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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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수난이라는 불운을 깨부순 유일무이한 임금이다.[2][3]
몸이 병약했던 13~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왕족이면 보다 빨리 후사를 보길 바라는 마음에 10세~12세에 조혼을 시켰지만 손(孫)이 급하지 않은 일반 양가집이면 15세 정도에 결혼을 시켰고 과거에 응시해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20세가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년으로 보아 아버지도 20살이 된 아들의 집안일에 관여하면 큰 실례로 여겼다. 숙종은 14세(만 13세)여서 조선의 기준으로도 아직은 성인이 되기 전이었다.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숙종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숙종은 다혈질이고 냉혹했으며,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향유했던 중흥 군주이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희빈 장씨이다.
집권 기간 동안 정사를 멀리하고 희빈 장씨를 비롯한 많은 여인들을 탐닉했던 국왕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숙종은 후궁의 수가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 적었으며 자식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이 여자와 관련한 문제가 가득한 임금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국왕과 달리 정치적 사건의 해법으로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4][5]
2. 생애[편집]
2.1. 조선 왕조 역대 최강의 왕권[편집]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 본인은 현종과 정실 부인인 명성왕후 소생의 고명아들이었다.[6] 이것만으로도 정통성으로 꿀릴 것이 없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외척과 관련된 트러블도 전혀 없었던 덕분에 부계와 모계 모두 완벽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이었다.[7]
초명은 '광(爌)'이었으나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李廣)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수양제의 이름인 '양광(楊廣)'과도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휘를 '순(焞)'으로 고쳤다.
독자였기에 연산군 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마땅한 대군도 없었고, 남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경계대상이었던 인평대군의 아들들은 삼복의 옥으로 제거되어 동평군 정도만 남게 된다.[9] 이 때문에 친어머니인 명성왕후와[10] 법적 증조모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숙종을 거의 견제하지 못했다.[11] 이 때문에 14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바로 친정(親政)에 나섰다.[12]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 - 세자 - 왕 순서로 정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 장수하기까지 한 왕이다. 역대 조선 왕조의 적장자[13] 들은 단명, 숙청, 폐위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큰 풍파에 시달렸으나 숙종만큼은 이런 풍파를 무난히 피해갔다. 숙종의 험악한 성깔은 어머니(명성왕후 김씨)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14] 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 - 왕비 - 대비 테크를 제대로 차근차근 하나 둘씩 밟았다. 추가로 계증조모 대왕대비까지 있었으니 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쿠데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개념인으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막나가는 종친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런 종친은 당시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15][16]
문종과 인종과 헌종[17] 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18]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19] 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당하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원손 - 세손 - 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20]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 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아들인 경종도 장희빈이 중전에서 폐위되어 사사당했으므로 적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순종 황제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 왕조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 면에서 완벽한 그는 왕권을 눈치보지 않은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완벽한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2. 포악한 성격과 화병[편집]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평가한 숙종의 성격.
유년기에 몸이 허약한 것과 다르게 매우 포악한 성격이었다. 숙종의 포악한 성격은 아들인 경종과 영조는 물론 증손자인 정조도 물려받는다. 궁녀들이 왕실의 행사를 위해서 머리를 빗기고 옷을 입히려고 시도하면 몸서리를 칠 정도로 혐오하였다. 결국 궁녀들이 난감해하는 바람에 머리를 빗기는 것은 명성왕후가 맡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손길마저도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려서 참다 못한 명성왕후가 빗으로 숙종의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긴 일화가 존재한다. 조선에서 가장 독선적인 왕비로 평가받던 명성왕후조차 숙종의 포악한 성격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직 내전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인현왕후가 출궁당한 희빈 장씨를 불러들이자고 간청하자 명성왕후는 며느리에게 숙종의 성격을 언급하며 반대하였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인현왕후의 간청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이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출궁하면서 칠거지악을 모토로 조선의 여성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데 그것이 바로 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는 왕비의 덕목을 지킨 것이다. 그 외에도 숙종에게 승은을 입고도 특별상궁이나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한 궁녀에게 첩지를 내리자고 간청하였고 더 나아가서 명성왕후에게 출궁당한 희빈 장씨도 다시 입궁시키자고 간청하였다. 이후 인현왕후의 주장이 관철되어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간택령을 내려서 부르는 방식으로 희빈 장씨는 다시 입궁한다. 연령군의 생모인 명빈 박씨도 이 시기에 특별상궁으로 승차한다. 풍문에 의하면 부왕인 현종에게 후궁이 없는 이유가 명성왕후의 독선적인 성격 때문인데 첩을 들이는 일이 잦은 숙종을 보고 명성왕후는 항상 불만을 표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상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 번뇌가 심해져서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하였다.
1688년 7월 16일의 숙종실록에 기록된 숙종의 상태.
숙종이 평생을 호소한 질병은 산증인데 하복부가 아프고 대소변이 원활하게 배출되지 않는 증상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간질성 방광염으로 보는데 방광 근육 내부의 궤양과 섬유화로 방광의 용적이 줄어들고 하복부 통증이 지속되며 혈뇨가 배출되는 증상이다. 산증으로 고통을 겪으며 포악한 성격에 더욱 강한 불이 지펴진 것이라고 파악이 가능하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동의보감이 설명한 산증의 원인.
당시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느끼던 숙종이 자연스럽게 화병을 얻었고 화병의 영향으로 산증까지 앓게 되었다고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신경성인 사람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스트레스성 질환을 얻은 상황과 유사하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희빈 장씨는 악녀이고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현혹되어 조강지처를 버린 왕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전혀 아니다. 숙종이 다혈질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여 여러 문제를 일으킨 왕이라는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숙종도 자신의 포악한 성격을 인지하여 자신의 성격과 병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였다.
나의 화증이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오랜 시간 일하면 화염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1704년 12월 11일의 숙종실록.
숙종의 아들인 영조도 산증에 시달린 점을 감안하면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신경성이 유발한 스트레스성 질환이거나 방광의 질환이 유전되어 통증의 만성화되자 성격이 포악하게 변화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아버지가 온화한 성격인 반면 어머니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도 가장 강직하다고 평가받는 왕비이니 숙종의 성격은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명성왕후는 1675년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이자 숙종의 당숙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내시들을 심복으로 만들고 나인들과 간통하여 아이를 낳은 이유로 탄핵당한 홍수의 변이 일어나자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대전으로 행차하여 통곡하는 물의를 빚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 삼형제의 행각이 드러나자 앞장서서 삼형제를 탄핵하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오히려 삼형제와 남인에게 무고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몰린다. 신하들도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라고 명성왕후를 비판하였다.
1688년에 희빈 장씨가 경종을 출산하자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다. 이를 목격한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 소유들이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탑승한 가마를 부순다. 부서진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조선의 법에 의하면 정3품 이상의 관리인 당상관의 여성 가족이 타는 가마다. 소유들은 법을 지킨 것이지만 이 사태를 듣고 격노한 숙종은 소유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숙종의 명령을 뒤늦게 인지한 신하들이 겨우 뜯어말려서 국문은 중단되었지만 의금부에 끌려가서 국문을 받던 소유 2명은 고문으로 사망한다. 당시에 상궁들도 가마를 타는 등 암묵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법이었으나 원칙에 입각하여 법을 적용하면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주제를 넘은 것이다. 신하들의 극심한 반발이 이어지자 숙종도 마지못해 물러서서 법을 지킨 소유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소유들에게 상을 하사하고 이 사건을 지적한 대간들을 칭찬하였다.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면모를 숨기지 않는 숙종. 법대로 일을 처리한 소유들을 죽인 것은 희빈 장씨의 환심을 사려고 한 일이며 희빈 장씨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인 송시열과 서인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래서 서인의 수장인 송시열이 사망하자 숙빈 최씨를 이용하면서 희빈 장씨를 외면한 것이다. 계비인 인현왕후마저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을 거론하며 폐서인으로 만들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는다. 5년 후에 희빈 장씨의 가치가 사라지자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삼으면서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지만 폐서인 시절에 얻은 병이 악화된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7년 후에 사망한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의 죽음을 희빈 장씨의 저주로 돌리고 사사한다. 숙종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일이 없고 오로지 사건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왕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간언하는 신하들도 가차없이 사사하고 왕비라는 자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아들인 경종의 삶도 엉망으로 만들고 만다.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길고 열악한 폐서인 생활이 사망에 영향을 미쳤고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는 증거도 고문으로 인한 궁녀들의 거짓 자백인데 다시는 일어날 없도록 가차없이 사사한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사사될 당시의 경종은 어린이도 아니고 충분히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14세였다. 헌대의 기준으로도 서양이나 동양이나 14살에 부모가 사망하는 건 비극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숙종도 14세에 즉위하고 친정을 한 유능한 군주이므로 14세의 경종도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숙청을 자행한 태종도 충신들과 원경왕후는 물론 후궁도 건드리지 않은 사실을 상기하면 숙종이 얼마나 잔혹한 왕인지 알 수 있다.
숙종의 포악한 성격으로 극단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은 이유는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숙종과 다르게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남인에게도 힘을 주고 사약처럼 극단적인 처벌은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현종의 치세에 정치적으로 피바람이 분 사실이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모후의 독선적인 성격을 많이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명성왕후가 세자인 숙종의 양육자로서 숙종에게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아버지와 할머니인 인선왕후가 오래 생존하였다면 숙종도 잔혹한 수단을 남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선왕후는 아들처럼 인자한 성격이었고 시어머니인 장렬왕후와도 사이가 좋았다. 거기다 시아버지인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를 통해서 왕이 후궁을 이용하여 왕권을 남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오래 살아서 숙종이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를 이용하며 마구잡이로 왕권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절대 용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인현왕후가 명분없이 폐위당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의 거물들이 왕의 뜻에 반한 이유로 사사될 정도로 잔혹함이 심한 기사환국은 대왕대비인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1년 후에 발생한다. 장렬왕후가 숙종과 피가 섞이지 않은 증조할머니라지만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대왕대비인데 그런 장렬왕후의 상중에 확실한 명분도 없이 시증조모상을 지내는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신하들을 사사하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자행한 것이다. 정당한 명분도 없었기에 이것은 유교적인 측면에서도 물론이고 객관적으로 봐도 비정하고 인륜을 저버린 행위이다. 그래서 숙종은 당대의 백성에게 인기가 높았어도 숙종의 면모를 아는 당대의 신하들과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군으로 인식할 수 없는 왕이다.
그래도 숙종은 연산군과는 다르게 정치력은 뛰어난 왕이다. 연산군이 눈에 보이는대로 짓밟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을 사사하고 가족도 억압한 반면 숙종은 어지간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만 사사하고 가족은 건들지 않으며 절제하였다. 그리고 재위 말기에는 왕의 의무에도 무관심하며 사치와 향략에 물든 연산군과 다르게 숙종은 왕의 의무를 절대 잊지 않았고 자신과 무관한 인물은 억압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국정을 방치한 기간은 2년 남짓이지만 단기간에 저지른 추태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서 폐위당한 반면 숙종은 46년을 재위하면서도 숙청으로 발목이 잡힌 사례가 없다. 포악하지만 정치력은 연산군보다 숙종이 더 뛰어난데 숙종이 무자비하게 숙청을 자행하며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시기가 기사환국을 벌인 1689년이다. 이 시기에는 증조모이자 왕실의 어른인 장렬왕후가 사망하여 왕실의 어른이 아무도 없는 상태였는데 그걸 노린 것이다. 연산군은 노쇠한 조모인 인수대비에게 대놓고 불순한 언행을 저지르고 모친인 정현왕후에게 위협을 가려려 한 탓에 결국 정현왕후와 반정세력에게 폐위당하는데 장렬왕후가 사망한 후에야 숙청을 시작한 숙종은 정치력이 더 뛰어난 왕임을 알 수 있다.
2.3. 환국(換局) 정치[편집]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모든 권력이 독점(일당독재화)되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는 식으로 계속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평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인조의 3남)이 서인 세력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안 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21] 서당숙인 동평군 또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였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었고[22]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었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었고 둘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 처숙부인 민정중도 서인이였다. 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친척인 조사석도 서인이었다.[23] 게다가 숙종의 매제인 오태주[24] 도 서인 중진인 오두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도 김수항, 김수흥 가문의 종질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25]
즉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갔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었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기축옥사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 것과 비슷했다.[26]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준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재위 1년(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27]
-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내고 서인 우위로 다시 뒤집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28]
-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29]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이때를 기점으로 서인과 남인은 그냥 원수지간 정도를 넘어서서 서로 피튀기는 싸움을 하는 사이로 변질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격화되었다.[30]
-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31]
- 재위 27년(1701년), 신사의 옥으로 남인 잔존세력들마저도 모두 박살냈으며 소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곧 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으로 남인은 몰락을 넘어서서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했다.[32] 이건 어찌보면 갑술환국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33]
- 재위 31~32년(1705년 ~ 1706년), 임부의 옥사와 이잠의 옥사로 이미 재기불능에 빠진 남인들을 정치에서 싸그리 소멸시켜버렸으며 이 사건들로 인하여 소론의 영향력 역시 더욱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은 제1세력을 넘어 1당 독재 수준으로 굳어진다.
- 재위 36년(1710년), 예기유편 편찬에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고 게다가 당시 편찬자였던 최석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고 거기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 도제조였던 최석정이 임금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했다는 의혹까지 확산되면서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소론인 최석정에게 영의정 관직을 삭직하고 노론인 이여에게 영의정으로 제수를 하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고 소론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는데 일조함.
-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전자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중자로는 기사환국 이후로, 후자로는 갑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신사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 여러가지 옥사들이 일어난 이후로 노론을 점점 계속 등용하더니[34]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대거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36] 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너죽고 나죽자 하는 피비린내 싸움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서인→노론)의 일당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겨우겨우 밀어붙여야만 했다.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은 숙종이 균역법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만들었다.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儉弱, 검소하고 절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37]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
2.4.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철천지 악연[편집]
이렇게 숙종은 피튀기는 환국을 일으킨 끝에, 세자 시절부터 미워했던 서인의 영수, 그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숙종의 증조부 인조, 조부 효종, 부친 현종까지 내리 3명의 선대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 없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38]
숙종의 송시열 사사는 철저한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을 원자로 삼고, 더 나아가 세자로 삼는 것(세자 건저)을 송시열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39] 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다고 추측된다. 숙종은 애초부터 송시열을 싫어했던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답게 경종의 원자책봉을 밀어붙였고, 송시열 역시 하던 버릇대로 원자책봉을 열렬히 반대하며 숙종과 각을 세우다[40]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이로 인해 송시열을 따르던 서인계 유생들과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마저 죄다 유배를 보내는 불같은 성질을 보여줬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이 난 숙종은 송시열을 국문(고문)하기 위해 그를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직접 불러들였다. 그때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올라오는 길에[41] 그를 따르는 노론 추종자들이 몇백 명이었다고 하며,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송시열을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든 선전관을 출동시켜서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켜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42] 이라 못을 박고[43] , 그 부인인 인선왕후에 대해서도 대공복 주장을 폈다.[44]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역린)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정치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의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해서 노론으로 하여금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끔 만든 게 한편으로는 역사의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45]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숙종 이순) 축하를 대놓고 디스했다고 한다.[46]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정치적 연륜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더욱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서인의 영수이자 원로인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바로 숙종이었다.
2.5. 치적[편집]
국왕으로 재위했던 시절, 숙종은 비록 당쟁의 대립으로 인한 조정의 분열을 예방하지 못하고 사적인 애정관계 또한 잘 다스리지 못해 결국 조선 후기 당쟁의 극한 대립을 초래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학식과 온후한 성품으로 역대 조선조 국왕 중 치세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몇 안 되는 성군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 『肅宗春坊日記』에 나타난 숙종의 세자 생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章閣, Vol.33, pp. 21-40, 주기평)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조선 조정에 있어서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 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탄탄했다. 특히 숙종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 / 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
조선의 국경도 숙종 연간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이 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壓綠 東爲土門)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 등의 문제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숙종연간인 1678년에 안남왕 희종은 안남(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은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그냥 표류한 것으로만 처리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의 치적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19세기의 민담이 일률적으로 '숙종대왕 호시절에'라는 표현을 채용하는 것으로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는 긴 치세동안 큰 기근들도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환국정치가 있어 평화롭다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매우 긴 46년의 치세동안 조선의 회복과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정책을 펼쳤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수많은 왕이 평복으로 변장하고 민간에 다니면서 능력 있고 선량한 사람을 발천(發闡)하게 하는 내용의 설화인 조선 시대에서 왕미행설화에서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숙종이다. 정치와 궁중에서 매우 냉혹한 군주였으며, 인구의 감소까지 초래한 큰 기근이 두 번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수많은 민담에서 백성에게 따뜻한 군주이며 호시절을 살게 한 성군으로 기억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군주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숙종의 군주로서의 역할 수행에 대해 백성들의 평가가 높았다는 뜻이다.
2.6. 추증과 복권[편집]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47] 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을 왕으로 종묘에 신원을 회복(신주를 가져다가 모시는 일)시킨 후 깨끗이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에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시호 또한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다.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숙종 7년(1681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복권되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이유는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므로,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물론 이때도 단종을 폐위, 사사한 실제 책임자가 세조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았지만 명분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48]
물론 한 번에 복위한 것은 아니고 이들에 대한 동정론을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 복위 때는 그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친히 특별히 열었다.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상왕(上王)으로 존봉(尊封)하신 뜻이 지극히 극진했었는데, 그 때의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고 정청(庭請)하고 억지로 간쟁(間爭)하여, 세조대왕의 어지신 마음으로 하여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49] 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 인조 때 그나마 군역과 세금을 면제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복권된 건 아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했던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이방번과 이방석도 복권시켜서, 이때부터 이들은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이라는 정식 시호(왕자)로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50]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51]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52]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크게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왕권이 강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반대 의견을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의 왕권쯤은 있어야 복권도 할테니까 물론 설사 왕권이 허약했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있다면 복권쯤은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영조 때는 김종서, 황보인이 복권되었고 중종의 왕비였지만 즉위 이후 7일만에 폐위되었던 신수근의 딸이 단경왕후로 복권되었으며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순조 때에는 남이도 복권되었으며 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정도전을 건국에 공이 있다고 완전히 복권시켰고[53]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되었고[54]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의 대부분과, 심저어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이징옥조차 복권된다. 참고로 이완용이 건의하고 주도했다. 어차피 순종 조에는 이미 일본의 속국 신세(일단 고종이 강제 퇴위에 반발하는 중에 순종의 즉위가 권정례로 치러진 상황)라, 망하기 전에 역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이었을 뿐이다.
2.7. 국방 정책[편집]
숙종은 방위 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듯 손 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 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 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도성은 성곽이 너무 길어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막으며, 남한산성은 한강을 도강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55]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56] 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에[57]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 성곽을 고치고,[58]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성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에 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에 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의 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59] 수도 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가 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구관당상을 제도화 한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전면 도입하였다. 각 도에 1명의 구관 당상관이 임명되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北伐)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60]
2.8. 정유독대와 최후[편집]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세자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친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 교체는 그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 정작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경종의 정통성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고, 경종 본인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경종이 한 발언은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가 거의 전부일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경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딱히 거둔 성과는 없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실책을 저지른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폐세자가 곤란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丁酉獨對)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관례상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 효과는 경종 치세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임옥사(신축옥사와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어쨌든 재위 46년째인 1720년 6월 8일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숙종은 역대 조선 왕 중 사망할 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된 왕인데 사망할 무렵에는 왼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오른쪽 눈 역시 잘 안 보이게 되었으며 복수(腹水)[61] 가 차서 배가 불룩 나온 상태였다고 하며 사망하던 날에는 계비 인원왕후와 세자, 연잉군, 신하들이 와서 엎드리며 울면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하들과 연잉군이 서로 대화하던 사이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피를 토하고 끝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9. 능침[편집]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과 3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혼자 묻힌 능 1기가 오른쪽 위 언덕에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명릉 내에 있지 않고 아예 따로 조성되었다. 서오릉 내에 있는 익릉(翼陵)이 그것. 숙종의 명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62]
덤으로 이 명릉 택지와 관련해서 야사도 있다. 숙종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청년이 딱 봐도 안 좋아보이는 물가에[63] 부모의 묘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물어보니 어떤 풍수가가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풍수가가 돌팔이라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고는 청년에게 거금을 하사하고 관가에게 말해서 명당 자리로 이장하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풍수가가 살고 있던 초막으로 찾아가서 화를 내면서 따지니까 풍수가 역시 화를 내며, "그 곳은 거금을 받은 뒤 명당 자리로 이장하게 되는 명당 자리다"라고 자부했다. 이에 놀란 숙종은 자신의 풍수 실력에 그렇게나 자신이 있으면 왜 이런 허름한 초막에 살고 있냐고 묻자, 풍수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풍수를 이용해선 안 되며, 그래도 이 자리는 언젠가 왕이 찾아오는 자리라고 말했다. 숙종이 그러면 언제 왕이 찾아오는 거냐고 묻자 풍수가는 날짜를 계산해보다가 오늘이 바로 왕이 찾아오는 날이라는 걸 알고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왕이라는 걸 깨닫고 넙죽 엎드려 절했다. 숙종은 그의 실력에 탄복해서 거금을 주겠으니 자신의 묫자리를 봐줄 것을 부탁했고, 풍수가는 천하의 명당 자리를 알려주었으나 사례는 끝까지 받지 않은 채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명릉이라는 이야기.
3. 가계[편집]
- 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 첫째: 왕녀
- 둘째: 왕녀
- 셋째: (유산)
- 제1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 제2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 후궁: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
- 첫째: 경종 이윤
- 둘째: 왕자 성수(1690년 7월19일~1690년 9월16일)
- 후궁: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 후궁: 명빈 박씨
- 첫째: 연령군 이훤
- 후궁: 영빈 김씨
- 후궁: 귀인 김씨
- 후궁: 소의 유씨
4. 특징[편집]
- 왕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업적을 남긴 왕이지만 백성의 삶에 도사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 왕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도 46년이란 기간을 놀고 먹었다고 비난하기는 근거가 빈약한데 이미 균역법의 근거가 되는 여러 조사들이 숙종 말년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지적니 많다. 균역법이 남자 1인당 포 2필이던 것을 1필로 줄인 것인데 조선의 군포를 모두 포 2필로 동결시킨 것이 바로 숙종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 부왕 현종이 기껏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산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서인과 남인 간의 붕당의 균형을 간신히 맞추어 놓은 것을 환국을 통해 다 무너뜨려 정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말년에는 아예 대놓고 노론의 편을 들면서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재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환국으로 촉발시킨 조선의 합리적 정치 시스템 파괴 역시 영조와 정조 시대까지 지속돼 마침내 정조 대에 붕당 정치의 붕괴로 절정에 이르니 그 결과는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또한 숙종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 강화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외척을 척결한 태종과는 다르게 외척에 많이 의지했다.[67][68]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영조와 정조 시대라는 조선 후기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던 만큼 의의는 크다. 또한 숙종 무렵부터 조선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장희빈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극에서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고는 하는 시기가 바로 숙종 시기.
- 숙종의 환국 정치는 마지막에 남아있던 붕당의 마지막 건전성을 날려버린 것 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 그 이후에 탕평정치가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영조와 정조가 최소한의 왕의 자질은 있는 이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심지어 정조가 펼쳤던 준론 탕평은 그 우수했던 정조마저 과로로 일찍 죽을 정도로 정치환경을 초토화시켰고 군주 하나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시스템으로 기울었다. 한 마디로 숙종이 뿌린 씨앗에 의해 군주 한 명의 자질에 완전히 좌지우지될 정도로 조선의 통치 시스템이 망가져 버렸다는 소리. 결국 후임 국왕들(영조, 정조)은 쑥대밭이 된 조선의 통치시스템을 어떻게든 다시 굴러가도록 즉위기간 내내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그나마도 정조는 그 시스템에 의한 과도한 업무량으로 결국 과로사하면서 그것이 지속가능하지 못한 시스템임을 손수 입증해버렸다. 결국 두 왕에 못 미치는 왕재인 순조, 헌종, 철종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조선은 완전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 책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숙종이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는 혹평을 면하기가 힘들다. 자세한 항목은 영조비 정순왕후의 평가 항목 참조.
- 승하할 때까지 46년(정확히는 45년 10개월)[69] 을 다스렸다. 이는 아들 영조의 재위 기간인 52년(51년 7개월)에 맞먹는 것이며 조선 국왕 중에 2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인물이다. 숙종과 영조 부자가 합쳐 조선 왕조 500년 중 100년 가까이 재위했으며 경종까지 포함한다면 (4년 2개월) 100년이 훌쩍 넘는 재위 기간이다.[70] 재위 기간이 40년 이상인 왕은 이들 외에는 둘뿐으로 선조가 41년(40년 8개월), 고종이 43년(43년 7개월)을 다스렸다. 이 점에서 영조와 정조보다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숙종 치세는 전란으로 감소한 조선의 국력이 거의 수습된 시대였고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며 화폐 유통 경제가 정착되었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시기라서 조선 경제사에서는 의미가 매우 큰 시대다.
-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와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 신앙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제사에 참석해서 술을 따르고 4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71]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관우 사당인 동묘는 무속 신앙 시설이라 유교 문묘와 분위기가 천양지차로 다르다. 유학자라면 당연히 항의해야 한다. 그러고도 숙종이 문제가 없다는 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72]
-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내렸는데,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顯忠)'이라는 호를 내림과 동시에 현충사의 제문을 직접 지었으며[73] 을지문덕,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을 아울러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게 하고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렸다. 1707년(숙종 33년)의 일이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숙종이 재위하던 시기에 일지매가 도적질을 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말로 설치고 다닌 도적은 황해도의 장길산. 황석영의 동명 소설도 있다. 경신대기근에 맞먹는 을병대기근(1695년)도 있었다.
- 성종과 함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 왕인데 함께 암행을 나가서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멋진 임금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서울에서는 "숙종 시대는 태평성대였다"라는 구비 설화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백성들 사이의 이미지는 상당히 괜찮았던 모양이다. 백성들 입장에서야 신하들이 죽든 말든 왕비가 바뀌든 말든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다. 치세가 길고 지역마다 이미지가 다를 수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 조선이 고구려보다 거대한 국가라고 믿었던 것 같다.[74] 숙종실록 38권에는 수성에 능했던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쳤거늘 더 큰 땅을 가진 조선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했다고 통탄하는 내용이 등장한다.[75][76]
- 박시백은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꽤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전체적으로 역량은 인정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선 비판의 강도가 높은 식. 군강신약을 이루었다는 점과 민생, 군역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러한 평가의 근거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환국'에 일관성이 없고 기준도 모호하였기에 정권 교체를 통한 개혁에 쓰여야 할 에너지를 정권 교체와 그 뒷수습에 소모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가 하면, 정치 세력과 명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흑백 논리에 빠지는 등. 심지어 모 상소는 '권력을 잡게 한 초기에는 무릎에라도 앉힐 듯 하시다가, 배척할 적엔 연못에 밀어버리듯 하십니다'라는 비난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는 왕 아래에서 신하들은 그저 몸을 수그린 채 눈치만 살필 수 밖에 없었고, 행여나 눈 밖에 나 숙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비판 정신을 버렸으며[77] 생존을 위해 상대 붕당들에겐 더욱 가혹해져 허울뿐인 화합이 되고 말았다.[78]
- 또 하나는 그렇게 거듭된 환국과 숙청으로 근래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으면서도 한게 딱히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에 다가서면 발을 빼기 일쑤였고(양반층 군포 징수에 일관되게 반대), 기득권층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일에도 인색하였다[79] 는 주장이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엔 그냥 저자의 조사가 부족해서 오류낸 거다. 숙종 대에는 궁방으로 하여금 해당 땅 주인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절수지를 획득하도록 한 금가 매토제와 절수지의 총량을 제한하는 을해정식이 제정, 시행되어 궁방전의 확대를 제한했다.[80][81] 양역변통이 사대부의 눈치보다 지지부진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역시 틀렸다. 오히려 양영변통절목같은 절목들이 마련되어 영조 대 균역법의 기틀을 닦았다.[82]
- 유일하게 남은 여동생 명안공주를 매우 아꼈다. 숙종의 자매로는 누나인 명선공주, 명안공주보다 언니였던 첫째 여동생 명혜공주도 있었지만 숙종이 세자이던 시절에 사망하였다. 두 공주는 같은 해 4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확한 사인은 전해지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궁궐에 돌림병이 들어와 왕가가 거처하는 궁을 옮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공주들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듯 하다. 이듬해에 아버지 현종도 승하하였으니 어린 숙종에게는 어머니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명안공주는 보통 존재가 아니다. 승하한 현종을 대신해서 혼인을 성대히 주관한 사람도 숙종이고 사신을 통해 수려한 수입산 비단이 오면 바로 명안공주에게 선물하였다. 숙종의 명안공주 사랑에 큰 피해를 입은 자가 도화서인데 명안공주에게 중부 견평방의 땅을 주는데 하필이면 그 땅에 도화서 청사가 있었다. 결국 도화서는 태평방에 청사를 잡기까지 다른 관청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문제는 10년에 1번은 어진을 그리는 제도를 숙종이 만들었고 당대 유행하던 초상화로 인해 도화서의 일이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명안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였고 결국 23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숙종을 괴롭게 한다.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은 아직 염습도 마치지 않아 문상객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명안공주의 집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통곡하였고 너무 슬퍼서 식사도 거르겠다고 말하여 신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83] 자신보다 먼저 사망한 명안공주에게 못해준 걸 매제에게 해주고 싶었는지 숙종은 홀로 남겨진 매제인 오태주를 곁에 두고 매우 아꼈다.[84] 오태주가 49세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오태주를 애도하였다. 명안공주 부부의 묘지에 가면 제문비에 새겨진 숙종의 글이 남아있는데 여동생 부부를 잃은 숙종의 절망감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 조선에서 2번째로 재위 기간이 길고 다혈질인데다 강력한 왕권을 휘루든 면모 덕분에 놓치기 쉽지만 허약한 몸에 병치레가 잦아서 몸에 좋은 약재를 즐겨먹었다.
- 중종 이후로 150년만에 개성을 방문해서 경덕궁과 만월대를 둘러보고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도 개성을 방문하며 숙종의 발자취를 보고 감회에 젖었다.
使人長智莫如學 /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기르게 하려면 배움만 한 것이 없으니
若玉求文必待琢 / 옥의 문채를 찾기 위해서는 절차탁마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
經書奧旨于誰問 /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師傅宜親不厭數 / 마땅히 사부를 가까이하여 자주 뵙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네.
1715년 11월 4일, 6남 연령군 이훤에게 내린 어필(한시).[85]
- 자식들을 지극히 아꼈다. 특히 숙종은 8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모두 요절하고 살아남은 자식이 경종과 영조 2명밖에 없었기에 아들들을 아꼈다. 여섯 아들 중 겨우 살아서 성인이 된 세 아들 가운데 6남인 연령군 이훤을 가장 총애했다. 연령군이 5세 때 모친인 명빈 박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숙종은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어느 아들들보다 연령군을 아껴서 원래 7세에 봉군(封君)하는 예법을 무시하고 5살 때 봉군되었고 7세의 나이에는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까지 내렸다. 게다가 1708년 연령군이 혼인 후 출가할 땐 직접 제택(第宅)[86] 구입에 수만냥을 들이려고 했다. 이에 부제학 조태구 등이 1년전 연잉군의 제택을 마련한 돈이 수천냥이라 지적하며 반대하자 숙종은 할 수 없이 선조의 적녀(嫡女)인 정명공주의 제택을 구입하여 하사하는데 그것도 연잉군이 구입하려 하는 것을 금한 것이었다.[87] 더구나 이후 제택을 복구하는데 들인 비용도 중인 4가구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고 한다. 이후 연령군이 21세의 이른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자 숙종은 오열을 하며 친히 제택으로 찾아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가히 아들 영조의 딸 사랑에 견줄만 했다. 경종의 경우 완전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숙종이 심하게 꾸짖는 경우가 많았으며 영조에 대해서는 공부 잘한다 이런 칭찬이 아니라 몸 튼튼해서 오래 살겠구나 하는 칭찬이 잦았다.[88] 그러나 이렇듯 극진한 애정은 연령군에게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 뒤에 바로 2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료들 앞에서도 매우 기뻐했다가 나중에 그 아들이 100일을 갓 넘기고 죽었을 때에는 "내가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라며 역시 신료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모후인 명성왕후가 언급한 것처럼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하고 희로애락이 극단적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행적이 영국의 헨리 8세와 유사하다. 숙종이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선택했다 내쳤다 했다면 헨리 8세는 아내를 6번이나 들였으며 그중 2명은 죽이고 2명은 내친 왕으로 그 와중에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나 짓밟았으며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라는 점도 닮았지만 사적으로도 숙종이나 헨리 8세나 성질이 개 같은 왕이었기에 당시 신하들 입장에서는 대하기 힘든 왕이었고 특히 헨리 8세는 말년에 이르면 그 성질이 더 나빠져서 궁중의 신하들은 왕이 빨리 죽어주기만을 바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좀 다른데 숙종이 백성을 돌보는 야사가 있듯 헨리 8세도 '해리 왕' 이라는 애칭이 있으며 당시에도 나쁜 평을 받은건 아니지만 현재에도 평가는 좋다.
4.1. 애묘인[편집]
고양이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야사가 있다.[89] 재임 시 궁궐 내 후원을 거닐던 중 가냘프게 축 처진 길고양이 한 마리를 거두게 되는데 이 고양이에게 금덕(金德)이라 이름을 붙였고 금덕이가 새끼를 낳자 그 아기 고양이를 금손(金孫)이라 명명했다. 숙종은 이들 고양이에게 손수 먹이를 먹이며 정사를 볼 때도 곁에 두고 쓰다듬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이는 네이버캐스트와 다음 웹툰 <탐묘인간>(85화 ~ 89화)[90] 역사 웹툰,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지니스쿨 역사 유별난 왕들의 애완동물 사랑 * 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왕의 위엄, 숙종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내용이 많다.
훗날 금손이는 숙종이 훙서한 직후 먹이도 안 먹고 이제 주인없는 어전만 보면서 울고 다니다가 시름시름 앓더니, 2주일뒤에 굶어 죽어 왕대비(인원왕후)의 명으로 비단으로 싸여 명릉(숙종의 릉) 옆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양이집사’ 숙종의 퍼스트캣 ‘김손’ 스토리
이 기록은 실록에는[91] 없는데 국정에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이라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 듯.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익이 숙종 때의 관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숙종이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고양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고양이 이야기는 다른 기록으로도 교차검증이 되며, 그 가운데는 금손이의 어미인 금덕(金德)이를 위해 장례식(!)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성종과 더불어 빼도박도 못할 역대 한국사 최고위 애묘가가 맞을 것이다.(열성어제 수록.) 이 금덕 / 금손의 품종은 불명이나, 이름에 '금(金)'자가 들어간 것을 볼 때 '한국 고양이' 중 이른바 '치즈 태비'로 불리는 황색 종으로 추측하는 주장이 있다.대저 ‘개와 말도 주인을 생각한다.’는 말은 옛적부터 있지만, 고양이란 성질이 매우 사나운 것이므로, 비록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만들었다 해도, 하루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갑자기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금묘 같은 사실은 도화견[92]
에 비하면 더욱 이상하다.
이익,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중 금묘(金猫)
또한 조선 후기의 문인 김시민(金時敏)[93] , 1681년 ~ 1747년)의 문집인 동포집(東圃集)에도 금손이의 죽음을 추모한 시인 금묘가(金猫歌)가 전하고 있다.[94] 동포집을 보면 금묘가는 동포집 2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동포집 2권에는 김시민이 1715년에서 1721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기는 숙종이 승하한 1720년과 딱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에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금묘만 가까이서 선왕 모시고 밥 먹었네.
낮에는 조용히 궁궐 섬돌에서 고양이 세수하고,
차가운 밤에는 몸을 말고 용상 곁에서 잠들었네.
비빈들도 감히 고양이를 가까이하여 길들이지 못하는데,
임금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며 고양이만 사랑하시었네.
김시민, 동포집 중 금묘가(金猫歌)
실록을 보면 유독 고양이가 궁궐에서 깽판을 치는 기록이 숙종실록 이후 영조실록에까지 많이 나타난다. 궁궐에 고양이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 특히 영조는 팔에 통증이 오자 어의로부터 "고양이 생가죽이 팔 통증에 좋다고 하니까 시험해 보시옵소서"라는 처방을 들었는데 "내가 옛날부터 여러 고양이가 궁궐을 싸돌아다니는 걸 봐서 그런지 차마 못 죽이겠다"라고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의 발언으로 미뤄보면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거나 기르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애묘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종실록을 보면 유난히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자주 나온다. 각각 숙종 4년, 9년, 10년 기록에 나타나는데 눈이 4개였다거나 머리가 2개였다거나 머리는 하나인데 몸통이 2개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기형 동물에 대한 기록은 이전 왕들의 실록에도 보이지만 대개 한 번 정도 기록되었을 뿐이고 숙종실록에는 그것도 고양이로 유난히 자주 나타난 편이다. 아마도 숙종이 고양이를 궐에 많이 두었기에 기형 고양이 목격도 높아졌고, 혹은 숙종에게 가깝게 느껴질려면 다른 동물보다 고양이가 기형인 것이 더욱 가깝게 느껴져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5. 어진[편집]
아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해당 어진을 숙종어진으로 추정하게 된 결론의 근거이다.
열성어진에서도 간략하게 그려진 숙종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다만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은 대체로 조선의 공식 어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 초상화 또한 숙종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관모 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곤룡포를 입었기 때문에 익선관을 착용한 어진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바닥에 깔린 화문석은 조선시대 어진 제작 연대의 지표가 되는 것으로 처음에는 태조와 세조의 어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문석이 아닌 채전을 그렸다. 채전이 화문석으로 바뀌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부터이다. 화문석의 용문양을 순조어진(1830년 도사)과 철종어진(1861년 도사)을 통해 분석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용문양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묘사, 채색이 정교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와 비교해 보면 이 어진의 크고 거친 용문양은 순조어진보다 더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화문석을 그려 넣은 순조 이전의 어진으로는 숙종, 영조, 정조 어진이 있으며 이 중 익선관본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이다. 곤룡포에 나타나는 양식은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어진이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궁중서화Ⅱ_소장품도록 제14책,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 44쪽
6. 직접 쓴 글과 시[편집]
누이인 명안공주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봄날에 누이를 그리워하다
그대가 세상을 떠난 뒤로
불현듯 벌써 봄이 돌아왔네
심원(공주의 정원)의 나무들이 쓸쓸하고
봉각(대궐)의 티끌이 서글프네
꾀꼬리 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밝은 달에 배나 마음이 아프네
후덕해도 보답이 없었으니
추억함에 슬픔이 더욱 새롭네
남한산성에 갔을 때 쓴 시이다. 이 시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겪었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남한산성 행궁에 있다가 감회가 일다
천연의 금탄성지가 왕기를 진무하고
봉황 날고 용이 서려 대궐을 옹위하네
군영에 달이 밝아 딱따기 소리 들려오고
행궁에 바람 빨라 피리 소리 드무네
험천[96]
에 비가 내려 마음이 아프고쌍령[97]
에 구름 짙어 슬픔이 더해지네조정 계책 좋지 않아 진실로 한스러우니
충신과 의사가 옷자락에 눈물 적셨네
7. 대중매체[편집]
7.1. 영화[편집]
7.2. 드라마[편집]
- 1971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박근형이 연기했다.
- 1982년 MBC 드라마 《여인열전》 중 제1화 <장희빈>에서는 배우 유인촌이 연기했다.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강석우가 연기했다. 그저 장옥정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바지사장스러운 임금으로 묘사되다가 숙빈 최씨가 장희빈보다 더 예뻐서 장희빈을 버리고 숙빈 최씨를 선택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장희빈 참조.
-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임호가 연기했다.
- 2002년 K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전광렬이 연기했다. 카리스마있고 불같은 성품이지만 실은 냉혹한 정치가였던 숙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예를 연마하며 칼을 휘두르는 등 그나마 실제 역사의 숙종과 가장 비슷한 드라마 속 숙종이라 할 수 있다. 한번 뚜껑이 열리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던 불같은 모습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평생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여인에게도 사약을 내릴 정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그려졌다. 그러나 드라마 중반 이후부터는 기존 드라마의 이미지로 되돌아갔다.
-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는 배우 지진희가 연기했다. 시청자들이 깨방정 혹은 허당으로 부르며 대부분의 드라마에 나오는 진중하고 고풍스러운 임금님이 아닌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그렇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른바 '신세대 임금님'으로 나왔다. "나는 이렇게 뛰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담을 넘어본 적이 없다."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왕이 뛰어다니거나 담을 넘을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궁궐에서 빠져나와 암행하는게 취미 생활. 하지만 역적의 딸로 몰려 출궁당하게 된 동이를 끌어안고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임금 자리도 포기하겠다"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라도 왕권을 위해 이용하고 버렸던 실제 역사 속 모습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드라마만 놓고 보면 괜찮은 주인공이지만 노회한 정치인 송시열을 15살 때 귀양보내고 29살 때 사약을 내려 보내버린 역사 속의 냉혹한 카리스마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99] 일본판 성우는 이노우에 노리히로.
- 2012년 MBC 드라마 마의에서는 아역배우 강한별이 연기했다. 현종의 외동아들로 얼굴에 종기가 생겨 사투를 벌이다 백광현의 외과술을 받아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고 나온다.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배우 유아인[100] 이 아역은 채상우가 연기했다. 희빈 장씨 역은 김태희로 숙종 쪽이 연하라는 것을 반영한 것 같다. 유아인 특유의 목소리와 섬세한 연기에 시청자들의 호평이 줄을 이어 사실상 드라마를 떠받치는 기둥. 하지만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이전의 냉철하고 정치적인 숙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패악을 부리는 장옥정도 용인하는 등 갈수록 캐릭터가 붕괴하고 말았다. 일개 후궁이 대전에 난입하는데도 좋다고 지켜보는 꼴을 보면 혼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 2016년 SBS 드라마 대박에서는 배우 최민수가 연기했다. 201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 사이에서 숙종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애묘가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엄청난 성질머리로 대표되는 불같은 성격과 냉철한 정치가의 모습이다. 이 드라마에서 최민수는 후자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데 <조선왕조실록>상 기록된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해당 배역을 맡은 최민수의 노력 덕분이다. 배우 특유의 카리스마와 재해석이 잘 어울려서 기존의 숙종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표현해 내었다는 평이 있다. 이색적이게도 폐병에 의한 고통 때문에 아편을 복용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하고 줄담배를 피우거나 애체(안경)을 쓰고 정무를 보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101] 드라마의 묘사는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정곡을 찌르는 말 한마디, 특유의 행동과 분위기 덕분에 그의 앞에 서는 모든 이들의 숨을 죽이게 만든다. 성질을 안부리는 것은 또 아니라서 드라마 초반에 숙빈 최씨를 음모를 꾸며 제거하려 했던 장희빈의 머리채를 냅다 잡아[102] 내동댕이 쳐버리는 모습도 보여준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이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에 대한 고증도 잘 지켜졌다.[103]
- 2019년 SBS 드라마 해치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
8. 관련 문서[편집]
- 조선/왕사
- 결송유취보
- 다섯발톱 용문 청화백자
- 단종대왕실록부록찬집청의궤
- 백자 달항아리
-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 백두산정계비
- 병신처분
- 상평통보
- 수교집록
- 숙종실록
- 숙종실록보궐정오
- 신전자초방
- 안용복
- 열성지장통기
- 요계관방지도
- 전록통고
- 진법언해
- 탐라지도 및 지도병서
- 행군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