 범장이었다.[32] 사실 송나라의 상방 위염이 나서야하지만 위염의 권세가 커지는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당앙은 일국의 재상이 함부로 움직이면 안된다는 명분하에 자진하여 원군지휘를 맡았다. 송왕 연홍옥도 당앙의 논리가 틀리지 않았기에 받아들였다.[33] 위염은 당앙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하여 무리하는 것(조선군이라는 강군을 상대로 겁먹지 않소 정치적 목적만 생각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고, 대충 눈치 챈 이후로 전쟁은 생사의 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당앙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34] 이때 제가 내세운 명분은 <위조구위(圍朝救魏)> 였다.[35] 당연하지만 그런 병사로 방위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고기방패행이다.[36] 실제로는 진격하여 공격하는척만 하고 싸우지는 않았다.[37] 메타적으로 평양 방어군은 6천3백에 숙련도가 34, 성의 방비는 49였다.[38] 북쪽에 남아있는 현들에서 병력을 모아 돌아오는 관중진공군과 조선군의 싸움때 측면을 공격할 계획이었다.[39] 하동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서 이미 하동 전역이 조선군에게 점령되는 순간에도 모르고 있었는데, 하동측에서 보낸 전령이 하내로 오던중 호랑이에게 잡아먹혀서 정보가 차단된 상태다.(...)[40] 음양오행에서 흑색은 북쪽을 뜻한다. 즉 조선군의 군기는 흑색[41] 그러나 이때까지도 하동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하였다.[42] 대량에 주둔중인 위군과 송군 다 합해도 5만을 넘지 않았으며, 숙련도 역시 조선군 98, 위군 48, 송군 70 이었다.[43] 더불어서 극현까지 쉬지않고 진군한 덕에 제장성 동단까지는 공격하지 못하였다.[44] 하동을 점령시 영토를 나누어 줄 것[45] 1차 중원대전의 마지막 전투도 소황에서 치루어졌으니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전투다.[46] 문소는 기설에게 위나라를 멸하도록 바람을 넣은 관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 관리를 2계급 강등시켰다.[47] 다만 좀 쉬고 위를 바로 멸국시키려던 계획에 따르면 진을 안정화 시켜놓으려던 것은 위나라를 곧 없에버리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었다(…)[48] 정확하게는 소진[49] 그와 별도로 주나라측에서도 조선과 마주할 필요성을 느껴서 끼어들었다.[50] 주나라는 한이 맹진을 가져갈시 심각한 위협을 느끼기에 중요한 사항이었다.[51] 합횡[52] 당시 의학 기술과 소진의 연령 및 건강 상, 이 또한 상당히 중형에 달하는 형벌이었다.[53] 과한 은혜를 베풀었으니 칭신을 종용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54] 웅횡은 혹 그때 쓰러뜨린 조선군이 사실 1만이 아니었는지 의심했지만 4개국이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그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두혁이 재차 확인시켜주었다.[55] 위래의 둘째 위리와 송의 왕족이 결혼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위리는 남편을 송에 버리다시피 하였다.[56] 망묘, 신차, 사마착, 백기, 하기, 악의[57] 해당 대사는 킹덤(만화)의 등장인물인 이목(킹덤)이 했던 대사를 인용하였다. 다만 이후 킹덤 이목의 행적이 행적인지라(…) 당시 스레민 사이에선 경취의 패배 플래그라는 말이 오갔고, 이는 상구대전과 종횡대전을 통해 실제로 증명되었다.[58] 특히 아직 완전한 본령이라 할 수 없었던 임치군 일대의 백성들에게 조선이 조만간 다시 20만쯤 동원해 제나라를 필시 칠 것이라는... 매우 근거가 상당한 의식을 심어 일시적이긴 하지만 일대를 안정시켰다. 그럼그럼(...)[59] 여태까지는 만연한 반초 감정 또는 성향 때문에 오히려 좋게 여겨 방조하고 있었지만, 일개 평민이 타국의 귀족을 습격하는 사례까지 도달하자 이게 자신들에게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점을 살짝 고깝게 여겼다.[60] 실제로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진의 경우 어디까지나 왕인 위래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책략을 짜 왔고, 이번 관중 진공의 경우 아예 감정적으로 폭발한 위래의 주문에 맞춰서 계획을 급조한 수준에 가까웠다. 다만 망묘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왕이 외교를 잘못했다'고 비난하기 보다는 '측근 소진의 전횡을 방치했다'처럼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게 정치적 부담이 적고, 국내 여론이나 조선의 눈치에 편승하기도 쉬웠기 때문에 이러한 명분을 내세워 흐름을 탔다. 무엇보다도 위래의 부친은 조선의 공족이었으므로 혹시 모를 역풍을 방지하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61] 거기에 위리의 사돈이 바로 송왕실이었기에 송나라와의 전쟁위기를 넘길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