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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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왕족.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남이자 용성대군의 양자이다.
2. 생애[편집]
2.1. 초반[편집]
1648년(인조 26년) 11월 6일에[1] 태어났다. 10살에 아버지 인평대군과 어머니 오씨 부인을 잃었고, 얼마 뒤 즉위한 사촌형 현종[2] 이 고아가 된 복평군 형제를 궁에 들여서 키웠다.[3]
공식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건 1666년(현종 7년) 3월 26일 자 《승정원일기》 기사이다. 현종이 대비를 모시고 온양에 행차할 때 대비가 탄 수레를 모시며 호종하는 역할을 했다고 나온다.# 1669년(현종 10년) 3월의 행차에도 역시 따랐다.#
1668년(현종 9년)에는 형 복창군, 복선군과 함께 사냥으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 추고받았다.# 이후로도 기우제에 참여하지 않았다하여 탄핵을 받았고# 1671년(현종 12년)에는 행동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다시 추고를 받았다.#
1672년(현종 13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 베이징에 다녀왔고# 1673년(현종 14년)에는 청나라 책들에[4] 인조반정 관련 내용이 잘못 적혔다하여 현종에게 대응해야한다고 형 복창군, 복선군과 함께 상소했다.#
2.2. 숙종 시기[편집]
1674년(숙종 즉위년)에 사촌형 현종이 승하하고 당조카 숙종이 즉위했다. 숙종이 왕이 된 후 복평군은 여러 큼직한 사건에 휘말렸다. 결국 1680년(숙종 6년) 허견 옥사 사건에 엮여 유배를 갔고 그의 두 형 복선군과 복창군은 사형당했다. 자세한 것은 홍수의 변과 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
3. 사망[편집]
1700년(숙종 26년) 8월 14일에[5]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6]
3.1. 사망년도에 관한 논란[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흔히 알려진 1680년(숙종 6년)에 일어난 삼복의 옥때 다른 형제들과 같이 유배지에서 사사당한 것으로 적혀있다.# 두산백과에서는 약간 다르게 유배된 후 2년뒤인 1682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고 적혔다.#
그러나 1900년(광무 3년)에 제작한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에는 1700년(숙종 경진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와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기사에도 1690년대에 복평군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무슨 이유인지 다른 두 형과 함께 사형당하지 않고 유배를 가서 1700년에 사망한 것이 맞는 듯 하다.
4. 묘소[편집]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인평대군 묘 근처에 있다.
1763년(영조 39년)에 홍봉한의 건의로 영조가 복평군의 관작을 복구시켰다.#
1864년(고종 1년) 8월 10일에[7] 고종이 시호 ‘효익(孝翼)’을 내렸고#, 1871년(고종 8년) 9월 15일에는[8] 복평군을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로 삼으라고 명했다.#
5. 가족 관계[편집]
- 부 :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 1622 ~ 1658)
- 모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福川府夫人 同福 吳氏, 1622 ~ 1658) - 감사 증 우의정 오단(監司 贈 右議政 呉端)의 딸
- 양부 : 용성대군 이곤(龍城大君 李滾)
- 정부인 : 군부인 전주 최씨(郡夫人 全州 崔氏) - 최영세(崔永世)의 딸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장남 : 완계군 이찬(完溪君 李粲)
- 며느리 : 김해 허씨(金海 許氏) - 허수(許洙)의 딸
- 손자 : 낙춘군 이전(洛春君 李㙉)
- 손녀 : 황사설(黄思說)의 처
- 서차남 : 완천군 이엽(完川君 李燁)
- 며느리 : 남천 서씨(南川 徐氏)
- 손자 : 전흥군 이념(全興君 李埝)
- 손자 : 전춘군 이계(全春君 李堦)
- 서3남 : 완양군 이홍(完陽君 李烘)
- 며느리 : 평양 조씨(平壤 趙氏) - 조종렬(趙宗烈)의 딸
- 손녀 : 최진상(崔鎮常)의 처
- 며느리 : 진주 강씨(晉州 姜氏) - 강성빙(姜聖聘)의 딸
- 손자 : 악성군 이단(樂城君 李壇)
- 손자 : 악림군 이연(樂林君 李埏)
- 손녀 : 최경명(崔敬命)의 처
- 서4남 : 완원군 이식(完源君 李烒) - 형 복창군에게 출계
- 서5남 : 완릉군 이경(完陵君 李烱) - 형 복선군에게 출계
- 서장녀 : 신한상(申漢相)에게 출가
- 서차녀 : 최성대(崔盛大)에게 출가
5.1. 후손[편집]
좌랑을 지낸 최영세의 딸과 혼인했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복평군의 자녀는 전부 서출이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완계군 이찬(完溪君 李粲), 차남은 완천군 이엽(完川君 李燁), 3남은 완양부정 이홍(完陽副正 李烘), 4남은 완원군 이식(完源君 李烒), 5남은 완릉군 이경(完陵君 李烱)이다. 이 중 완원군은 복평군의 둘째 형 복창군에게, 완릉군은 셋째 형인 복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장녀는 신한용과, 차녀는 최성대와 혼인했다.#
복평군의 9대 종손이 신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며 소설 《자유종》으로 유명한 문학가이자 언론인인 이해조이다.[9] 그리고 이해조의 손녀이자 복평군의 11대손이 기독교 여성운동과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대모 이우정 전 국회의원이다.
[1] 음력 9월 22일.[2] 인평대군의 형 효종의 아들.[3] 인평대군의 자녀는 총 6남 4녀이다. 그 중 2남, 4남, 3녀, 4녀는 요절했고 당시 살아있던 자녀는 총 4남 2녀였다. 큰아들 복녕군과 3남 복창군은 이미 봉군되었고 혼인했기 때문에, 1녀, 2녀, 5남 복선군, 6남 복평군이 궁에서 자랐다.[4] 《황명통기(皇明通紀)》, 《십육조광기(十六朝廣紀)》,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이었다고 한다.[5] 음력 6월 30일.[6]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 만 나이로는 51세이다.[7] 음력 7월 9일.[8] 음력 8월 1일.[9] 시인 고은은 이해조 비문에 '복평군의 십대 종손'으로 썼으나 계대를 보면 9대 종손이 맞다.관련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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