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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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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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8월 20일 태조에 의해 책록
좌명개국공신 (1등)
김사형남 은1,2남 재배극렴
오몽을1이 제1, 2이지란이 화
장사길정도전1, 3정 총정 탁
정희계조 박4조인옥조 준
김인찬5이방간6, 7이방원6이방의6
협찬개국공신 (2등)
박 포8유 창윤 호이민도
장 담9정용수10조 기조 반
조영규조 온홍길민조 견11
황희석12
익대개국공신 (3등)
고 여김 균김 로손흥종13
심효생1안경공오사충유원정
이 근1이백유이 부이 서
이 직14장지화1함부림황거정13
민여익11임언충11장사정11, 15조영무11
한상경11한 충11
1 1409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2 1421년 태종 때 복권
3 1865년 고종 때 복권
4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5 1392년 9월 16일 태조에 의해 책록
6 1398년 2월 15일 정종에 의해 책록
7 1416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8 1400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9 1422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10 1418년 조사의의 난으로 인한 제명, 1437년 세종 때 복권
11 1392년 9월 27일 태조에 의해 책록
12 1392년 11월 19일 태조에 의해 책록
13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인 혐의로 인한 제명
14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15 1417년 회안군의 첩과 간통한 혐의로 인한 제명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좌명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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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1월 15일 태종에 의해 책록
진충좌명공신 (1등)
민무구1민무질1신극례이거이
이 무2이숙번이 애조영무
하 륜
익대좌명공신 (2등)
이 래이천우이 화
익대좌명공신 (3등)
김영렬류 기마천목박석명
박 은성석린윤 곤윤 저
이 숙이지란조희민황거정3
익대좌명공신 (4등)
권 근김승주김 우김정경
류 량문 빈서 유서 익
송거신심구령연사종윤 목
윤자당이승상이 원4이 응
이종무이 직5조 경조 박6
조 온한 규홍 서
1 1407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2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3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임 혐의로 인한 제명
4 1426년 노비 불법 모집 혐의로 인한 제명, 1456년 세조 때 복권
5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6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黃居正

생몰년도 미상, 창원 황씨

고려조선의 관원, 조선의 개국공신 겸 좌명공신. 궁중 음악가 황효성의 아버지.


2. 생애[편집]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판군기삼사에 임명됐다. 사대부 출신으로서 정도전의 당여로 분류되는 사람이긴 하나 공신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동년 어느 날 조선 태조가 연 첫 과거시험에 유자들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도전은 새 왕조에 비협조적인 사대부들에게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 양위 과정에서 이색의 제자들인 이숭인, 우홍수 등 8명을 귀양보내면서 곤장만은 집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도전은 황거정을 시켜 형을 집행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전라도로 간 황거정은 우홍수, 이숭인, 김진양, 우홍명을 곤장으로 때려죽여 명을 받들었다. 곧 정도전의 배려로 황거정도 개국공신에 올라 의원군에 봉해졌다.

1396년에 숙주의 수령으로 나갔고, 1398년 정도전과 당여들이 척살될 때 그만은 무사했으며, 1401년에는 개성유수를 지내다가 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으로 3등 좌명공신에 봉해졌다. 1403년에는 참지의정부사를 지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참지승추부사에 임명됐다.

1408년에 천추절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참지의정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409년에 하륜, 성석린과 함께 이지성을 탄핵했고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0년에는 신경제조, 좌군도총제에 임명되고 1411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부의를 보내는 등 공신 대우를 제대로 했다. 그러나 역시 같은 해 사헌부에서 정도전이나 남은이 고려 유신들을 가혹하게 처리한 것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조선 개국을 거부한 죄인들이긴 했으나 황거정이 사대부들에 대해 가혹 행위를 했다고 탄핵을 받았다.

폐서인이 되었으며, 자식들은 금고형에 처해지고 공신 지위를 박탈당하고 가산 역시 적몰됐다. 이후로 행방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1416년 자식들의 금고형이 풀렸으며, 1423년 사면돼 자손들의 과거 취재가 허용됐다. 덕분에 그의 아들인 황효성이 궁중 음악원인 장악원에 등용돼 어모장군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대에는 명인들을 모아놓고 왕 앞에서 지휘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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