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역사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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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체적인 탐구
3. 회차별 탐구
3.1. 1회
3.2. 2회
3.3. 3회
3.4. 4회
3.5. 5회



1. 개요[편집]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전체적인 탐구[편집]


  • 거란을 두고 "대제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제국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부터 사용된 번역-혼성어다. 당대에는 그냥 "대국" 혹은 "천조"을 사용했다. "대국"에 사대할 경우 "상국(上國)"이라고 칭했다.[1] 고려의 경우, 대거란 문서에서 "상국"이나 "황조(皇朝)"라고 지칭했다. 아울러 송나라 또한 "상국"이라고 했는데, 송과 거란 모두 내부적으로 "북요(北遼)"나 "북조(北朝)" 및 "서송(西宋)"이나 "서국(西國)"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방위 사용은 이들 국가들이 대등한 입장이었음을 말해주는 측면이 있다.[2] 고려 전기에는 대국과의 관계 성립과 존속을 전제하는 규약으로서 군신 의례를 이행한 것이기 때문에, 원 복속 이전까지 황제(천자)의 신하라는 위상이 고려 국내에서는 관철되지 못했다. 때문에 몽골의 지배로부터 유리되지 못하기 전까지의 고려적 국체는,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 가운데 제후 혹은 황제국 체제로 의도적이고 일관적으로 선택⋅운용되지 않았다.[3][4]

  • 이전의 고려시대 사극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임금은 정무를 볼 때 송나라식 복두인 절상건과 노란색 용포인 상포, 때로는 주황색의 용포인 자황포를 착용하고 등장한다. 고려 임금의 예복에는 상포(緗袍), 자황포(柘黃袍), 자황포(赭黃袍), 치황포(梔黃袍), 총 네 가지의 황룡포와 강사포(絳紗袍)라는 단색의 홍포가 있었는데 상포(緗袍), 자황포(柘黃袍)는 정무복이었고 자황포(赭黃袍), 치황포(梔黃袍)는 팔관회나 연등회 등의 행사 때 착용하였으며 강사포(絳紗袍)는 조례 때 착용하였다. 때문에 드라마 내 고려 임금의 복식 색깔이 다양한 것은 기존에 고증된 사료들에 일치한다.[5][6]

  • 원래 요 왕조의 황제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복제를 따라 용포를 걸쳤으나, 본 작품에서는 유목민의 복식을 하고 있다. 고려 군주들과의 차이점을 주고 유목민이라는 개성을 살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를 방문한 한기가 확실하게 단령사모를 쓴 것을 보면 중국의 용포를 입은 모습도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 거란인들이 몽골어를 사용한다. 거란이란 민족 자체가 몽골인과 한인에게 동화되어 거란어가 사멸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몽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거란인과 몽골인들은 같은 동호계 민족이었으며 요 왕조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서로 통역 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했을 정도로 언어적 유사성이 높았다. 현대에 거란어를 연구할 때에도 몽골어를 참고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작중 인물들이 몽골어를 사용하는 것은 딱히 재현 오류라 볼 수 없다.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다우르어를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다우르인들은 거란인들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7] 굳이 다우르어를 사용할 필요성은 전혀 없으며 현실적으로 다우르어는 몽골어의 방언으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고, 몽골어의 접근성이 훨씬 더 좋기 때문에 몽골어를 사용하는 게 타당하다.

  • 거란 장군들의 갑주는 상당히 재현을 충실하게 한 형태로 잘 만들어져 있는 반면, 고려 장군들의 갑주는 과거 근초고왕(드라마), 정도전(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에서 등장한 삼국시대, 여말선초 찰갑 소품들을 기반으로 송나라식 투구만을 새로 추가한 정도라 아쉬운 반응이 꽤 있다. 다만 고려시대는 실제 생활상을 그린 회화 자료나 갑옷 유물이 이전의 삼국시대, 이후의 조선시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탓에 현재로서는 여요전쟁 시기에 사용된 고려 초중기 갑옷의 정확한 형상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은 참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비록 본작의 배경이 된 여요전쟁 시기보다 한참 뒤에 쓰여진 책이긴 하나, 어쨌든 고려군의 복식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로 여겨지는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찰갑의 기본적인 큰 틀은 여말선초 찰갑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8] 그렇기에 여말선초 찰갑에 탱화나 불탑 부조, 몽고습래회사 등에서 고려군이 착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봉시식이 달린 송나라식 투구를 조합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재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일반적으로 사극에서 지휘관을 부를때 "장군!"이라고 부르는데 작중에서는 직책을 부른다. 1화 오프닝 시퀸스에서도 강감찬을 일컬어 "상원수!"라고 하는데 고려, 조선 시대에는 높은 직급의 사람을 부를땐 영감, 또는 직책 + 대감으로 불렀고 장군은 높은 직급의 사람이 아래 직급의 사람을 부를때 쓰는 말[9]이었기 때문에 현실에 가깝게 반영하고자 한 모습이 보인다.

3. 회차별 탐구[편집]



3.1. 1회[편집]


  • 역사서에서는 소배압이 10만 정예 기병을 끌고 왔다고 되어 있으나, 프롤로그에서 보이는 거란군은 대다수가 보병이다. 이는 제작 환경 상 그걸 묘사할 정도로 충분한 수의 말을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사실 상황을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검차가 기병 돌격 막기에 최적화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정예 기병들이 검차에 맞서 말에서 내려서 보병화되어 싸웠다고 하면 딱히 이상한 모습은 아니다.

  • 소배압 휘하 거란군들이 출세를 외치며 돌격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들이 보통 병사들이 아닌 것도 연출로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소배압의 10만 정예 기병들 중에는 황제 직속 최정예 부대인 우피실군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피실군 경우에는 전공을 세울 경우 정말 출세가 보장되는 직업군인들이었다.

  • 목종이 여흥을 즐길 때에 동화 청자인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와 동화 청자 술잔을 사용하는데, 동화 청자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출현한 것이라 드라마의 시작점이자 11세기 초기인 목종 대에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그렇지만, 순청자만 사용해 미장센이 단조로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동화 청자도 고려 시대의 유물이기에 재현에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평하기에는 어렵다.

  • 화살통인 전통이 전통적인 첩개, 동개가 아닌 등에 매다는 물건으로 나오는건 아쉬운 부분. 한국 사극은 그 종류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유독 활집 재현이 엉망인데, 현대의 국궁 동호인들마저 장비를 갖추면 동개, 아니면 임시방편으로 궁대(활띠)를 허리춤에 묶어두고 전대처럼 쓰고 있는 실정(實情)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상하리만치 편집적인 편.[10]

  • 목종의 동성애 관련 내용이 꽤 과감하게 전면적으로 등장했으며, 일부 장면은 로맨스 장르에 가깝게 연출하기도 했다. 사실 '천추태후'에서도 목종과 유행간의 키스하기 직전까지 나온 적이 있기에 새삼스러운 장면은 아니다. 그 외에 작중 남색을 하는 인물의 경우 귀걸이를 왼쪽만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대에 남성이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 목종이 신하들을 나무라면서 "이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대들을 뽑았다" 라고 하는데 실제 목종은 자신의 12년 재위기간 동안 꽤나 많은 신하들을 등용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현종시대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 역시 목종시대에 등용되었다. 게다가 강조가 계속해서 목종에게 서신을 보내고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강조는 죽기 직전에 목종의 환영을 봤다는 이야기가 남을 정도이기에 실제 목종에게도 반역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어느정도 충성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고려와 거란의 국경을 압록강으로 설정했는데, 당시 고려의 북쪽 경계는 압록강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 흥화진이었고 요나라 역시 압록강을 건너 고려 침공을 위한 전초기지로 보주(保州)성을 쌓았기 때문에 고려-요 국경은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11] 그렇지만, 강을 경계로 하는 것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12]

  • 1화 초반부에 흥화진에서 양규가 포로를 교환하고 난 직후 원종석과 말싸움을 벌인 김훈최질의 장면이 나온다. 원종석은 2차 여요전쟁 때 서경을 거란에 바치려 했던 반역자이고, 김훈과 최질은 2차 여요전쟁이 끝난 뒤 문관직을 얻지 못한 것과 더불어 무신들의 토지를 빼앗아 국가 재정을 확보하거나 문관에게 지급하는 것에 반대해서 결국 무신정변의 선구인 김훈·최질의 난을 일으키는 인물들[13]이다. 나중 역사에 나올 문신, 무신간의 알력과 더불어 이 둘의 개연성을 미리 알음알음 보여준다.

  • 프롤로그 후 스쳐지나가듯이 고려의 수도 개경의 거리를 보여주는데, 자세히 보면 외국인이 있다. 벽란도에서 활발하게 외국과 무역하면서 외국 상인들이 고려와 자주 교류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 1화에서 등장한 고려의 아동들 중에 쌍계 머리를 한 아동들이 존재했다. 당대의 생활상을 반영한 모습이다.

  • 절간에서 뒹구는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고양이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고양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은 동문선에 실린 김부식(1075~1151)의 '아계부(啞鷄賦)'이다. 5~6세기 경 제작된 가야 집모양토기중에는 집 안에 있던 두마리의 쥐가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표현된 유물이 존재하지만, 이 '고양이'가 현재의 집고양이(Felis 속)인지 아니면 (Prionailurus 속)인지는 학계의 논쟁 중이다.

  • 극중 행렬에 등장하는 고려 친위군 복식은 고려도경에 묘사된 신호좌우친위군의 금화대모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 압록강을 넘어온 거란 척후병들을 두고 문관과 무관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강조가 "명분은 힘이 만드는 것" 이라며 힘의 논리 앞에서 명분은 허울뿐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강조 역할을 맡은 배우 이원종이 과거 영화 황산벌(영화)에서 연개소문 역할로 등장했을 때 했던 대사[14]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일종의 배우 개그로 보인다. 의외로 KBS 대하사극은 정도전(드라마)에서 이지란 역할을 맡은 선동혁이 과거 용의 눈물 시절 이숙번 역할을 맡은 걸 두고 "이숙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라는 대사를 집어넣는 등 배우개그를 종종 넣는 편이다. 또한, 1화 시작 부분에서 거란 군인들이 '전쟁은 기회다. 출세다.'라고 외치는데, 이는 김한솔 감독의 전작이자 KBS의 다큐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 히데요시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 1화에 나오는 건축은 기존 조선시대 세트장을 활용하여 형편이 없지만, 그나마 MBC 신돈 세트를 활용한 점이 다행이다. 다만 내부 세트장의 경우, 고려시대 남아있는 건물 중 하나인 봉정사 극락전의 화반과 공포를 그대로 차용하여 그나마 건축 재현에 신경을 쓴 점이 보인다.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오류가 왕과 신하가 정전에 모여 정사를 논하는 것인데, 실제로 고려와 조선 때 궁궐 정전은 외국 사신이 오거나 특별한 국가 행사 시에만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본궐(만월대)의 경우 기록을 보면 외국 사신 접대 및 각종 불교행사를 진행한 공간으로 적혀있다. 일반적으로 정사를 논하고 왕이 대부분 있던 공간은 '편전'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자꾸 '대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재현에는 맞지 않다. 또한 대전 세트의 경우 '보'를 사용하는 대량식 구조에서는 나올 수 없는 공간의 깊이가 연출되었다. 내부에 기둥이 더 있고 보로 연결되어야 되는 구조가 구조적으로 맞는데, 이는 실제로 지붕부를 실내 세트장에서 구현할 필요가 없다보니 생략을 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으론 말이 안되는 남북방향으로 깊고 내부 기둥을 지나치게 많이 줄여서 넓은 공간을 만들게 된 것 같다.

  • 단청의 경우 송나라 영조법식의 것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1972년 서울 진관사에 진관스님에 의해 신축된 건축물인 '나가원'의 단청과 거의 같다. 나가원의 경우, 단청 머리초가 송나라 영조법식에 나오는 단청 머리초와 흡사하지만 자세한 구성은 다르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재현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재현에 맞으려면 공포부를 참조한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고려 단청을 참조하고, 송나라 및 금나라, 요나라의 단청을 참조하는 것이 맞다.

  • 목종이 거처하던 침전의 경우 바닥에는 카페트를 깔고, 당가를 응용한 침대를 구성했는데 재현에 완전 맞지는 않지만 당시 고려는 입식구조였기에 아주 틀리지는 않다. 방송 중 대전의 바닥을 보면 나무널로 마루를 구성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 모두 정전에는 바닥에 전돌을 깔았다. 나무널로 마루를 깐 것은 반영 오류.

  • 사실 이 시점에서 현종의 호칭은 '대량원군'이 아닌 '신혈소군'이다. 천추태후는 현종을 신혈사로 보내면서 임금의 서자이자 승려가 되어진 자에게 부르는 호칭으로 이렇게 부르라고 했다. 애초에 암살까지 시도했고 후계자로 생각지도 않은 시점에서 원군 대우를 해줄 이유는 없다. 단 그 배후를 아는 사람들은 반발심 내지 현종을 향한 충심에서 대량원군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호칭이 대량원군이기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작가의 전작 태종 이방원에서도 이방석을 '소도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더 잘 알려진 호칭인 '의안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천추태후가 '태후 폐하'로 불리는데, 사실 이 말 자체는 중국 사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존재하는 말이 맞지만 고려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호칭이기에 정확하게는 '황후 전하'가 더 올바른 표현이다. 무인시대에서의 '태후 폐하' 호칭을 따라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태후의 권력이 그만큼 막강함을 보여주는 장치로 보는 의견도 있다.

3.2. 2회[편집]


  • 천추태후의 궁인들이 신혈사에 있던 현종에게 찾아와 독이 든 음식을 먹여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은 실제 사실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현종(당시 대량원군)이 독약을 넣은 술과 음식을 의심하다 까마귀와 참새를 향해 던지는데, 그걸 먹은 새들이 독이 온몸에 퍼져서 다 죽었다는 기록[15]이 남아 있다. 본작에서는 이 기록을 까마귀와 참새 대신 고양이로 바꿨다.

  • 귀주대첩 시점을 제외하고 극중에서 강감찬은 충주 판관으로 첫 등장을 하는데, 사실 정사/야사에 따르면 강감찬은 고려사에서 예부시랑으로서 등장한 2차 여요전쟁 이전까지는 한양 판관이라는 관직을 지냈었다는 점을 빼고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16] 때문에 강감찬이 그 기간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을지에 대한 부분은 순전히 창작에 가깝다. 다만 기록에서도 강감찬이 청렴하고 부패하지 않은 관리이며 이런 점 때문에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고 적혀있는데 강감찬이 이런 이유로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장면은 이런 면을 반영한 각색이라고 하겠다. 야샤에는 강감찬은 지방에서 수령생활을 하던 적의 이야기들이 꽤나 많기에 아무래도 그런 것들을 참고한 것일 수도 있다.

  • 드라마에서는 요 왕조의 수도 상경 임황부를 요 왕조의 수도로 설명했지만, 성종대에는 수도가 총 4개로, 상경 임황부, 동경 요양부, 중경 대정부, 남경 석진부가 존재했다.[17] 물론 전통적으로는 상경이 수도로서의 전체적인 기능을 행사했기에 상경을 진정한 제1수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점에서는 중경 대정부의 위상이 높아져 상경의 역할을 조금씩 대체하고 있었다.[18] 또한 CG로 구현한 상경의 모습도 평지성인 원래의 상경과는 상당히 다르고, 겨울이어서 눈으로 뒤덮여야 할 곳이 신록으로 무성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경 임황부는 복원도조차 제대로 없는 형국이기 때문에 제작진의 상상력이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며, 더불어서 드라마의 제작 시점도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까지 재현을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 작중에 목종이 초반에 정사를 열심히 돌봤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천추태후에서는 마치 초반부터 목종이 억지로 왕위에 올라 정치에 손을 놓은 것처럼 묘사를 했는데 실제 목종은 즉위 초기에 많은 신하들을 등용하고 정사를 살피는 등 꽤나 정치에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천추태후의 제멋대로의 섭정,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관계 등으로 인해 지쳐있던 쯤에 동성애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꽤나 뛰어난 묘사이다.

  • 이전 작품인 천추태후에서 목종이 아닌 천추태후가 강감찬을 사용해서 현종을 보호하는 것처럼 묘사했는데 실제는 진관사에서 스님들이 많이 도왔고, 오히려 목종이 더 신경을 썼다. 그런 점에서는 실제 기록에 충실한 묘사이다.

  • 거란의 성종의 모친이었던 승천태후[19]가 전장에서 군을 이끌었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엄연한 사실이다. 북송과의 전쟁에서 직접 맞서 싸운 것 외에 송과 화친을 맺어 전연의 맹을 통해 거란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대단한 인물이다.

  • 강조의 정변은 1009년 1월에 일어나는데, 이 시점의 요 성종은 중경에 행차해 공무를 살피고 요하에 낚시를 하러 갔었다.[20]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성종이 상경에서 병환 중인 모후를 보살피는 것으로 묘사했다. 아무래도 요사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던 탓에 그렇게 처리한 보이며, 보편적으로 요 왕조의 수도를 상경으로 일반화하는 일이 많은 것도 한몫 한 것으로 추정된다.

  • 목종이 백성들에게 배푼 잔치는 《고려사》에 실제로 있는 기록인데, 목종 10년 7월에 목종이 친히 구정(毬庭)에 나아가 남녀 백성들 중 나이 팔순 이상 고령자 및 위독한 병자와 장애인 635명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직접 술과 음식, 베와 비단, 차와 약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는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본작에선 12년에 있었던 천추전 화재와 하나로 합쳐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도중에 불이 난 것으로 각색했다.[21]

3.3. 3회[편집]




3.4. 4회[편집]




3.5. 5회[편집]



[1] 물론 이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나레이션이며,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러 이런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2] 허인욱(2018), "君主號로 본 고려 전기의 대외인식", 《한국중세사연구》 55, p.371.[3]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2021), "고려적 國制 운용의 인식적 맥락들", 《민족문화연구》 92.[4] 극중 인물들이 태조 왕건을 언급하며 '태조황제'가 아니라 줄곧 '태조대왕'이라 칭하면서도 막상 현 임금인 목종에게는 황제라고 칭하는 것을 통해 당시 일관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고려적 국체를 묘사하였다. 아울러 강감찬이 거란 황제와 고려 군주의 조공책봉관계를 언급하며 '고려국왕'이라 칭하는 부분 또한 있다. 이러한 고려 전기의 일관되지 않은 국체의 모습에 대해서는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를 참조.[5] 고려 문종 시기, 문종이 신하들에게 '임금이 착용할 수 있는 의복의 색에 다른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신하들이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의 의복 이외에는 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때문에 해당 색깔의 범주 내에서 네 가지의 황룡포와 한 가지의 강사포를 만들어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6] 아울러,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국왕은 휴식을 취할 때는 하얀 옷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1화에서 그대로 재현하였다.[7] 유전자 검사를 통해 다우르인들이 거란인들의 직계 후손이 아님이 밝혀졌다.[8]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라고 적혀져 있는데, 이는 갑옷의 상하의가 붙어 있는 포형 갑옷이며 옆구리가 붙어 있지 않고 트여 있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말선초부터 임진왜란까지 조선에서 사용된 찰갑의 구조 역시 이 설명에 부합한다. 서긍이 자신이 본 고려군의 갑옷을 두고 특별히 찰갑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당대 동아시아 갑옷의 주류가 찰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되려 특별히 재질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찰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9] 현대에도, '장군'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나 'X장군~' 하는 식으로 부를 떄나 쓰이며, 당연히 '부하들은 사단장님, 군단장님' 등의 직책으로 부르지 '장군!' 할일은 없다. '장군님'도 아니고 '장군!'은 반말이다.[10] 덩달아 엉망인 사법(射法)에는 오히려 '활이란, 단기간에 배우기 어려운 기예'임을 고려할 때 차라리 편집권을 가진 쪽에서 잘 만져야 할 부분이라고 납득하는 시대극 동호인들이 다수다.[11] 고려는 여요전쟁 이후 보주를 침공하지만 차지하는데 실패해서 이 국경은 거란 멸망 때까지 고착된다.[12] 실제로 흥화진 또한 압록강과 인접하고 있기에 강을 경계로 한다는 설정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13] 비슷한 시대를 다룬 천추태후에서도 이 두 사람이 언급되었지만, 반란과 관련해서는 통편집되었다.[14] "정통성? 기래, 내래 쿠데타 일으켜서 정권잡았다, 와? 김춘추, 너레 반 쪽짜리 왕족 주제에 김유신이랑 짝짝꿍이 해서리 정권 잡디 않았서? 의자왕, 니 아바디도 서자디?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래 누구래 있어야? 전쟁은 정통성 읎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야야!" 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래서 의자왕은 맞장구를 치면서 "아. 고것이 정치적 경륜이제. 즉위 초기에 정권 장악하고 국론통일할라면 다들 하는거 아녀?" 라고 대답한다. [15] 야사에는 당시 신혈사 주지였던 진관스님이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16] 다만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 지리지에 강감찬의 행적이 나타나기는 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다.[17] 서경 대동부는 성종 다음 황제인 흥종대에 승격되었다.[18] 요 왕조의 황제들은 사시날발이라 부르는 순행 제도를 운영하여 더운 여름에는 상경 일대로 올라갔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중경과 남경이 위치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제작진의 입장에 서서 변호하자면 시사날발에 대해 알고는 있었어도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는 유목민 왕조의 순행 제도를 수만 년 동안 정주민으로 살아온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단기간에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성종이 상경에 머무르는 것처럼 묘사했다고 해도 재현을 어겼다고 비난의 잣대를 들이밀기는 어렵다.[19] 주로 소태후로 더 알려져있다.[20] 요사 성종 본기 5권. 통화 26년(1008년) 겨울 10월 1일. 중경에 행차하셨다(冬十月戊子朔, 幸中京) 통화 27년 봄 1월, 요하에서 낚시를 했다(二十七年春正月, 鉤魚土河)[21] 작중 목종은 연등회에서 백성들에게 만수무강하라고 외치고 백성들은 '황제폐하 만세'를 외친다. 사실 당시 만수무강은 국왕만이 받을 수 있는 경하인데 목종은 되려 그것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례한 것이다. 이같은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목종이 백성들에게 성군이었으며 폐위당해야 할 군주로 비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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