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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56대 대통령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볼라뇨스
Gustavo Díaz Ordaz Bolaños
파일:오르다스.jpg
출생1911년 3월 12일
멕시코 푸에블라 주 산 안드레스 찰치코물라[1]
사망1979년 7월 15일 (향년 68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자르디네스 델 페드레갈
학력푸에블라 자치 대학교(법학 / 학사)
재임 기간제56대 대통령
1964년 12월 1일 ~ 1970년 11월 30일
직업변호사, 외교관, 정치인
종교가톨릭
국적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가족아버지 라몬 디아스 오르다스 라도넷
어머니 사비나 볼라뇨스 카초
배우자과달루페 보르자(1937년 결혼, 1974년 사별)
자녀3명
정당
경력내무부 장관
제56대 멕시코 대통령 (1964 - 1970)
주스페인 멕시코 대사

1. 개요
2. 생애
3. 멕시코 대통령
3.1.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
4. 퇴임 이후
5. 사망
6. 여담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회 선언

1. 개요[편집]


멕시코의 제56대 대통령.


2. 생애[편집]


정치인 가문 출신으로, 19세기 중반 자유파와 보수파의 내전 중 오아하카 주에서 보수파에 맞서 싸웠던 호세 마리아 디아스 오르다스의 증손자이다. 또한 포르피리오 디아스와도 먼 친척이다. 외가 역시도 오르다스의 외삼촌이 오아하카의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 가문이다.

아버지 라몬 디아스 오르다스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시절 여러 관료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 집안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푸에블라 주로 이주했다.

푸에블라에서 그는 Colegio del Estado에 입학하여 26세에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그는 고향에서 여러 공직을 역임했으며 그 중 연방 조정 및 중재 위원회 의장과 푸에블라 주 판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당시 푸에블라 주지사인 막시미노 아빌라 카마초[2]의 눈에 들었고, 그때부터 정치적으로 상승 기류를 타게 된다.

1943년 푸에블라 주 제1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946년부터 1952년까지는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1958년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노동투쟁이 활발히 일어나고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책이 출간되고 있었는데, 이들을 철저히 억압했다.


3. 멕시코 대통령[편집]


오르다스 정부는 "안정화 개발" 모델에 따라 멕시코의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국가 GDP는 6%에서 8% 사이의 성장률을 유지했고, 인플레이션은 2.7%로 낮게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도농격차와 빈부격차, 실업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1967년에는 틀라텔롤코 조약이 멕시코시티에서 서명되었고, 이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핵무기 금지 기구(OPANAL)가 탄생했다.


3.1.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편집]


오르다스 이전부터 멕시코의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고, 성장하는 멕시코 경제를 과시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러나 이촌향도 현상과 심화되는 빈부격차, 여당이었던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불만이 수많은 청년들 사이에서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개막식 전날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때 오르다스 정권은 학생 시위에 탄압을 벌였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불법체포, 학대, 고문, 간첩몰이, 살인, 초법적 처형을 자행했다. 또한 학생운동을 공산주의와 연결 지으려는 시도 역시 자행되었다.

1968년 멕시코 의회 네 번째 정부 보고회에서 오르다스는 사회적 불만을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시도와 연관시켰다. 또한 외부 요인이 학생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오르다스가 내린 최종 명령은 갈리아나 작전이라고 불리는 군사 작전의 실행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이는 1968년 10월 2일 틀라텔롤코 학살로 절정에 달했다. 당시 군경이 관련 증거들을 철저하게 은폐한 탓에 아직도 사망자 수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오르다스 정권은 희생자가 30∼40명에 불과하다고 발표했지만 CIA는 약 300명이 희생됐다고 추산했다. 멕시코 시민사회도 350여 명이 사망하고, 25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보고 있다.

1969년 9월 1일 오르다스는 의회에 제출한 다섯 번째 정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본인은 지난 해의 사건과 관련된 정부의 결정에 대해 개인적, 윤리적, 사회적, 법적,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전적으로 집니다.


이후로도 사망할 때까지 틀라텔롤코 학살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고 주장하며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4. 퇴임 이후[편집]


1970년 12월 1일, 자신의 내무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1977년 4월, 프랑코 정권 수립으로 38년 간 단절되었던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가 재개되자 스페인 주재 멕시코 대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틀라텔롤코 학살 사건에 대한 스페인 내에서의 비판과 건강 문제로 사임했다. 멕시코의 대문호 중 한 명인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이때 오르다스의 대사 임명에 반발하며 주프랑스 대사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5. 사망[편집]


1979년 멕시코시티에서 대장암과 천식으로 사망하였다.


6. 여담[편집]


  • 2012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27%가 오르다스 정부에 대해 "매우 좋음" 또는 "좋음"으로고 응답했고, 20%는 "보통" 행정부라고 응답했으며, 45%가 "매우 나쁨" 또는 "나쁨"으로 응답했다.

  • 전임자 로페스 마테오스와 함께 CIA에 채용되어 협력했다는 사실이 2017년 기밀 문서 해제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전에도 CIA 출신 내부고발자 필립 에이지에 의해 폭로된 바 있다.

  • 2018년 멕시코시티 정부는 지하철에서 디아스 오르다스가 언급되는 명판을 모두 폐기했다.


  • 사망 당시 나이가 68세인데, 틀라텔롤코 학살이 일어난 년도인 1968과 같아서 종종 회자된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4 07:34:40에 나무위키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현 푸에블라 주 시우다드 세르단[2]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