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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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비정통 황제 · 할거정권 군주






당나라의 반란자
羅平帝 | 나평제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존호
천하도지병마사(天下都知兵馬使)
연호
나평(羅平, 860년 2월 10일 ~ 860년 6월 21일)
부모
아버지 구씨(裘氏)
생몰
? ~ 860년 8월
재위
860년 2월 10일 ~ 860년 6월 21일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裘甫
(? ~ 860)

당나라 시기 구보의 난의 주모자.


2. 생애[편집]


절동 사람으로 859년 12월에 반란을 일으켰고 구보의 기마병이 평수 동쪽의 작은 강으로 도달하자 절동의 백성들은 식량을 챙긴 채 배를 타고 하룻밤을 새서 달아났으며, 상산현을 함락하고 860년 정월 4일에 범거식을 죽이고 유경을 퇴각시켰으며, 14일에는 무리 1천여 명을 인솔해 섬현을 함락하고 부고를 열고 장사를 모집해 무리가 수 천 명에 이르렀다.

2월 10일에 구보는 섬서에서 심군종, 장공서, 이규 등과 싸워 패배하는 척 달아나 수공으로 세 장수를 죽게 했으며, 여러 무리들이 모여 3만에 이르렀고 구보는 천하도지병마사(天下都知兵馬使)라 칭하고 연호를 나평(羅平)이라 하면서 인장을 주조해 천평(天平)이라 했다.

3월에 군대를 보내 구주, 무주 등을 공격해 약탈했고 방질, 누증, 방경심 등이 무주에서 막아내자 구보는 군사를 나누어 명주를 공격했다. 명주를 함락하지 못하자 태주로 진격해 당흥현을 깨뜨렸으며, 3월 19일에 직접 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상우현을 불태웠고, 23일에는 여요현을 공격해 여요현의 현승, 현위를 죽인 후에는 자계현을 공격해 봉화현에 도착했다가 영해현을 공격해 현령을 죽였다.

군사를 나누어 상산을 포위했고 왕식이 절동절도사로 임명되어 파견되자 유왕으로부터 왕식을 막으면서 동남 지역 절반을 얻을 계책을 들었지만 구보는 왕식을 두려워 결정하지 못했다. 4월에 구보는 왕식에게 항복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지만, 왕식은 항복이 아니라 허실을 엿보려는 것을 알아챘고, 왕식이 군사를 모아 동로군과 남로군을 인솔하고 구보가 점령한 여러 곳을 함락했다.

구보는 관군의 공격으로 여러 곳을 잃었고 영해가 함락되자 1만여 명을 이끌고 남진관에 주둔했으며, 관군에게 쫓겨 6월 5일에 섬현으로 달아났다. 섬현에서 포위되자 관군을 상대로 막아내다가 항복을 요청했지만 왕식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6월 21일에 군사를 이끌고 항복 의사를 청했지만 관군이 군사를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자 붙잡혀 월주로 이송되었다가 8월에 장안으로 간 후에는 동시에서 참수되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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