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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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비(非)페론주의 중도 정당.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 유지되고 있는 정당이기도 하다.
2. 역사[편집]
1890년에 일어난 공원혁명(Revolución del Parque, 1890 혁명)을 일으켰던 시민연합(Unión Cívica) 일부 인사들을 주도로 창당되었다. '급진'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급진적이었던 남성의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의미이다. 1893년, 1905년에도 혁명을 시도하였지만 집권하고 있었던 국민자치당(Partido Autonomista Nacional; PAN)에 의해 진압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 남성의 보통선거를 도입하고 1916년 대선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폴리토 이리고옌, 마르셀로 토르쿠아토 데 알베아르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성장시키고 노동 시간 등 개선시키는 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1930년 쿠데타로 인해 축출되고 만다.
페론이 등장하고 나서도 야당에 머물다가 1958년 대선에서 아르투로 프론디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야당에서 벗어나지만 당시 당 내 분열로 타협하지 않은 급진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이 때부터 정의주의자당과 경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쫒기지만, 짧은 기간의 군부를 끝내고 다시 아르투로 일리아 대통령을 당선시킨다. 또, 3년 만에 다시 쿠데타로 쫓긴다.
1970년대에는 다시 페론주의가 급부상에 따라 다시 야당에 머물게 되었지만, 1976년 쿠데타로 일명 국가 재건 과정(프로세소) 시대가 열면서 다시 활동이 중단된다. 포클랜드 전쟁 패전 이후 민주화가 되자 1983년 대선에서 라울 알폰신 대통령을 당선시킨다. 그 뒤로 1999년 대선에서도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당선되었지만, 당시 아르헨티나의 국가 디폴트로 인해 2년 만에 사퇴하게 되었고, 이후로 정의주의자당이나 급진시민연합이나 분열되어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된 이후로는 애매한 노선을 걷게 되었고, 공화주의제안당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당선으로 연립 정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지만, 2019년 대선을 통해 다시 원래 야당으로 돌아왔다.
3. 성향[편집]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본래는 중도좌파 정당이었지만. 20세기 중후반 이후로는 중도화되어 실제로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다양한 성향 때문에 아르헨티나 청년 급진에서 우파인 마우리시오 마크리를 지지하는 것을 인정하자 국제 사회주의 청년 연합으로부터 자격정지를 당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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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이념이기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후안 과이도의 인민의지당처럼 사회민주주의는 그저 간판이고 우파적인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보인다고 평가받기도 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2] 재정보수주의가 주류이나 간혹 사회보수주의자도 있다. 특히 이 정당은 남성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3] 공식적으로 중도좌파임을 자처하고 있으나, 마크리를 지지하거나 군사독재에 대해 부분적 우호적 성향을 보이는 등 논란이 존재한다. 특히 알폰신 이후로는 '공식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나 중도좌파에서 중도우파 내지 경제적 자유주의로 옮겨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4] 현재 마우리시오 마크리 등 신자유주의 친화적인 보수파(중도우파)와 키르치네르주의를 지지하는 진보파(중도좌파)로 양분되어 있다.